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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푼돈에 거는 대만 서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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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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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악화되자 로토복권에 희망과 위안 얻어… ‘맞추는 재미’로 복권시장 평정

사진/ 온 가족이 함께 로토복권을 사러 나온 대만 사람들. (정남기 기자)
대만 국경절(건국기념일)인 10월10일 수도 타이베이. 최근의 경제위기를 반영하듯 경축일임에도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축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군데군데 나붙어 있었지만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탓인지 거리에는 인적마저 드물게 느껴졌다.

이처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모여드는 곳은 복권판매대였다. 올해 초부터 도입된 전자식 로토복권이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마작 즐기는 대만인 취향과도 맞아


로토복권 추첨일인 11일(금요일)에는 복권판매대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특히 7시30분 추첨행사를 바로 앞두고는 10여명의 사람들이 판매대 앞에 죽 늘어서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타이베이 통산대로의 복권판매업자 리승훼이(53)는 “로토복권의 인기가 높아 한달에 300만달러(1억2천만원·이하 대만달러) 정도를 판다. 한번에 100∼200장을 구입하는 고객도 있다”고 말했다.

대만에서 로토복권이 이처럼 인기를 끄는 것은 도박을 좋아하는 중국인 특유의 성격에다 로토복권의 독특한 재미가 가미됐기 때문이다. 대만인들은 가족 모임이 있으면 예외 없이 마작을 즐기곤 한다. 한번 시작하면 게임이 1∼2일 계속되는 것은 보통이다. 그들에게 복권은 그야말로 부담 없이 즐기는 가벼운 게임으로 인식되는 실정이다.

여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로토복권의 도입이었다. 기존의 종이복권과 달리 1~42()의 숫자 가운데 6개 숫자를 자기가 마음대로 선택해 복권을 구입하는 로토복권이 대만인들의 취향에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시민들은 로토복권을 구입하면서 자주 당첨되는 번호를 선택해 입력하거나 자기의 생년월일 등 특수한 번호,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번호를 입력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가족들이 나들이 삼아 복권을 구입하러 가는 경우도 많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타이베이 후옌제 거리의 복권판매소에 나온 뤼메이리(40) 자매는 “숫자를 맞춰보는 재미 때문에 가족끼리 자주 복권을 사러 나온다”며 “1주일에 500달러(2만원)가량을 복권 구입에 쓴다”고 말했다.

사진/ 로토복권 추첨식을 진행하고 있는 중텐 케이블 텔레비전의 방송 장면.
로토복권이 인기를 끄는 것은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로토복권의 인기는 대만 경제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대만은 2001년 미국 경제가 침체 국면에 빠져들면서 심각한 경제위기에 맞닥뜨렸다. 경제성장률 -2.18%, 수출 -17.2% 등의 지표가 보여주듯이 2001년 대만은 최악의 경제난을 경험했다. 실업률도 2000년 2.99%에서 2001년 4.57%, 2002년 3월 5.16% 등 악화일로에 있다. 부동산값도 폭락했다. 은행 돈을 빌려 집을 산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쪽박을 찰 위기에 몰렸다.

이처럼 국민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상대적으로 복권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렇듯 복권이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희망을 걸어보는 수단이다. 푼돈으로 대박의 꿈을 걸어보는 가장 서민적인 사행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베이에서 만난 자영업자 장원민(40)은 “대만인들의 생활이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렵다. 그래도 복권 한장 갖고 있으면 며칠 동안은 기대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 그마나 복권 때문에 희망과 위안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대만 로토복권은 이렇게 해서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복권시장을 평정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7일까지 복권 판매액 818억5천만달러 가운데 623억9천만달러(76.2%)를 로토복권이 차지했다. 현장에서 긁어서 확인하는 즉석식 복권은 189억달러(23%), 기존의 전통 추첨식 복권은 5억6천만달러(0.7%)에 불과했다.

복권에 목을 매는 부작용도

기존 종이복권이 3~4주 기다려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데다 정해진 숫자의 복권을 사야 하지만 로토복권은 추첨식 바로 전까지도 구매가 가능하고 원하는 번호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상금이 정해져 있지 않고 판매액에 따라 늘어나기 때문에 고액 당첨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다.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때는 다음회로 이월돼 당첨금이 훨씬 많아진다.

대만에서는 지난 2월12일 시행된 10회차 추첨식에서 한 사람이 3억3500만달러(120억원)의 당첨금을 타는 행운이 있었다. 물론 1등 당첨금이 이보다 많았던 때도 있었지만 여러 명이 동시 당첨됐기 때문에 1인당 당첨금 최고 액수는 아직까지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월8일 9회차 때는 12명이 4370만달러(16억원)의 상금을 탔다. 모두 합하면 5억2400만달러(209억원) 규모다.

당첨금이 많다 보니 복권에 목을 매는 부작용도 나온다. 몇몇 사람은 한번에 수십만원씩 들여 갖가지 경우의 수를 모두 사들이는 방식으로 로토복권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1주일에 1만원 안팎의 돈을 쓴다. 당첨되면 좋고, 당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만 언론들도 로토복권 열풍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낳고 있는 마작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대만인들은 그나마 저렴한 비용으로 복권을 구입함으로써 나름대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다.

타이베이(대만)=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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