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문제 해법은 없나
기아 상태에 이른 농업을 살리는 대안…농촌과 제조업의 사회적 연대가 뒷받침돼야
지난해 말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는 덮어놓고 농사짓고, 덮어놓고 쌀값 올리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큰소리친 김영삼 정권시절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덮어놓고 농사짓던 시절’이 옛날이 된 지 오래라는 건 농민들이 더 잘 안다. 지난 95년 우루과이라운드(UR)부터 시작된 국제무역기구(WTO) 체제와 농산물시장 개방파고가 혹독하게 가르쳐준 깨달음이다.
일본·대만 농외소득 비중 80% 넘어
쿼터제로 묶어 개방을 최소화하는 쌀값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농산물값은 사실상 국제 농산물값에 따라 움직인다. 국제 농산물값이 ‘천장 노릇’을 하는 격인데, 수입 농산물값이 상한선으로 작용해 국산 농산물값은 오를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오를라치면 업자들이 즉각 수입 농산물을 많이 들여오고, 다시 가격은 떨어진다. 농산물값은 생산량이 약간이라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널뛰듯 폭락과 폭등을 거듭한다. 개방을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다면, 농업의 국제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이지 못하는 한 농사지어 돈 번다는 생각은 허망한 꿈에 그치고 만다. 논밭이 태풍에 속수무책으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지만 빗장 풀린 수입 농산물은 사시사철 몰아치는 태풍이나 다름없다.
무턱대고 농사짓다가는 빚만 는다는 사실은 농촌물가지수에서 한눈에 나타난다. 농가판매지수(농가가 파는 농산물값)는 95년(1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2000년 109, 지난 7월 121이다. 반면 투입재가격지수(농기계·농약·비료값)는 95년(100)을 기준으로 2000년 127로 뛴 데 이어 지난 7월 138로 크게 증가했다. 생산비는 껑충 뛰는데 출하값은 찔끔 오르는 구조 속에서 농가소득은 점점 떨어지고 농가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쪼들린다. 공산품값과 농산물값의 상승폭을 견줘봐도 마찬가지다. 쌀 한 봉지(20㎏) 값은 지난 80년 1만2710원에서 지난 7월 5만376원으로 12년새 4배가량 뛰었다. 반면 자장면 한 그릇은 373원에서 2783원으로 7배가 올랐고, 봉지라면(120g) 값은 당시 100원짜리가 주를 이뤘으나 지금은 600∼700원 안팎으로 뛰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것도 위험하지만, 안팎의 이런 조건은 농촌과 농민을 더욱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 농업 자체에서 수익을 내는 게 갈수록 버겁다면 ‘농외소득’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농외소득은 △농업 이외의 사업으로 얻는 겸업소득 △농가가 취업해 얻는 급료 및 노임소득으로 크게 나뉜다. 일본 농가는 전체 농가소득 가운데 85.6%, 대만 농가는 83.1%를 농외소득으로 올리고 있다. 반면 우리 농촌의 농외소득 비중은 52.8%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소득(47.2%)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개방 물결의 충격이 그만큼 더 크다. 농촌경제연구원 김병률 연구원은 “농가소득 안정을 위해서는 새로운 소득원으로 농외소득 개발에 집중해야 한다. 농촌 경쟁력 강화나 구조조정을 통한 직접적인 농업소득에만 치중해온 데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농외소득을 늘리려는 시도가 없는 건 아니었다. 농외소득정책은 지난 1960∼70년대 새마을공장 건설, 80년대 농공단지 조성, 90년대 특산단지 육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농공단지는 도로·교통 등 입지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한 탓에 텅텅 비었고, 그나마 엉뚱한(?) 반도체·철강회사 등이 입주하기 일쑤였다.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는 농촌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김병률 연구원은 “탈농이 아니라 ‘재촌탈농’으로 가야 한다. 농촌에 살되 농촌 안에서 농외소득을 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외소득이 높은 일본과 대만 농가를 보자. 대만은 농촌과 그 근처에 공장과 회사가 들어서 있는데 이 지역 안에서 농민 부부는 공장에서, 아들은 회사원으로, 딸은 교사로 일한다. 일본 농가를 보면 아내가 농사를 짓고 남편은 농촌 근처 직장에 다니면서 토·일요일이면 농사를 돕는다. 이처럼 농업소득 의존도가 낮기 때문에 개방 파고에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농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필요
농외소득을 늘리려면 농촌과 제조업의 ‘사회적 연대’가 뒤따라야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대거 도시노동자로 유입됐다. 국가는 저곡가정책을 통해 농민들의 등을 도시로 떠밀었고, 도시노동자로 바뀐 뒤에는 다시 저임금을 강요했다. 산업자본의 이익을 위해 농촌이 희생된 셈인데, 저곡가정책은 저임금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휴대폰을 수출하는 대가로 또다시 마늘농가가 피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공산품을 수출해 농업의 손실을 벌충하면 된다”는 논리가 득세하지만, 그 과실이 직접적으로 농민한테 돌아가는 건 물론 아니다.
