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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종합상사, 화려한 날은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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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8-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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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분리·회계기준 변화 등으로 기로…사업다각화로 생존 모색 몸부림

‘버터에서 미사일까지.’ 화려한 시절의 종합상사를 일컫는 말이다. 종합상사는 곧 수출과 동의어이고, 종합상사가 생겨난 것도 수출에 운명을 걸다시피 한 지난 75년이었다.

“판매수수료만 매출로 잡아라”

사진/ 수출역군으로 화려한 시절을 구가했던 종합상사. 외환위기 이후 입지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 (economy21 박미향 기자)
‘수출만이 살길’이란 구호 속에서 정부는 대외무역법에 따라 종합상사를 지정하고, 수출의 첨병으로 집중 육성해나갔다. 현재 국내 7대 종합상사는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LG상사, SK글로벌, 대우인터내셔널, (주)효성, (주)쌍용이다. 1억달러, 10억달러, 100억달러…. 정부가 주는 ‘수출의 탑’ 수상자는 대부분 종합상사들이었다. 세계에 내세울 만한 변변한 기업이 없던 시절, 대규모 수출액을 달성한 종합상사에게 수출장려정책에 따라 각종 금융·세제혜택이 주어진 건 당연했다. 우리나라에서 규모나 업종을 가리지 않고 가장 흔히 쓰이는 상호가 ‘00종합상사’란 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종합상사는 화려한 시절을 구가해왔다.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의 매출액이 30조원대로, 국내 전체기업을 통틀어 외형 1, 2위를 다퉈왔다는 점이 그대로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영 딴판이다. 화려한 시절은 옛 추억이 되었고, 종합상사의 수출비중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지난 99년 종합상사 수출액은 812억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51.2%를 차지했다. 그러나 올 상반기 종합상사 수출액은 281억달러로 37%에 그쳤다. 잇단 재벌의 몰락과 계열사 분리로 종합상사의 수출대행 물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종합상사를 통하지 않고 해외에 직수출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도 종합상사의 퇴조를 앞당겼다.

게다가 내년부터 새 회계기준이 적용됨에 따라 종합상사한테 당장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기업 회계기준이 새로 바뀌면서 종합상사의 재무제표가 확 달라지기 때문이다. 새 회계기준은 계열사 등으로부터 수출을 대행받은 경우 그에 따른 판매수수료만 매출로 잡도록 정하였다. 그동안 종합상사들은 수출대행분 전체를 매출로 잡아왔다. 종합상사의 수출대행 매출액은 전체의 30∼87%에 이른다. 따라서 새 회계기준이 적용되면 현대종합상사 매출액이 27조원에서 3조5천억원으로 떨어지고, 삼성물산은 32조원에서 8조8천억원으로 줄어드는 등 매출이 큰 폭으로 줄어든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대기업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정부가 종합상사의 회계기준을 바꾼 데는 외형이 아닌, 수익과 연결된 진정한 매출을 파악해 회계 투명성을 높인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푼돈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마진을 거의 남기지 못하는 계열사 수출대행의 거품을 걷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합상사한테는 직격탄이나 마찬가지다. “종합상사는 거대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합상사 매출은 수십조원에 이를 정도로 덩치는 어마어마하지만 영업이익률은 일반 제조업체보다 형편없이 낮다. 삼성물산 상사부문 매출은 25조원에 이르지만 실제 남기는 이익은 1천억원을 밑돈다. 평균 영업이익률이 0.5%(1천원어치 물건을 팔아 5원을 남긴다는 뜻)도 안 되는 셈이다. 지난해 전체 상장사 평균이익률(5.5%)에도 크게 못 미친다.

회계기준 변경에 따른 종합상사 매출액 감소 예상액 (단위:원)

종합상사

매출액(2001)

새 회계기준 적용시

감소율(%)

