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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름을 달구는 해외여행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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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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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회복과 주5일근무제 실시로 급증세…주말여행 국내로, 여름휴가 해외로 가는 경향 나타나

사진/ 인천공항 대한항공 탑승수속 카운터에서 승객들이 좌석을 배정받고 있다.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며 해외여행객이 부쩍 늘었다.
LG화학의 지주회사인 LGCI 임상개발팀에 근무하는 권미정(28)씨는 여름 휴가 때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친구 1명과 함께 8월 초에 7박8일 일정으로 유럽 5개국을 순방하는 패키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사에 내는 돈 220만원에 개인 용돈까지 250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가지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생각에 주저없이 유럽행을 결심했다.

권씨가 유럽 여행을 생각한 것은 지난해 미국에 다녀온 뒤부터다. 첫 번째 해외 나들이인 미국에서의 경험이 너무 좋았기 때문. 게다가 회사가 지난해 9월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시작했다. 휴일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유럽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5일 휴가에 토·일 연휴를 앞뒤로 끼면 9일을 쉴 수 있어요. 그래서 마음놓고 7박8일 일정을 잡았지요.”

월드컵으로 주춤하다 일시에 몰려


무역업을 하는 신기철(36)씨는 오는 9월에 7살짜리 딸과 함께 가족 3명이 인도네시아 발리로 4박5일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름 휴가 때 나갈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시기를 한달 정도 늦췄다. 신씨는 평소 주말에 국내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여름 휴가 때는 해외 여행으로 관심이 더 쏠린다. 동해안이나 제주도는 2박3일 일정으로 평소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돈은 많이 든다. 이번 여행에 400만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부인 공경숙씨는 “먹고 입는 데 돈을 안 쓰는 편이다. 대신 여행 비용을 조금씩 모아놨다가 해외 여행할 때 쓴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들면서 이처럼 해외 여행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여름 해외 여행이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특히 그런 사람들이 눈에 자주 띈다. 여행업계의 말을 빌리면 6월 월드컵 때문에 해외 여행을 가지 않은 사람들의 출국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통상적인 여름 성수기 현상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이다. 롯데관광 백현 이사는 “지난해 여름에 비해 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30%가량 늘었다. 경기가 회복된데다 주5일 근무제 등의 영향으로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 여행자는 올 초부터 이미 두드러진 증가세를 보여왔다. 한국관광공사(KNTO)에 따르면 올해 1∼5월 해외출국자 수(내국인 기준)는 264만9천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19만2천명에 비해 20.8% 늘었다. 2000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경기하락의 여파로 지난해 증가율이 12%대로 둔화했다가 올해 경기회복과 함께 다시 20%를 넘어선 것이다. 여름 성수기가 포함돼 있는 3분기(7∼9월) 해외출국자 수는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141만명에 이르렀다가 98년 84만5천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외환위기의 충격이 조금씩 가시면서 99년 122만2천명, 2000년 149만3천명, 2001년 167만6천명으로 다시 증가해왔다. 연도별 증가율은 2000년 22.2%, 2001년 12.3%였다.

여행업계 전문가들은 성수기를 포함한 3분기(7∼9월)에는 상반기의 20.8%보다 높은 25∼30%의 증가율을 예상하고 있다. 월드컵 때 주춤한 해외 여행이 일시에 몰리는데다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해외에서의 씀씀이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출국자 수가 210만∼218만명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다. 한국관광연구원(KTRI) 관계자는 “상반기 평균 증가율을 훨씬 넘어서는 것은 분명하다. 사상 최대 인파가 해외로 몰려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항공사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대한항공 여객사업 계획팀장 고종섭 부장은 “삿포로, 괌, 방콕, 발리, 푸케트섬 등을 중심으로 항공편을 20%가량 늘렸다”고 말했다.

