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기술주는 신기루였나

429
등록 : 2002-10-09 00:00 수정 :

크게 작게

독일·일본 첨단기술주 시장 몰락의 길 걸어… 코스닥도 남의 일 아닐 듯

독일인들은 돈에 관한 한 완고하고 신중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독일인들도 90년대 후반 전 세계를 휩쓴 첨단기술주 열풍에서 비껴나지는 못했다. 독일 증권거래소가 1997년 미국의 나스닥시장을 본뜬 ‘노이어 마르크트’(신시장)를 프랑크푸르트에 개설하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자자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노이어 마르크트는 곧 유럽 최대의 첨단기술주 시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2002년 10월 초, 독일인들도 허공 속에 사라진 자신들의 돈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다.

독일, 회계부정 터지면서 추락

사진/ 나스닥인터내셔널 회장 존 힐리(왼쪽)가 나스닥재팬 대표 요시로 가추야와 도쿄의 한 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스닥재팬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SYGMA)
독일 증권거래소인 도이체 뵈르제는 9월26일 노이어 마르크트를 내년 말까지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나스닥재팬과 스위스의 뉴마켓이 지난 8월 폐쇄를 결정한 데 이어 독일마저 노이어 마르크트의 문을 닫는다고 발표하자 한국의 코스닥시장 등 다른 기술주 시장들도 비슷한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첨단기술주 시장의 잇단 몰락은 ‘신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계 경제에 도래했다는 믿음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동시에 2000년 초 나스닥 붕괴 이후 첨단기술주 거품이 꺼지는 과정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해주었다.


노이어 마르크트는 설립 당시만 해도 은행대출 위주의 자금조달 방식에 익숙하던 독일 경제에 주식시장을 통한 직접 금융시장을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출범했다. 통신업체 모빌콤을 비롯해 수많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3년 만에 상장회사가 350개로 급증했다. 상장 하루 만에 주가가 2배로 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2000년 3월 시장 전체의 시가총액은 2342억유로(약 280조원)에 이르렀다.

이런 성공신화는 첨단기술주의 거품이 빠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상장회사들의 회계부정이 잇따라 터지면서 시장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갔다. 가장 대표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업체는 자동차 내비게이션 개발업체인 콘로드다. 99년에 상장된 이 회사는 2001년 매출액의 98%가 가짜 매출전표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상당수 상장기업들의 주식이 휴짓조각으로 변하면서 노이어 마르크트의 네막스50지수는 2년 반 만에 고점에서 95%가 빠졌다.

부정 스캔들이 늘면서 노이어 마르크트에 상장되는 것 자체가 기업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로 2000년 135건에 이르던 기업공개(IPO)가 2001년에는 11건, 올해는 1건에 그쳤다. 오히려 대부분의 상장회사들이 노이어 마르크트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노이어 마르크트에 상장된 생명공학 회사인 키아겐의 솔베이 멜러 이사는 <월스트리트저널> 유럽판과의 인터뷰에서 “주가가 2000년 7월 이후 92%나 떨어져 인수·합병도 어려워지고 스톡옵션을 통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는 것도 힘들어졌다”며 “주가가 빵값보다 낮아지면 상장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회사도 철수를 공표한 회사 중 하나다.

일본의 나스닥재팬도 상황은 비슷했다. 나스닥재팬은 지난 2000년 6월 일본 정보통신업계의 신화적 존재로 군림하던 재일동포 2세 사업가 손정의(손 마사요시)씨가 이끄는 소프트뱅크와 미국의 나스닥이 공동으로 출자해 설립됐다. 우수한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에서 상장까지 책임지겠다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의 야심찬 계획과 전 세계에 24시간 주식거래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나스닥의 야망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첨단기술주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나스닥재팬은 결실도 맺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다. 애초 목표는 2001년 말까지 850개 회사를 상장시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상장회사는 100개 남짓에 그쳤다. 미국 나스닥은 10월15일 공식적으로 나스닥재팬에서 손을 뗄 예정이다.

