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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세계를 어슬렁거리는 디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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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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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는 오는가
일본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도 여러 징후… “미국 펀더멘털 튼튼하다” 반론 불구 우려 심화

사진/ 미국 경제에도 디플레의 징후들이 포착된다. 대이라크 결의안을 발표하는 부시 대통령. (GAMMA)
1990년대에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인 하락 현상)은 일본만의 문제였다. 일본과 함께 세계 3대 경제축을 형성하는 미국과 유럽은 오히려 고성장 속의 저물가라는 이른바 ‘신경제’의 달콤한 과실을 따먹고 있었다. 이 국가들은 고성장을 하면 당연히 뒤따르는 물가인상 압력을 오히려 정보기술(IT) 산업 발달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안정시키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했다.

“가격인하 서비스업으로 확대”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신경제의 꿈이 사라진 것은 벌써 오래됐고, 여기에다 ‘저성장 속의 물가하락’이라는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는 조짐마저 보인다. 이에 따라 일본에 이어 미국과 유럽마저 디플레에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세계 경제계에서 점차 가열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 그리고 미국의 <비즈니스위크>가 최근 들어 잇따라 디플레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으며, 올해 초 더블딥(이중침체)의 가능성을 외친 모건스탠리 이코노미스트인 스티븐 로치 등 저명한 경제 전문가들이 디플레를 경고하고 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간부들이 디플레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반면 글렌 허바드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 등은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여전히 튼튼하다며 이를 일축했다.


디플레는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으로 경제에 득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생산성 향상에 의한 물가하락은 견고한 경제성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이로운 것이다. 반면 수요부진과 공급과잉으로 인한 디플레는 경제를 침체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기업은 수익악화로 투자를 줄이고 감원 등 비용삭감 조처를 취하며, 소비자들은 물가가 더 하락할 것을 기대해 허리띠를 졸라매게 된다.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물가하락→기업수익 악화→투자축소 및 감원→소비위축→경기침체’의 악순환에 휘말리는 것이다. 일본을 제외한 세계 주요 국가들은 대공황 이래 디플레에 빠진 적이 한번도 없다. 오히려 인플레만 걱정해왔다. 이번 디플레 우려는 후자쪽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극심한 디플레는 공황을 의미한다.

세계 경제가 디플레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는 것은 일본이 4년째 소비감소로 물가가 하락하면서 장기 불황에 빠져 있는데다, 미국과 독일에서도 IT 버블 이후 과잉설비 누적과 수요부진, 중국의 저가 수출 공세, 세계화에 따른 경쟁심화 등의 요인으로 물가가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인플레 척도인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가 현재 1.1%로 40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비금융업계의 물가 디플레이터는 지난 2분기까지 1년간 0.6%가 하락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컴퓨터·가전제품·자동차 등 주요 상품의 가격은 그동안 꾸준히 내려온 반면 서비스 요금은 인하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항공운임, 호텔숙박료, 장거리 전화통화료 등 서비스 부문에서도 가격인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최근호에서 “PC(-20.9%)·의류(-2.2%)·자본재(-1%)·신차(-1.6%)·호텔숙박료(-2.1%)·항공요금(-3.8%)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최근 1년간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며 “가격인하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전했다. 물가가 이처럼 내려가는 것은 90년대 거품기에 시설을 확충한 미국 기업들이 거품 붕괴 뒤 경기후퇴에 따른 수요부진으로 공급과잉 상태에 빠진데다, 고객 쟁탈을 위해 제품 가격을 경쟁적으로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도 일본의 길 걷나

사진/ 주가 폭락(왼쪽)과 주가 급등(오른쪽)에 희비가 교차하는 미국의 주식중개인들. 신경제의 달콤한 과실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AP연합)
<이코노미스트>도 최근호에서 “실질 GDP성장률에서 잠재성장률을 뺀 ‘GDP 갭’의 추이가 역사적으로 물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며 “실질성장률이 잠재성장률 미만일 경우는 물가가 대개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현재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잠재성장률(3~3.5%)을 1%가량 밑도는 것으로 추산한다. 미국은 지난 90~91년 경기침체 이후 93년까지 실질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았으며, 당시 물가는 5%에서 2.5%로 떨어진 바 있다. 물론 당시에는 경제가 곧바로 회복됐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일은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독일은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면서 소비가 둔화되고 물가가 하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독일 경제가 부동산 거품 붕괴를 계기로 불황에 빠진 ‘일본식 디플레’를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온다. 독일의 주택가격은 1980년부터 지난해까지 21% 하락했다. 90년대 이후 주택가격이 하락한 나라는 유럽에서 독일뿐이다. 독일 주가도 2000년 3월 최고치를 기록한 뒤 현재 60% 이상 하락했다. 독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현재 1.1% 수준으로 매우 낮은 상태다. 문제는 독일 당국은 이런 심각한 경제 상황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금리는 유럽중앙은행에서 결정하며, 재정정책은 대규모 재정적자를 용인하지 않는 유럽연합성장안정협약으로 인해 쓸 수도 없다.

일본은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내각을 개편하면서 ‘디플레와의 싸움’을 시작했지만 결과를 속단하기는 힘들다. 일본은 부동산 가격이 10년 이상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물가는 35개월째 하락하고 있다. 명목 GDP는 1995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형적인 디플레 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리가 이미 0%에 가까워 금리 정책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디플레가 부채와 결합했을 경우다. 디플레는 기업의 수익을 축소시키고 가계의 소득을 감소시키는 만큼 이들 경제주체들에게 부채 부담이 더 커진다. 특히 채무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부동산 같은 자산을 서둘러 매각해 부채를 줄이려 하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은 더 하락한다. 부동산 가격 하락은 이를 담보로 빌린 가계의 부채 부담을 더 키우는 악순환에 빠진다. 현재 미국 등 주요 국가의 가계와 기업은 IT 버블 붕괴 여파로 부채 부담이 매우 큰 상태다. 현재 미국의 가계 부채는 사상 최고 수준이다.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 꺼지지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낙관론자들은 물론 디플레가 기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허바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보낸 기고문에서 “생산성이 향상되고 있으며, 주가하락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꾸준하며, 부동산 가격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며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언론이 디플레에 관해 너무 과장되게 보도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 뒤 “디플레 위험은 없다”고 밝혔다. 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도 “1930년대 대공황이나 일본의 디플레는 모두 무능한 통화정책 탓”이라며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이 물가하락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디플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디플레, 아시아·유럽 거쳐 미국까지

이들은 “미국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8%로 지난해의 2.7%보다 낮긴 해도 계속 올라가고 있다”며 “지금은 디플레가 아니라 물가상승률이 둔화되는 이른바 ‘디스인플레이션’ 상태”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대공황 때와 달리 서비스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디플레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서비스 산업은 인건비 비중이 높은데 인건비는 좀체 하락하지 않아 가격인하를 용인하기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험해보지 못한 디플레의 징후들이 세계 곳곳에서 돌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뿐 아니라 대만과 홍콩 역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디플레 위험에 직면해 있다. 디플레의 망령이 아시아와 유럽을 거쳐 결국 미국에까지 상륙할지, 한국 경제의 운명도 여기에 달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박현 기자/ 한겨레 경제부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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