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는 오는가
“해외변수 악화”예감 속에 번지는 불안감… 경제지표는 안정적이지만 성장세 장담할 수 없어
동아시아에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치던 지난 1997년 가을, 기아자동차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부도를 내면서 시장에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강경식 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말로 위기론을 일축했다. 외국인들이 우리 금융기관에 대출해준 자금을 쉼없이 회수하자 정부는 그해 말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고개를 숙였다. 펀더멘털이란 한 나라의 경제상태를 표현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성장률, 물가상승률, 실업률, 경상수지 등 주요 거시경제지표를 뜻한다. 그러나 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면서부터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는 표현은 자신이 무능한 관료, 혹은 무능한 분석가임을 드러내는 말처럼 돼버렸다.
이번엔 ‘펀더멘탈’을 믿어도 좋은가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린 지 5년이 지난 지금, 시장에는 또다시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주가는 추세선을 벗어나 떨어졌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경제지표들은 나빠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적 디플레이션, 즉 공황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상황도 그때와 얼추 비슷하다. 97년과 차이가 있다면 최근의 위기감은 국내요인보다는 해외요인을 일차적인 요인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역의존도가 70%를 넘고, 석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며,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비중이 35%에 이르는 우리 경제에 해외요인은 거의 절대적이다. 비록 최근의 불안심리가 정교한 논리를 갖춘 ‘위기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때도 펀더멘털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번에는 정말 펀더멘털을 믿어도 좋은가 최근의 경제지표로 보면 우리 경제는 지난해 8월께 저점을 지나 회복국면에 있다. 생산과 소비는 증가세가 이어지고, 재고는 줄고 있다. 수출도 완만하지만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 1분기 5.8%, 2분기 6.3%에 이어 3·4분기에도 6%대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경기선행지수와 동행지수는 지난 6월부터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7월 이후에는 구성지표들 중 오른 것과 내린 것을 보면 증가한 지표가 더 많다. 그러나 각 지표의 밑바탕에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적잖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의 경기회복을 이끈 것은 소비의 증가였다. 지난해부터 소비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웃돌고 있다. 도소매 판매는 올해 1분기에 전년동기대비 8%, 2분기에 6.4% 증가했고, 7~8월 중에도 6.3% 증가했다. 소비를 끌어올린 동력은 저금리와 가계대출 증가, 지난해 2차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특별소비세 감면, 임금 상승 등이라고 재정경제부는 분석한다. 하지만 소비증가세의 둔화와 함께 소비심리는 위축되고 있다. 지난 9월의 소비자평가지수는 기준치 100 이하로 떨어진 97.2, 기대지수는 기준치를 조금 넘는 103.9에 그쳤다. “내년 경제 성장도 불투명”
내수 소비의 정체 또는 둔화를 수출이 만회해주기만 한다면 문제는 없다. 과거 경기회복기의 경험으로 보면 경기의 본격적인 회복과 호황에는 수출 증가가 큰 구실을 했다. 올 들어 해외 경제에 대한 불안감과는 달리 수출은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수출액이 가장 많았던 달은 2000년 6월로, 152억달러였다. 그 뒤 지난() 2월에는 110억달러까지 떨어졌지만 9월 수출액은 140억달러(잠정치)다. 이는 올 들어 가장 많았던 지난 **월 141.7억달러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6월 이후로만 보면 3개월 연속 늘어난 것이다. 또 9월의 조업일수 1일당 수출액은 올 들어 가장 많았다. 하지만 수출증가율은 지난해의 낮았던 수치 때문에 두 자릿수(9월 12.6%)를 기록하고 있을 뿐, 아직 본격적인 회복세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수출 증가의 상당부분을 대중국 수출이 차지하고, 우리나라 수출액의 20%를 차지하는 대미 수출은 회복 전망이 아직 불투명하다.
설비투자는 가장 회복이 더딘 부분이다. 설비투자는 지난해 4분기에 5.7%, 올해 1분기에 6.9% 증가했다. 이는 모두 과거 설비투자가 극도로 부진했던 데 따른 효과다. 2분기에는 0.2% 증가에 그쳤다. 올 들어 8월까지 평균가동률은 76.2%로 과거 경기회복기의 80% 안팎에 비해 아직 낮아, 기업들은 수요가 늘더라도 설비투자를 늘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으로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우려해 장기투자를 자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설비투자의 증가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내년 경제가 올해만큼 성장세를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0월17일 발표한 ‘3분기 경제동향’ 자료에서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잠재성장률 수준인 5.3%로 발표했다. 이는 국제통화기금(5.9%) 및 다른 민간 경제연구소들의 전망치보다 낮은 것이다. 이로 인해 실업률도 올해의 3.0%에서 3.2%로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상수지는 올해 상반기 35억달러 흑자에서 하반기에는 8억달러 흑자, 내년에는 연간 3억달러 흑자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디플레이션 올 수도 있다?
