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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노후의 구세주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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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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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퇴직금제도 대체할 기업연금 논의 활발…복잡한 이해관계 조정 가능할까

사진/ 노동분쟁 가운데 가장 흔한 게 퇴직금이다. 퇴직금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임금을 둘러싼 노동분쟁 가운데 가장 흔한 게 퇴직금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9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기업의 임금체불액은 약 4천억원으로, 이 가운데 70% 이상을 퇴직금이 차지하고 있다. 회사가 망해서 또는 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퇴직금을 떼이기 십상이다. 이유는 퇴직금 적립방식 때문이다. 퇴직금 지급이 법으로 강제화되어 있는데도 회사 바깥에 따로 적립(사외적립)하지 않고 ‘장부상의 빚’으로 적립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지급불능사태에 빠져 문제가 터진다. 그러다 보니 퇴직금을 회사가 운영자금으로 끌어쓰기도 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노동자가 해고당하거나 이직하면 퇴직금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퇴직금의 안정성이 떨어지자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퇴직금을 미리 확보하려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퇴직금 중간정산을 요구하는 사례도 늘었다.

노동자·사용자 내부에도 이해관계 엇갈려

지난 1966년부터 도입된 퇴직금제도는 ‘후불임금’ 성격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뒤의 노후소득보장이라는 사회보장 기능을 갖고 있다. 그동안 퇴직금제도를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퇴직금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맞춰졌다. 퇴직보험, 임금채권보장기금, 퇴직금중간정산제는 모두 퇴직금의 안정성을 꾀하려고 나온 제도다. 그런데 퇴직금의 지급 안정성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아예 퇴직금제도 자체를 없애고 대신 새로운 노후소득보장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바로 기업연금이다.


기업연금 도입을 둘러싼 논의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지난해 초부터 이미 진행되어왔다. 들여다보면 무척 까다로운 구석이 많지만, 기업연금은 사용자와 노동자가 공동부담하는 갹출금(현행 퇴직금) 재원을 주식·채권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제도다(상자기사 참조). 노사 모두 원칙적으로는 “기업연금 도입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 쪽은 이미 연구 검토를 끝냈고 노사간 합의를 기다리고 있다.

기업연금 도입을 가장 먼저 꺼낸 쪽은 정부다. 재경부는 외환위기 이후 장부상 적립된 막대한 퇴직금 문제가 기업인수합병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자 기업연금 도입을 이슈로 던졌다.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약 40조원으로 추정되는 퇴직금 재원을 주식과 회사채에 투자하면 주식시장도 활성화되고, 기업들도 재투자에 필요한 장기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노동계와 경영계가 바라보는 기업연금은, 시각에 따라 노사간에는 물론 노동자와 사용자 내부에서도 이해관계가 어지럽게 교차한다. 하나씩 짚어보자. 기업연금을 둘러싼 논의의 줄기는 크게 △연금지급의 안정성 △기업이 부담하는 보험요율 △투자 리스크 △자본시장 육성으로 나뉜다.

먼저 기업연금은 사외위탁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퇴직금의 안정적 지급을 일정 부분 보장한다. 이는 기업연금 문제에 접근하는 노동계의 최대 관심사다. 한국노총 정길오 정책1국장은 “기업연금이 기존 퇴직금 제도에 비해 퇴직금의 안정적 지급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검토할 수 있다는 것뿐 아직 정해진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연금으로 퇴직금의 불안정성이 100% 극복되는 건 아니다. 확정급부형이라도 회사가 망하면 연금을 떼일 수 있고, 확정갹출형의 경우 원리금이 보장되는 안정적 채권에 넣었다가도 주식시장이 한창 뜨면 수익을 좇아 주식시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가 적립금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기업연금 도입 초기에는 노동자들이 안정적인 국공채, 예금에 투자했다가 점차 수익률을 중시하면서 투자상품을 주식시장 쪽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부 “노사 합의 있어야”

사진/ 정부가 기업연금 도입을 가장 먼저 꺼낸 이유 중에는 자본시장을 육성한다는 의도도 있다.
업종별로 사무금융 노동자와 제조업 노동자의 이해도 엇갈린다. 금융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무금융 노동자는 자기 책임 아래 투자하는 확정갹출형을 원하는 반면, 금융시장을 접할 기회나 정보가 적은 제조업 노동자는 기금 운영능력이 떨어져 불안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안정적으로 보장받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기업연금에 대해 논의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할 수 있지만,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기업연금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민주노총은 “연급지급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면 퇴직금 제도를 꼭 고수할 필요는 없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고 노동시장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기존 퇴직금의 노후생활안정 효과가 크게 줄어든 만큼 각종 사회보험 틀 속에서 기업연금 도입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쪽은 퇴직금의 안정성보다는 기업이 부담해온 퇴직금 갹출액을 기업연금을 통해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가 관심사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금운영을 잘하면 갹출액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경총 이호성 팀장은 “월드뱅크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적립된 기업연금기금을 투자해 수익을 올리면 월급의 8.3%인 현행 퇴직금 보험료를 절반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마다 연금을 당장 사외적립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현금 유동성이 풍부한 기업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중소기업은 사외적립에 크게 반발할 게 뻔하다. 기업연금이 도입되더라도 대기업부터 갈 수밖에 없다.

결국 기업연금 도입은 노사 모두에게 실익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한두푼도 아닌 퇴직금을 대체하는 제도인 만큼 노사간에 충분한 내부 의견 정리도 필요하다. 노동자 내부에서는 정규직 장기근속자 중심으로 설계된 기존 퇴직금의 기득권을 가진 대기업 노동자와 퇴직금 혜택을 못 누려온 비정규직 사이에 갈등을 빚을 공산이 크다. 노동부도 “인구 노령화 추세와 현행 퇴직금 제도의 안정성 문제를 함께 푸는 차원에서 기업연금 도입을 추진 중이다. 다만 노사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를 달았다.

국민연금에 기업연금 연계할 수도

퇴직금제도 유지냐, 기업연금 도입이냐는 논란은 이해관계를 넘어 노후소득보장을 어떻게 구축하느냐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금융감독원은 “노동계 일부에서 기업연금을 자본시장 육성을 위한 것이라고 삐딱하게 보지만 사실 노후소득보장이 본질”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직장생활 때 벌던 소득의 몇%를 노후에 받을 수 있는지)이 60%라지만 고령인구 증가로 대체율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을 기업연금으로 메울 수 있다는 논리다. 또 목돈으로 받은 퇴직금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탈을 막고, 매달 안정적인 연금으로 받게 된다. 퇴직금 중간정산이 확산되고, 연봉제로 임금체계가 바뀌면서 퇴직 뒤 소득보장수단으로서의 퇴직금이 의미를 잃어간다는 점도 기업연금 도입이 주목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노사정위는 퇴직금을 기업연금으로 전환하는 모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기존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두되 노사합의에 의한 기업연금 도입을 확산시킨 뒤 법정 기업연금제로 가는 방안 △기존 노동자에게는 퇴직금을 유지하고, 새로 직장을 갖는 세대부터 기업연금을 도입하는 방안 △국민연금과 기업연금을 연계해 노후소득 다층보장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이다. 노사정위원회 이태흥 전문위원은 “현행 퇴직금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퇴직금 조항에 기업연금을 도입할 수 있는 단서조항을 두는 식으로 노사 모두에게 기업연금 도입의 길을 터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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