손 사장은 지난 8월 기자회견에서 나스닥재팬의 상장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그는 “앞으로는 본업에만 충실하겠다”며 증시 운영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나스닥재팬의 몰락과 함께 손 사장도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소프트뱅크는 과거의 공격적 팽창 정책에서 ‘야후BB’를 중심으로 한 광대역통신서비스 사업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러나 현재 늘어나는 부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의씨 나스닥재팬에서 손 떼기로

사진/ 미국 나스닥시장의 한 중개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나스닥지수를 보고 있다. 첨단기술주 시장의 붕괴는 신경제의 몰락을 보여준다. (GAMMA)
해외 첨단기술주 시장이 잇따라 문을 닫기로 하자 코스닥시장도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코스닥종합지수는 10월4일 현재 48.02로 2000년 3월10일 고점(283.44)에서 83%나 빠졌다. 코스닥시장은 현재 정보기술 경기부진, 수급악화, 시장 신뢰성 추락 등의 3대 악재로 투자자들의 투자심리가 냉각돼 극도의 침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독일 노이어 마르크트와 마찬가지로 대주주 및 경영진들의 불공정 거래로 시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 코스닥시장에 등록된 기업은 모두 832개다. 독일·일본에 견줘 상당히 많은 규모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코스닥시장에 진입하려는 기업보다 어떻게 하면 코스닥시장에서 철수해 거래소시장으로 옮길까를 고민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올 들어 한국콜마·우신시스템·신세계건설·교보증권·세종공업 등이 코스닥시장을 떠나 거래소로 옮겼다. 이들 기업들은 코스닥기업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올해 들어 등록이 취소됐거나 등록 취소가 예정된 코스닥기업도 16개에 이른다. 또 등록예비심사를 통과했지만 악화된 시장상황 때문에 공모주 청약을 미루는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코스닥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코스닥증권시장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10월1일 노이어 마르크트와 코스닥시장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코스닥증권시장은 “노이어 마르크트는 △독일증권거래소에 종속된 소속부의 하나로 독립성이 없었으며 △지수가 최고수준 대비 96% 감소했으며 △올해 신규 상장기업 수 1개 등 시장규모 위축이 극심했다”며 “그러나 코스닥은 증권거래소와 별개의 주식시장으로 존재하고 2001년 144개, 올해 95개사가 신규 진입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코스닥증권시장은 노이어 마르크트의 가장 큰 쇠퇴원인이 ‘불투명성’인 만큼 시장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코스닥증권시장의 이런 설명에도 코스닥시장이 노이어 마르크트와 특별히 다르다는 데 공감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노이어 마르크트를 비롯한 첨단기술주 시장들은 나름대로 기여한 점도 적지 않다. 분기보고서는커녕 반기보고서마저도 제대로 내지 않았던 독일 기업들한테 주주와의 의사소통을 늘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또 대기업 이외에는 상장을 꿈꾸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중소기업도 상장을 할 수 있게 됐다. 또 금융시장이 은행 중심의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으로 변하게 하는 촉매 구실을 했다.

90년대 후반 신경제 신화는 허구

그러나 첨단기술주 시장이 남긴 상흔은 적지 않게 깊다. 첨단기술주 시장의 등장과 몰락은 투자자, 기업 등 개별 경제주체들에게 많은 손실을 안겨줬다. 그리고 월드컴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가는 경영자로 하여금 중장기적인 기업 성장보다는 단기적인 성장에 매몰되게 했다. 경영자들은 급기야 회계부정을 통해 주가를 부양하려는 데까지 나아갔다. 미국의 전설적 투자가 워런 버핏은 “누가 벌거벗은 채 수영을 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때는 바로 밀물이 빠져나갈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첨단기술주 시장의 잇단 붕괴는 버핏이 말했던 때가 지금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주식시장의 ‘비이성적 과잉’과 경영자들의 ‘전염성 탐욕’은 투자자들과 기업들의 손에 부채만 잔뜩 남겨놓은 형국이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90년대 후반의 이른바 ‘신경제’는 정보기술의 발전 덕분에 호황과 침체가 반복된다는 경기사이클마저도 없앨 것으로 얘기됐지만 이는 허구였다”며 “과잉 설비와 과다 부채가 해소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앞으로 미국·일본·독일 등 주요 국가들의 경제는 몇년간 침체를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잡지는 “미국·영국 등 주요 국가들이 모두 저금리를 통해 부동산 가격을 부양함으로써 주가하락에 따른 자산손실분을 만회하려 하고 있다”며 “그러나 소비자들은 언제까지 빚을 계속 늘릴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최근 “선진국들의 경제는 공통적으로 물가상승률이 낮고 2년째 저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데다 증시가 침체하고 가계 채무가 증가하는 점에서 지난 90년대 초반 일본의 거품경제 절정기와 유사하다”며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현 기자/ 한겨레 경제부 hyun21@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