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계·정치권, 10만원권 발행론 재점화… 비용 절감 매력에도 검은돈 거래 우려
100조. 동그라미가 무려 14개다. 역사상 가장 단위가 큰 돈이 1924년 독일에서 발행한 ‘100조’마르크짜리 지폐였다고 한다. 헤아리는 데만도 한참 걸렸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발행화폐의 액면가를 계속 높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고액권 화폐는 조금 과장하면 ‘수레 가득 지폐를 싣고 가야 감자 한 봉지를 살 수 있었던’ 초인플레이션 시대의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의 극심한 물가급등은 독일 중산층의 재산을 ‘체계적으로 몰수’했다.
한국은행, 시기상조에서 검토로 선회
고액권 화폐는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것을 떠오르게 한다. 사과상자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과상자 가득 담은 1만원권 지폐뭉치. 그것은 부패의 상징이다. 고액권이 발행되면, 검은돈의 거래는 더 쉬워질 것 아니냐고 사람들은 먼저 생각한다. 10만원짜리 지폐가 발행되면 1억원을 건네기 위해 커다란 007가방을 사람 눈에 띄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1천만원쯤은 편지봉투에 넣어 뒷주머니에 살짝 찔러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 73년 1만원짜리 ‘세종대왕’이 등장한 이후 지금껏 그 이상의 고액권 발행은 늘 “시기상조”였다. 특히 국회의원들이 고액권 발행론을 펼 때 국민의 거부감은 더욱 커졌다.
대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경제계가 고액권 발행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경제규모에 맞게 5만원권, 10만원권을 새로 발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동안 고액권 발행론은 번번이 일축됐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자유기업원이 발행 필요성을 거들고 나섰고, 한국은행의 반응도 완고한 태도에서 벗어나 ‘검토’쪽으로 기울었다. 대한상공회의소 주장에 따르면, 여론의 80%가량이 고액권 발행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고액권 지폐 발행론은 주기적으로 제기돼왔다. 현 정부 출범 초기인 98년 10월에도 국회의원들이 “부유층의 소비촉진을 통한 경기진작”을 명분으로 고액권 발행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공청회를 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액권 발행은 검은돈의 유통을 촉진하고,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지난해 1월에도 대한상공회의소는 ‘고액권 화폐 발행에 대한 업계의견’이란 건의서를 청와대와 재정경제부에 내고, 자기앞 수표 발행비용의 절감 등을 위해서도 고액권 화폐의 조속한 발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또다시 무산됐다. 그러나 올해 새로 취임한 박승 한은총재는 지난 6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기 전에 고액권 발행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있다”며 긍정적 검토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한은에 고액권 발행에 따른 장단점을 연구할 별도의 팀을 구성하도록 지시한 상태다. 재계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고액권 발행을 요구하는 것을 나라 경제에 대한 순수한 충정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검열에 잘 걸리지 않는 돈의 유통공간을 확대하자는 데 속셈이 있어 보인다. 상공인들은 거래에 따른 자금추적을 최대한 피하는 쪽에, 정치권은 검은돈의 유통을 좀더 편리하게 하자는 쪽에 관심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고액권 화폐 발행이 소비를 진작하거나 인플레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결코 검증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향을 끼치더라도 그 정도가 아주 작다는 것이다. 고액권 화폐의 발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핵심근거는 수표유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교환된 자기앞수표는 11억장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85%가 10만원권으로 나타났다. 올해도 자기앞수표는 11억∼12억장 정도가 발행될 것으로 은행연합회는 추산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철성 결제관리팀장은 “80년대부터 자기앞수표의 유통이 계속 늘었다”고 말했다. 73년 1만원권이 만들어진 뒤 경제규모가 커진 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활성화하면서 자기앞수표의 발행은 최근 2∼3년 동안 증가율이 크게 둔화됐다. 그러나 10만원권 자기앞수표는 이미 결제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서 발행이 줄지 않고 있다. 수표 관리비용 연간 1조원
현금자동지급기에서도 인출할 수 있어 현금과 비슷하게 쓰이는 자기앞수표가 은행에 들어오면 5년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보관한다. 따라서 자기앞수표의 장점은 거쳐간 손이 드러난다는 데 있다. 검은돈의 거래는 대부분 수표추적을 통해 적발된다. 하지만 자기앞수표 사용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결코 만만치 않다.
10만원권 수표의 용짓값은 장당 24.5원이다. 이에 비해 1만원권 지폐는 70원가량이다. 그러나 수표의 수명은 평균 7일에 지나지 않고, 1만원권 지폐는 4년가량이나 된다. 두 가지 모두 수명을 1년으로 환산하면, 자기앞수표의 용짓값은 1274원, 1만원권은 18원가량이다. 70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앞수표의 용짓값은 연간 300억원가량이기 때문에 종잇값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큰 비용은 자기앞수표의 발행과 추심, 보관 등에 따른 비용이다. 은행들은 이 때문에 발급수수료로 고객에게 건당 50∼100원, 다른 은행이 발행한 수표를 입금하면 추심료로 건당 1천∼2천원을 받는다. 연간 교환되는 자기앞수표의 85%가 10만원권 수표이므로, 10만원권 자기앞수표 활용에 따른 사회의 총비용은 대략 1조원에 이른다는 얘기다.
