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인상 둘러싸고 전윤철 재경부 장관과 박승 한은 총재가 펼치는 자존심 대결
한국 경제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DJ 정부 들어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는 금융감독위원장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다. 재정경제부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부처임에도 당시 금융감독위원회는 기업 및 금융기관 구조조정과 공적자금 투입 등 모든 경제개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헌재 위원장 시절에는 금감위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정반대 의견 밝혀
그렇다면 현재는? 구조조정이 일단락되고 DJ 정권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경제정책의 무게 중심은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쏠려 있다. 그는 DJ 정부의 마지막 경제 수장으로서 현정권이 벌여놓은 각종 경제 현안을 마무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공적자금의 관리와 회수는 물론이고, 서울은행·대한생명·현대투신 등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의 정리 등 주요 경제 현안을 거의 떠맡고 있다. 그뿐 아니다. 세계 경제의 침체와 함께 또다시 가라앉으려는 경기를 밑에서 떠받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정책 수단을 가진 사람은 박승 한국은행 총재다. 금융통화위원회를 통해 시중금리 수준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금리조정이야말로 어떤 정책수단보다 경제 전반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특히 지금은 과잉 유동성 문제가 논란을 빚는 시점이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금융시장에 끼치는 영향만 고려하면 전 부총리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서도 DJ 정부 들어 한은 총재의 위상이 지금만큼 중요한 때는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전윤철 부총리와 박승 한은 총재. 한국의 거시경제를 이끄는 두축인 이들이 최근 들어 금리인상 여부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 4.25%인 콜금리(은행 간 초단기 금리)를 놓고 전 부총리의 금리인상 불가론과 박 총재의 금리인상 불가피론이 팽팽히 맞선 것이다. 콜금리는 한국은행이 시중금리 수준을 조절하기 위해 정책금리로 사용하는 것으로 콜금리 수준에 따라 시중금리가 연동해 움직인다. 사실 금리인상을 둘러싼 두 사람의 의견 대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 4월, 두 사람이 각각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해 7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두 사람은 특히 어느 누구보다 자기 주장과 소신이 뚜렷한 사람들이어서 주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9월 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7차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에 함께 참석해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했다. 박 총재는 “시중에 과잉 유동성이 있으며, 물가 불안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금리의 절대 수준이 너무 낮다. 부동산값 급등에 대처하기 위해 금리를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 등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고려해야겠지만 금리인상의 필요성은 충분하다는 논리다.
반면 전 부총리는 “시중 유동성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다 여부를 당장 파악하기는 힘들다. 정확한 잠재 성장률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잉 유동성의 정도를 따지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 경제의 불투명성을 고려할 때 내수를 진정시키는 정책(금리인상)은 현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차이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정반대의 논지를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같은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상대 주장을 반박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것이다.
거침없이 직설적인 캐릭터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직설적이고 자기 주장을 펴는 데 거침이 없다. 전 부총리는 별명이 ‘핏대’라고 알려질 정도로 적극적이다. 모든 일을 원칙에 입각해 시행하기 때문에 원칙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3월 발전노조 파업이다. 당시 전 부총리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이번만은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며 강력한 대처를 주장해 사실상 노조쪽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물론 공정거래위원장 시절에도 그는 재벌기업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해왔다.
박 총재는 지난 4월 취임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재경부를 자극하는 발언을 해왔다. 한은 독립성 문제부터 시작해 금리인상에 대한 필요성,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거침없이 자기 소신을 털어놨다. 금리정책에 대해서도 “모호한 발언으로 시장을 혼란시키기보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한때 한은 총재의 입이 가벼운 것 아니냐는 문제까지 제기됐다.
금리를 둘러싼 최근 전 부총리와 박 총재의 논쟁은 단순히 개인의 소신이나 캐릭터의 차이에서만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재경부와 한은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하다. 전 부총리는 과거 경제기획원 출신의 정통 경제관료다. 박 총재는 한국은행에서 시작해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전형적인 한은맨이다. 체질적으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박 총재는 DJ 정부 들어 실추된 한은의 위상을 높이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임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현정부 들어 상실한 금융기관 검사권을 10월 초 금감위와의 합의로 부분적으로 부활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일하는 태도 때문에 한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금리조정에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어 금융시장에서 한은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사실 DJ 정부 들어 한은의 위상은 크게 약화됐다. 재정경제원이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한국은행이 한은과 금감위로 나뉘었지만 재경부와 한은의 위상은 정반대였다. 재경부는 초기에 약간 위축되는 듯하더니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되면서 기획예산처와 금감위 등 주요 부처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금감위를 비롯한 주요 기관의 요직을 재경부 인사들이 차지했으며, 산하 금융기관장들도 대부분 재경부 출신이 독식했다. 반면 한국은행은 독립성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금융기관 감독권을 상실한 뒤 힘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시중은행들이 한국은행의 자료협조 요청에 응하지조차 않는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한은 행보에 심기 불편한 재경부
그러나 DJ 정부의 구조조정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시장 경제의 흐름이 중요하게 부각됐으며, 이에 따라 한은의 위상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감독·규제권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점점 잃어가는 반면 금리조정이란 수단은 갈수록 그 힘이 커져가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는 박 총재가 지휘봉을 잡으면서 한은은 어느 때보다 독립성과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것이다.
물론 금융시장에서는 한은이 재경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리인상을 단행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박 총재는 취임 한달 뒤인 지난 5월 재경부 반대 속에 정책금리인 콜금리를 한 차례 인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보다 경제 여건이 더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경제는 거의 2중침체(더블딥)의 늪에 빠져드는 분위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박 총재도 금리인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정작 금리인상을 단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한은의 움직임이 재경부에게는 적지 않게 거슬리는 것이 사실이다. 수십해 동안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해온 재경부는 이제 한은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재경부 고위 관계자들이 “콜금리 인상 여부는 금통위의 고유 권한”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은의 금리인상 움직임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특히 박 총재의 거침없고 개성 있는 행보는 경기회복에 역점을 둔 전 부총리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사진/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사진/ 박승 한국은행 총재.

사진/ 금융위기가 콜금리를 인상할 수 있을까? 박승 한은 총재(왼쪽)가 금통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