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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벼가 익는다, 절망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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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9-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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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문제 해법은 없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2002년 우리 농촌의 을씨년스런 풍경

사진/ 농민들은 벼농사는 아직 지을 만하다고 말한다. 만약 벼농사마저 흔들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묻히는 게 제일이다(生居鎭川 死去龍仁).”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던 시절, 충북 진천이 매우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실제로 진천의 땅은 거름지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적어 소출이 다른 지역보다 좋은 데서 이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지난 9월 초 불어닥친 태풍 ‘루사’로 인한 피해는 진천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진천 사람들은 “우리 지역은 피해가 적은 편”이라며 ‘생거진천’이란 말을 다시 입에 올렸다. 태풍이 눈치를 보며 지나간 진천 땅에도 어김없이 한가위는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말꼬리를 올려 “추∼우∼석?”이라고 되묻고는 콧방귀를 뀌는 이들에게 가을은 결코 풍요의 계절이 아니다.

생산량 줄어도 값 내려가는 고추


진천읍에 5일장이 열린 지난 9월10일, 시장은 한산했다. 백곡천 둔치의 고추시장 상인들은 건조기에서 말린 검붉은 화건고추 한근에 3500∼4천원, 태양초는 4500∼5천원 안팎으로 값을 불렀다. 연초 근당 2500원이 안 되던 수준에서 많이 올랐다지만, 지난해 5천∼6천원대에 비하면 싼 것이라고 했다. 물론 농민들에게 사들이는 값은 이보다 쌀 것이다. “절대 싸다는 말은 하지 마슈.” 상인 유승걸(41·진천군 내수면)씨는 “농민들 걱정해준다고 고춧값 싸다고 하는 거, 농민들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도시에서 온 손님들이 “뉴스에서는 싸다던데 왜 이렇게 비싸게 파느냐고 타박한다”는 것이다.

지역사회개발학과 교수들이 우리나라 표준농촌으로 꼽은 진천군 초평면은 논이 70%, 밭이 30% 가량 돼보이는 지역이다. 그래선지 고추밭이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영구리 상영마을의 이우(73) 할머니는 이날 1단보(300평) 가까이 되는 밭에서 고춧대를 모두 뽑아내고 있었다. “아들이 아파 누워 있어 농약을 못 쳤더니 바람(태풍) 불고는 다 병들어버렸슈.” 할머니는 그 밭에서 200근가량을 거뒀다고 했다. 평년작이라면 500근 가까이 거둘 만도 한 넓이다.

사진/ 고춧대를 뽑아내는 농민. 수해로 생산량이 줄었는데도 외국산 고추 도입량이 많아 고춧값은 생산비 수준에도 못 미친다.
죽현리 이현준(64)씨 부부는 고추밭 한켠의 고춧대를 뽑아내고 알타리무와 갓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값도 안 나가고, 병도 들고…, 열 받아서 싹 뽑아버릴라고.” 가지가 무성한 고추밭은 가까이서 보니 이파리가 오그라드는 병에 잔뜩 걸려 있다. 그는 올해 고추농사를 2단보 지었다. 논농사야 기계힘을 빌린다지만, 손이 많이 가는 고추농사를 노부부가 그 이상 짓기는 무리다. 이씨는 “단보당 500근을 따고 고춧값이 한근에 4천원 하면 농약값·씨앗값 다 제하고 2단보에서 200만∼300만원 건진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심고 따고 말린 이씨 부부의 품삯과, 자기 땅이라 내지 않은 토지 임대료, 농사짓느라 미리 들어간 돈의 이자비용까지 모두 포함돼 있다. 올해는 태풍 때문에 고추밭 피해가 제법 큰데도 산지 고춧값이 지난해만 못해 고추농사는 더 별볼일 없게 됐다.

전국농민회 충북도연맹 김현호 조직부장은 “최근 몇해간 충청북도의 고추 생산량을 조사해보니 지난 99년 4만1834t에서 2000년 3만8462t, 지난해 3만5300t으로 계속 줄었고, 올해는 집중호우로 더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도 고춧값이 지난해보다 크게 떨어진 것은 외국산 고추 도입량이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농민회가 분석한 결과, 자가 노동력까지 계산한 건고추 한근의 생산비는 올해 4220원가량이다. 이런 가격대라면, 고추농사도 포기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얘기가 된다. 아니면 자기 품삯이 더 낮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남는 게 없어 시설 늘리면 빚 늘어나고

사진/ 진천읍 5일장에서 고추를 팔고 있는 상인. 수해에도 불구하고 고춧값은 지난해보다 떨어졌다.
일이 벅차서 그렇지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것은 담배농사다. 담배인삼공사가 계약 물량을 모두 수매하고, 수맷값도 미리 정해주기 때문이다. 영구리 하영마을의 박성래(54)씨는 올해 29단보의 담배농사를 지었다. 20년간 담배농사를 지었다는 그는 초기에는 7단보가량을 짓다 계속 농사를 늘렸다. 생활비는 자꾸 느는데, 적게 지어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재배면적을 자꾸 늘렸다. 그만큼 몸은 고되다. 그는 올해 담배농사로 생산비를 제하고 2천만원가량의 수입을 올릴 것 같다고 했다. “10년 전만 해도 15단보가량 담배농사 지으면 900평짜리 논 한필지를 샀지만 지금은 땅값이 올라 30단보를 지어도 못 사.”