이런 사회적 비용은 은행과 수표 이용자들이 분담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수표 발행이나 추심에 따른 수수료는 관리원가보다 낮다. 또 우수고객에게는 발행 수수료를 면제해주기 때문에, 총수수료 수입이 수표 관리비 원가의 절반을 넘는 은행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수료를 원가대로 받다 보면 고객들이 다른 은행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고객에게 비용을 모두 전가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은행은 다른 수수료나 대출이자에서 자기앞수표 관리에 따른 부담을 고객에게 일부 전가하고 있다.
최고액권이 1만원인 것은 그동안 경제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유기업원 이형만 부원장은 지난 9월22일 자유기업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 따르면, 주요국의 최고액권을 달러로 환산했을 때 일본은 81.9달러(1만엔), 영국 77.2달러(50파운드), 유로는 486달러(500유로) 등이다. 미국은 100달러짜리가 최고액권이고, 우리나라의 1만원은 8.2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73년 1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뒤 물가수준이 20배, 국내총생산이 22배 늘었지만 화폐단위는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검은돈 차단할 방법을 먼저 말하라
10만원권 자기앞수표롤 고액권 지폐로 대체하면 자기앞수표 이용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을까? 고액권 발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자금흐름이 추적되는 수표 대신 화폐로 10만원권이 유통되면 검은돈의 흐름은 그만큼 쉬워진다.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뇌물수수 등으로 인해 정치권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결정을 하면 손실은 몇조원에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고액권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추가로 생길 수 있는 사회적 비용의 규모를 정확히 추정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경제학)는 “정치인이나 상공인들이 고액권 발행을 바라는 것을 자기앞수표 발행 및 유통에 따른 비용 부담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기앞수표로 인한 비용이 1조원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고액권을 발행해야 한다는 딱 떨어지는 근거는 못 된다. 고액권을 발행하든 지금처럼 수표를 쓰든 사회적 득실에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는 마약거래상 등 음성적 거래자만 사용한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액권 발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고액권 발행 뒤 검은돈의 거래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10만원권 수표는 사라질 것인가. 고액권 발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표 유통 과정의 사회적 비용문제를 지적한다. (이용호 기자)
대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경제계가 고액권 발행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경제규모에 맞게 5만원권, 10만원권을 새로 발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동안 고액권 발행론은 번번이 일축됐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자유기업원이 발행 필요성을 거들고 나섰고, 한국은행의 반응도 완고한 태도에서 벗어나 ‘검토’쪽으로 기울었다. 대한상공회의소 주장에 따르면, 여론의 80%가량이 고액권 발행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고액권 지폐 발행론은 주기적으로 제기돼왔다. 현 정부 출범 초기인 98년 10월에도 국회의원들이 “부유층의 소비촉진을 통한 경기진작”을 명분으로 고액권 발행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공청회를 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액권 발행은 검은돈의 유통을 촉진하고,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여론에 밀려 무산됐다. 지난해 1월에도 대한상공회의소는 ‘고액권 화폐 발행에 대한 업계의견’이란 건의서를 청와대와 재정경제부에 내고, 자기앞 수표 발행비용의 절감 등을 위해서도 고액권 화폐의 조속한 발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또다시 무산됐다. 그러나 올해 새로 취임한 박승 한은총재는 지난 6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기 전에 고액권 발행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있다”며 긍정적 검토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한은에 고액권 발행에 따른 장단점을 연구할 별도의 팀을 구성하도록 지시한 상태다. 재계와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고액권 발행을 요구하는 것을 나라 경제에 대한 순수한 충정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검열에 잘 걸리지 않는 돈의 유통공간을 확대하자는 데 속셈이 있어 보인다. 상공인들은 거래에 따른 자금추적을 최대한 피하는 쪽에, 정치권은 검은돈의 유통을 좀더 편리하게 하자는 쪽에 관심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고액권 화폐 발행이 소비를 진작하거나 인플레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결코 검증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향을 끼치더라도 그 정도가 아주 작다는 것이다. 고액권 화폐의 발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핵심근거는 수표유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교환된 자기앞수표는 11억장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85%가 10만원권으로 나타났다. 올해도 자기앞수표는 11억∼12억장 정도가 발행될 것으로 은행연합회는 추산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철성 결제관리팀장은 “80년대부터 자기앞수표의 유통이 계속 늘었다”고 말했다. 73년 1만원권이 만들어진 뒤 경제규모가 커진 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활성화하면서 자기앞수표의 발행은 최근 2∼3년 동안 증가율이 크게 둔화됐다. 그러나 10만원권 자기앞수표는 이미 결제수단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서 발행이 줄지 않고 있다. 수표 관리비용 연간 1조원

사진/ 검은돈 거래를 위해 사과상자에 가득 담겨진 1만원권 지폐. 사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과정에서 찾아낸 사과상자 안의 현급들. (한겨레)

사진/ 수표는 검은돈 거래 실태를 추적하는 데 유효하게 쓰이기도 한다. 자동인출기에서 수표를 인출하는 모습.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