이런 전망치는 위기론과는 크게 거리가 멀다. 단지 경기 상승세가 조금 둔화되는 정도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대외여건의 불확실성을 모두 감안한 것은 아니다. “세계 경제가 올해 2% 성장에서 내년 3%대 성장을 한다. 반도체 가격은 하락세를 지속하지만 원유도입 단가는 내년에 안정을 회복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대외여건이 예상보다 나빠질 경우 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미국의 자산가격이 추가 하락하면서 경기회복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으며, 유럽연합과 일본의 내수가 취약한 가운데 미국 경제가 더욱 부진해질 경우 우리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위기론의 뿌리는 해외변수의 급격한 악화로 그동안 경기회복을 이끌어온 국내 소비가 급속히 위축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회복국면의 경기가 호황을 맛보기도 전에 급속히 냉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미 소비위축과 이로 인한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예금보험공사 금융분석부 이민환 전문위원은 지난 10월16일 ‘우리나라의 디플레이션 가능성과 금융기관에 대한 영향’이란 보고서에서 “미국의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의 지속) 징후와 유럽 국가들의 소비지출 위축 현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도 디플레이션 압력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현재 상태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더 걱정스런 상황이다. 3분기까지 2%대를 유지하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4분기부터 3%대 후반으로 치솟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인플레를 우려한다면 소비열기를 식혀야 한다. 그런데 정반대로 소비가 급격히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왜인가
소비자여, 그래도 위기의식을 가져라
이민환 전문위원은 “그동안 소비증가는 저금리로 이자비용이 줄어들면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집을 사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집값이 오르면서 부의 효과가 발생한 데 힘입었다. 또 정부의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에 따라 신용카드를 이용한 차입증가, 은행의 개인대출 확대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런 상황에서 가계대출 연체율이 점차 높아져 금융기관들이 여신관리를 강화하고 있어 소비지출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콜금리를 소폭 인상하는 정도의 신호는 시장에 보내야 하지만, 금리를 많이 올리는 것은 아주 위험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적의 대비책은 무엇인가
한국개발연구원이 정부에 권고한 정책방향은 한국 경제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한국개발연구원은 “해외여건의 악화 여부에 맞춰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부정적인 충격이 가시화되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적 위험요인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내부 위험요인을 축소시키는 정책방향이란 가계대출 증가속도의 억제, 다소 보수적인 통화정책, 그리고 재산세 과세표준 가격을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시장가격으로 현실화하는 것 등이다. 그동안 경기부양을 위해 시작하고, 해외여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방치해온 것들이 지금은 이러기도 저러기도 어려워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외부여건이 나빠질 경우 ‘탄력적인 대응’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대답은 막연하고, 그것은 불안을 부른다.
물론 해외여건은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해외 경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도 낙관론과 비관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결코 비관론에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정부는 훗날 현실화될지도 모를 해외여건 악화에 대비해 경제주체들, 특히 돈을 빌려 소비를 늘리고 집을 사고 있는 가계가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가져주기를 지금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 한국 경제도 위기를 맞았다. 한국 경제는 수출증가세가 얼마나 유지되느냐에 따라 갈길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김봉규)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린 지 5년이 지난 지금, 시장에는 또다시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주가는 추세선을 벗어나 떨어졌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경제지표들은 나빠지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적 디플레이션, 즉 공황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상황도 그때와 얼추 비슷하다. 97년과 차이가 있다면 최근의 위기감은 국내요인보다는 해외요인을 일차적인 요인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역의존도가 70%를 넘고, 석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며, 외국인의 상장주식 보유비중이 35%에 이르는 우리 경제에 해외요인은 거의 절대적이다. 비록 최근의 불안심리가 정교한 논리를 갖춘 ‘위기론’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때도 펀더멘털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은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번에는 정말 펀더멘털을 믿어도 좋은가 최근의 경제지표로 보면 우리 경제는 지난해 8월께 저점을 지나 회복국면에 있다. 생산과 소비는 증가세가 이어지고, 재고는 줄고 있다. 수출도 완만하지만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 1분기 5.8%, 2분기 6.3%에 이어 3·4분기에도 6%대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경기선행지수와 동행지수는 지난 6월부터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7월 이후에는 구성지표들 중 오른 것과 내린 것을 보면 증가한 지표가 더 많다. 그러나 각 지표의 밑바탕에는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적잖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의 경기회복을 이끈 것은 소비의 증가였다. 지난해부터 소비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웃돌고 있다. 도소매 판매는 올해 1분기에 전년동기대비 8%, 2분기에 6.4% 증가했고, 7~8월 중에도 6.3% 증가했다. 소비를 끌어올린 동력은 저금리와 가계대출 증가, 지난해 2차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특별소비세 감면, 임금 상승 등이라고 재정경제부는 분석한다. 하지만 소비증가세의 둔화와 함께 소비심리는 위축되고 있다. 지난 9월의 소비자평가지수는 기준치 100 이하로 떨어진 97.2, 기대지수는 기준치를 조금 넘는 103.9에 그쳤다. “내년 경제 성장도 불투명”

사진/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 유가가 급등하면서 한국 경제가 또 한번 휘청거릴 전망이다. 사진은 LG정유의 원유가공시설. (한겨레)

사진/ 가계대출 증가는 이미 위험 수위에 왔다. 저금리로 야기된 부동산 가격의 거품이 걷히면 빚을 내 집을 산 사람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