담배농사도 앞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수맷값이 제자리걸음인데다 담배인삼공사가 수매량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올해 1단보에 245kg씩만 수매한다는데, 생산량이 그보다 많아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담배를 거둔 1만평 가까운 땅에 잡곡을 심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참깨 두말을 선풍기로 2번씩 부쳐서 장에 갖고 갔더니 비가 많이 왔는데 어떻게 그렇게 뽀얗냐고 하더라. 건조기에서 말린 것 아니냐는 얘기지. 열 받아서….”

시설채소에 기대를 건 젊은 귀농자들은 “귀농을 후회하지만, 이제 빚의 포로가 돼 떠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박진광(29·덕산면 신척리)씨는 지난 98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아래 회사가 부도나자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 농사를 돕다가 수박농사를 짓기로 하고 눌러앉았다. 그는 영농후계자로 선정돼 5천만원을 융자받고 돈을 더 보태 1600평의 땅을 사 비닐하우스 수박농사를 지었다. “장부상으로 보면 수지가 맞는다. 그런데, 이자 갚고 생활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시설을 더 늘리면 빚은 더 늘어나고, 이자에 허덕이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는 “농민들이 농사지어봤자 이자놀이 하는 농협과 농기계 회사, 농약·비료 회사만 돈을 벌 뿐”이라고 말했다.

4년 전 귀농한 같은 마을의 전종수(33)씨는 “올 봄 2천평의 비닐하우스 수박농사에서 2800만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융자금 이자와 기름값, 자잿값으로 1200만원이 들었다. 그게 올 농사로 건진 것 전부다”고 말했다. 가을 수박농사는 매출이 950만원에 지나지 않아 실제수입은 별볼일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 내려올 때 1200만원의 빚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6천만∼7천만원이나 된다. 올해 안 되면 내년에는 잘 되겠지 하면서 해마다 스스로를 속이고 산다”고 말했다. 그는 “수박이야 대량수입이 안 되겠지만, 한 가지 농산물만 수입이 늘어도 모든 농민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가격만 안정되면 뭐가 걱정이겠느냐?”고 말했다.

“관세화 전환하면 농업 망한다”

사진/ 농민단체들은 쌀의 관세화 전환 반대를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관세화를 위한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이다.
진천군농민회는 장날 오후 재래시장 앞 공터에서 확성기로 11월13일 열릴 예정인 전국농민대회를 홍보하고 있었다. 농민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역시 쌀 수입 확대였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최소시장접근물량을 정해 제한된 양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외국의 쌀 개방 요구에 대응해왔지만, 이제 새로운 협상이 시작된다. 농민회는 정부에서 흘러나오는 쌀의 ‘관세화 전환’ 반대를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관세화는 쌀의 수입물량 제한은 풀되, 높은 관세를 물려 수입쌀의 국내가격을 크게 높여 대응하자는 것이다. 정부 논리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해 거둔 세금으로 농업을 지원할 수 있다는 논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진천군농민회 신용범(33) 사무국장은 “그렇게 하면 우리 농업은 망한다”고 잘라 말했다. “일본은 관세화에 대비해 20년간 준비를 거쳐 관세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무런 준비가 없다. 농산물 관세를 없애는 쪽으로 몰고가는 미국과 정부의 협상태도를 보면, 처음에는 관세율이 높다고 해도 앞으로 급격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진천군 농가소득의 37%는 벼농사에서 나온다. 전국평균인 52%보다 낮지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경제이론으로 따지면 비싼 자기 논에 벼농사를 짓는 사람은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다. 진천군에서 200평(1마지기)의 벼농사를 지었을 때 손익계산서는 대략 이렇다.

매출=쌀 3.5가마×16만원=56만∼64만원

비용=1)논갈이+써래질=3만원

2)종잣값 모내기=3만원

3)콤바인 탈곡 및 건조비=5만원

4)농약·비료=4.5만원

계=15만5천원

수익=50만5천원

벼농사마저 흔들리면…

논값이 평당 3만5천원이라면, 200평의 논을 팔아 그 돈을 은행에 넣어놓기만 해도 연간 35만원(금리 5% 기준)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제하면 200평 농사에서 얻는 노동소득은 연간 15만원가량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래도 농민들은 벼농사는 아직 지을 만하다고 한다. 땅 팔아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 200평당 임대료가 쌀 1가마(16만원) 수준이므로 이를 제하더라도 200평에 34만원가량은 수익이 난다는 것이다. 신용범 사무국장은 “그런 벼농사마저 흔들릴 때 농민들은 환금작물재배로 더욱 몰리고, 결국 농산물값 폭락으로 농업은 파탄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농은 올해 농민대회에 농민 30만명을 집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칠순 노인을 포함해 450만 농민 열다섯명 중 한명은 모여야 한다. 규모로 보면 거의 ‘농민봉기’ 수준이다. 전농을 비롯한 농민단체·전교조·민주노동당 등이 참여하는 농업회생연대 준비위원회 주최로 지난 7월1일 진도를 출발한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행사는 봉기의 봉홧불이라 할 만하다. 봉화는 9월16일 진천 초평면을 지나 하루하루 서울로 향하고 있다.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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