원화가치 상승도 한 몫

사진/ 인천공항의 환전창구.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한국 여행객의 쓰임새에 여유가 생겼다.
중요한 것은 성수기의 출국자 증가에 더해 성수기 자체가 길어졌다는 점이다. 대부분 8월15일이면 현저하게 해외 여행자들의 수가 줄었으나 이번에는 8월 말까지 예약 손님들이 줄지어 있다는 것이 여행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월드컵 때문에 휴가 계획을 늦게 잡은 사람이 많은데다 해외 여행자들의 수가 많아 뒤로 밀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해외 여행의 경우 한국 날씨와 상관없이 8월 말에서 9월 초에도 얼마든지 휴가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시기를 늦추더라도 원하는 곳을 가려고 한다. 9월에 발리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신기철씨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올 여름 해외 여행자들이 25∼30%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해외 여행 바람이 부는 까닭은 다양하다. 먼저 경기회복의 영향이 뚜렷하다. 기업들이 사상 최대 순이익을 내고 있으며,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도 몇해에 걸친 구조조정의 결실을 보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해 가장 큰 희생을 겪은 은행들이 올 수천억원씩의 순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원화가치가 상승하면서 해외에서 한국인 여행객들의 쓰임새에 여유가 생긴 것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4월19일 1314.5원이던 것이 7월19일 1173.3원으로 떨어지는 등 불과 3달 사이에 10.7%가 하락했다. 그만큼 해외 여행자들의 구매력이 높아진 셈이다. 여행사 또한 마찬가지다. 환율 하락으로 수익이 자연스럽게 증가하면서 더 저렴한 상품을 내놓을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환율 하락의 효과가 당장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로 인해 여행객들과 여행사들이 여유가 생겼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해외 여행 붐이 일어나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쯤 해외 여행을 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국내외 여건상 지금이 적기라는 지적이다.

7월1일부터 시작된 은행권 주5일 근무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주5일 근무제는 단순히 은행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LG 등 몇몇 대기업들은 이미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금호가 준비에 착수하는 등 기업들이 속속 주5일 근무제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주5일 근무제 확산은 직장인들에게 주말 여유 시간을 가져다줬고, 사람들의 관심을 여행으로 쏠리게 했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이제 주말에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주말 2박3일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휴가철이 아닌 평상시에 국내 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됐다. 제주도를 포함해 웬만한 곳이면 금요일 밤에 떠나 일요일 밤 늦게 돌아오는 일정으로 충분히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상시 주말 여행은 국내로, 여름 휴가는 해외로 나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BC카드 여행사업팀의 구현철 주임은 “앞으로 여행 패턴이 주말 단기 여행과 1년에 1∼2차례의 장기 여행으로 나뉠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해외 여행의 수요는 그만큼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올 여름 휴가로 4가족 발리 여행을 계획 중인 가정주부 이인숙(37)씨도 “5일 근무제가 되면 국내 여행은 굳이 휴가를 내지 않더라도 주말을 이용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가뿐 아니라 주말 해외 여행도

물론 주말을 이용한 반짝 해외 여행도 있다. 괌·사이판이나 홍콩·싱가포르 등을 대상으로 한 2박3일 또는 3박4일의 주말여행이 그것이다. 금요일 밤 비행기로 출발해 현지에 도착한 뒤 월요일 새벽 6∼7시에 돌아오는 방식이다. 괌·사이판은 가족끼리, 홍콩과 싱가포르는 미혼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한 여행업계 관계자는 “원래 주말 해외 여행 상품이 있었지만 올 봄부터 주말 반짝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주5일 근무제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원들의 변화도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보수적인 은행원들은 일반 대기업 직장인들에 비해 해외 여행을 잘 가지 않는 편이다. 주로 회사에서 보내주는 연수나 격려성 해외 여행이 주종을 이뤄왔다. 그러나 이 달 들어서는 은행원들의 해외 여행 문의가 부쩍 늘었다. BC카드 구현철 주임은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행원들의 해외 여행 증가 추세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 여행 일정을 묻는 전화는 두배 가까이 늘었다”고 말했다. 경기회복과 5일 근무제 등으로 인한 생활 패턴의 변화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을 해외로 향하게 하고 있다.

글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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