삼성물산

 32조7400억

 8조8400억

 72

현대종합상사

 27조1480억

 3조5천억

 87

LG상사

 18조6천억

 6조1380억

 67

SK글로벌

 18조363억

 11조8천억

 33

대우인터내셔널

 6조3500억

 4조5085억

 29

수출역군에서 환란 주범으로

이유는 계열사의 대규모 물량을 수출했지만 실제로는 코묻은 돈에 지나지 않는 수수료만 남겼기 때문이다. 물량 위주의 계열사 수출대행으로 수익성보다 외형 키우기에만 매달려온 결과다. 종합상사의 외형 부풀리기와, 이렇게 뻥튀기된 매출액을 바탕으로 한 무분별한 해외차입이 외환위기를 부른 한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종합상사가 해외 현지법인에게 지급보증을 서주면 이를 통해 현지법인들이 마구 외화를 끌어다 쓴 것이다. 이는 덩치만 키운 종합상사의 기형적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종합상사 무용론’까지 제기됐다. 재정경제부는 “외형 위주로 수출금융을 일으켜 돈만 빌려다 쓰고 부가가치는 창출하지 못하는 종합상사가 더 이상 존재할 까닭이 있느냐”고 대놓고 말한다. 지난 30년간 수출전선을 이끌었지만 양적 성장사를 마감하고 질적 도약이냐 몰락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회계기준 변경에 따른 외형 축소는 종합상사의 특성상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해외 거래선 발굴과 해외 프로젝트 입찰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외국 정부와 기업들은 한국 종합상사들의 매출액 대부분이 계열사 대행수출을 통해 이뤄진 것이란 사실을 몰랐다. 그런 만큼 종합상사들의 대외신뢰도는 한순간에 깨질 위기에 놓였다. 현대종합상사쪽은 “매출액 급감으로 자원 개발,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해외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 불리한 처지에 놓일까 걱정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때 조달하는 금리 혜택도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무제표가 갑자기 나빠진 까닭을 발주처인 외국 정부기관과 기업에 열심히 설명하더라도 미심쩍은 곳이라고 발주를 꺼릴 것이라는 얘기다. 해외에서 현지금융을 일으켜 돈을 빌릴 때 계약조건이 나빠지는 것도 불을 보듯 뻔하다. 삼성물산쪽은 “삼성물산의 매출액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지면 해외 거래선들이 의아해할 것”이라며 프로젝트 수주에서 타격을 입을까 걱정했다.

종합상사의 탄생과 위기는 재벌의 그것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삼백(三白-섬유·설탕·밀가루)산업에서 시작된 종합상사는 한국산업사에서 재벌을 낳은 원천으로 기록된다. 수출 드라이브형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을 누린 종합상사는 수출의 첨병뿐 아니라 계열사 확장의 전진기지 노릇을 했다. 재벌은 종합상사를 사실상의 지주회사로 삼아 계열사의 수출물량을 모두 몰아주고, 종합상사의 자금을 동원해 자동차·반도체까지 끊임없는 계열사 확장을 꾀했다. 그러나 재벌의 한복판에 있는 종합상사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찬밥신세로 몰리는 형편이다. 현대계열사 분리과정에서 현대자동차쪽이 “자체 해외 수출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합상사는 필요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중소기업 수출로 관심 돌려야”

계열사들이 떨어져나가고 회계기준도 바뀐 탓에 매출이 급감하자 종합상사들도 독자생존을 위한 살길 찾기에 나섰다. 계열사 대행수출에 기댄 그동안의 외형 키우기에서 벗어나 수익을 내는 새로운 사업 발굴에 뛰어든 것이다. 삼성물산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통신인프라 등 국가 기간산업을 종합적으로 구축해주는 컨트리 마케팅을 강화하는 한편, 바이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다. 현대종합상사는 “내수 유통 쪽으로 사업을 다각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수익성이 높은 해외 프로젝트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LG상사도 계열사 의존을 줄이는 대신 패션 등 내수 유통사업과 플랜트 수출 등 자립형 수익사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해외법인과 지사(100여개)가 가장 많아 제품 소싱(sourcing·물색)처가 다양하고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난 강점을 무기로 3국간 무역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업영역을 다각화하고, 외형보다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 아래 고수익 창출을 꾀한다는 것이다.

올 1분기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는 41.7%다. 그만큼 수출은 여전히 한국경제를 먹여살리는 견인차다. 따라서 종합상사 무용론이 제기되고 종합상사를 거치치 않는 직수출이 늘고 있음에도 해외 현지법인 등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종합상사의 방대한 네트워크는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해외 거점에서 수집한 여러 정보를 통해 수출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는 “이제 종합상사는 수출 경험이 없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의 수출을 뚫어주는 지점에서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로에 선 종합상사의 변신 몸부림은 환란 이후 한국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 찾기와 맞물려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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