중국에 휴대폰을 수출하는 삼성전자한테 수익의 일부를 농민들한테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농림부 조무희 과장은 “자발적으로 하면 모를까, 제조업체한테 ‘너희들 때문에 농촌이 희생됐으므로 번 돈의 일부를 농촌에 환원하라’고 요구할 근거는 약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김병률 연구원은 “삼성이 농촌에 리조트나 호텔을 지은 뒤 싼값에 농민들한테 임대해주면 그것으로 농외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민간기업이 농촌에 투자하고 수익은 농민들이 거두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정부의 농가소득 보조금 지급을 엄격히 제한하는 WTO 규정을 비켜갈 수 있다. 민간에서 농촌을 돕는 방식은 WTO도 제재를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가 따른다. 농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바탕에 깔려야 한다. 농민들은 “그동안 농촌을 희생시켜놓고 이제는 비싼 공산품 팔아 값싼 농산물을 사먹겠다는 것이냐”고 분노하고 있다. 농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농촌농업특별위원회’가 활동 중이지만 농업문제를 농촌지역에 국한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설득과 동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농산물값에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는 해묵은 주장 역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맞물려 있다. 농협중앙회 최상기 과장은 “환경보전, 자연경관 및 식량자급률 유지 등 농업의 다원적 가치가 전혀 반영되지 못한 탓에 시장에서 형성된 농산물값이 실제 가치보다 턱없이 낮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업의 가치를 농산물값에 포함시키는 문제는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다.
대다수 농민들이 개방과 과잉생산에 따른 농산물값 폭락으로 시름에 잠겨 있지만 농외소득으로 쏠쏠한 수익을 올리는 마을이 있다. 이른바 ‘그린투어리즘’으로, 도회지 사람이 농촌마을을 찾는 녹색 여가·체험이다. 그윽한 시골의 아침 향기, 물안개와 이슬, 빛나는 밤별, 풀섶의 풀벌레 소리와 흙길…. 그린투어리즘은 주말농장 개념도 아니고 단순한 관광도 아니다. 농림부가 선정한 ‘그린투어리즘 시범마을’은 난방·온수 시설을 갖춘 민박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전형적인 밋밋한 농촌이지만 하루이틀씩 자고 가는 도회지 사람이 ‘뜻밖으로’ 많다.
짭짤한 그린투어리즘 마을
경기도 여주에 있는 상호리(주민 30여세대)를 찾으면 고구마 캐기, 버섯 수확, 메주 만들기, 경운기 몰기 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생산한 참외, 버섯을 방문객한테 직접 팔기도 한다. 탁 트인 마을 산책로에 반해 또 찾아오는 ‘상호리팬’도 생겼다. 상호리에서 그린투어리즘에 참여한 농가는 연간 6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경기도 양평군 양수1리도 올 여름부터 민박을 받아 호당 300만원을 웃도는 농외소득을 올렸다. 마을 주민들은 방문객들에게 마을뿐 아니라 주변 풍물 등 온갖 볼거리까지 안내한다. 농림부 조무희 과장은 “바깥에 거창하게 홍보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고 그린투어리즘 마을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집이 형편없이 낡았는데도 와서 자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마을 주차장이나 도시 손님들의 별 구경을 위한 천문대 설치비용은 정부가 지원해준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그린투어리즘으로 쏠쏠한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는 경기도 여주군 상호리. 또다시 찾아오는 '상호리팬'도 생겼다.


사진/ 지역 특산품 보호를 위한 '지리적 표시' 제1호로 등록된 보성 녹차.

사진/ '오리농법'을 체험하기 위해 강원도 화천군 신대리에 온 도시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