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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동부 “반도체여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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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7-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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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남반도체 인수로 추진력 얻어…엄청난 투자액 감당하며 경쟁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진/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반도체 사업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다고 알려졌다.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관련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반도체를 향한 동부그룹의 20년 숙원이 풀렸다. 1980년대 초반부터 반도체 산업에 진입하려 했던 김준기 동부 회장의 집념어린 노력이 아남반도체 인수로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동부건설은 지난 7월 초 비메모리 파운드리 업체인 아남반도체의 지분 16.1%를 최대주주 암코로부터 인수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인수가격은 1140억원이다. 이와 함께 동부화재와 동부생명이 600억원을 출자해 9.7%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기로 했다. 동부는 이로써 전체 지분의 25.8%를 확보해 중견 반도체 기업인 아남반도체의 새 주인이 되었다.

김준기 회장의 집념


동부는 80년대 초반 한 차례의 사업 실패와 외환위기로 인한 좌절, 그리고 지난해 가동을 시작한 충북 음성 공장의 사업부진 등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반도체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특히 지난해 4월 공장 가동을 시작한 동부전자는 올해 1분기까지 매출이 300만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1년이 넘도록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준기 회장은 올 초 “동부전자가 정상화될 때까지는 골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동부는 아남반도체 인수로 그동안 부진한 반도체 사업에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동부의 반도체 사업은 김준기 회장이 오래 전부터 꿈꿔온 새로운 사업이었다. 김 회장은 1969년 미륭건설을 설립한 뒤 70년대 중동 특수를 타고 사세를 크게 성장시켰다. 김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반도체와 금융이다.

동부는 일단 금융산업 진출을 위해 보험을 선택했다. 83년 5월 자동차보험 계약을 독점하고 있던 한국자동차보험을 인수함으로써 회사의 주력을 금융 쪽으로 전환했다. 한국자동차보험은 현재 동부화재의 전신이다. 동부는 동시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 82년 미국 몬센토와 합작으로 반도체 웨이퍼 원판 제조회사인 ‘코실’(코리아실리콘웨이퍼)을 설립했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고도의 기술과 많은 투자자금이 필요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조차 성숙되지 않은 단계였다. 고전하던 동부는 90년 5월 코실의 지분 51%를 LG 쪽에 넘기게 된다. 회사 이름은 LG실트론으로 바뀌었고, 동부는 지분 49%의 대주주로만 참여하고 있다.

한 차례의 실패를 거쳤지만 동부는 반도체 사업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특히 김 회장의 집념은 강했다. 그는 집에서도 잠자리에 반도체 관련 전문 서적을 쌓아놓고, 수시로 책 읽기에 열중하는 등 남다른 애착을 보여왔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이런 김 회장의 의지를 바탕으로 동부는 94년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 준비팀을 발족했다. 목표는 메모리 반도체였다. 이 계획은 97년 동부전자 설립으로 구체화된다. 미국 IBM과 합작으로 256MD램을 생산한다는 야심찬 구상이었다. 그러나 97년 말 터진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충북 음성에 짓고 있던 공장은 골조만 올라간 채 공사가 중단되었다.

동부는 이후 새로운 대안찾기에 나선다. 이미 상당한 투자를 한 상태에서 이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온 대안이 비메모리 파운드리 사업이다. 동부는 대만업체들을 집중 벤치마킹했다. 그리고 일본 도시바와 기술제휴, 제품공급과 자본 참여 협상을 벌여 2000년 7월 새로운 사업을 발표한다. 개점휴업 상태에 놓여 있던 동부전자가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음성공장 공사가 다시 시작됐고, 2001년 4월 공장이 완공됐다. 동부로서는 20여년 가까이 꿈꿔온 반도체 사업의 첫발을 뗀 셈이다.

신속한 투자가 가장 중요

그러나 1년이 지난 현재 동부전자의 실적은 그리 좋지 않다. 판매실적이라고 해봤자 2001년 78만달러(9억5천만원), 올해 1분기 203만달러(24억원)가 고작이다. 가장 큰 약점은 취약한 생산능력이다. 월 5천장(8인치 기준) 규모의 웨이퍼 가공력으로는 고객 확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부전자의 당기순손실은 2000년 197억원으로, 2001년 520억원으로 늘어났다. 동부가 아남반도체를 인수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동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사업은 비메모리 파운드리 산업이다. 한국이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D램과 S램은 주로 기억장치 기능을 하는 메모리 반도체. 이에 비해 비메모리 반도체는 컴퓨터의 중앙연산처리장치(CPU)를 비롯해 통신기기와 디지털 가전 등에 쓰이는 특수 용도의 반도체다. 전 세계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의 산업규모는 2001년 1145억달러로 메모리 반도체의 249억달러를 훨씬 넘어섰다. 파운드리는 비메모리 종합 반도체 기업에서 주문을 받아 웨이퍼 원판에 설계도면을 패턴화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한마디로 웨이퍼 가공분야의 하청업체다.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전망은 밝은 편이다. 반도체 전문 조사기관인 IC인사이츠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파운드리 시장규모가 지난해 91억달러에서 2006년 305억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적인 종합 반도체 기업들이 웨이퍼 가공분야를 아웃소싱하는 추세인데다 제조는 하지 않고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들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모토롤라·도시바 등은 전체 생산량의 50%를 외주로 돌린다는 방침이다.

사진/ 동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사업은 비메모리 파운드리 산업이다. 아남반도체 인수로 동부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중요한 것은 앞선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신속한 투자다. 그만큼 많은 투자자금이 필요한 것이다. 동부가 아남반도체를 인수하고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바라보는 재계의 우려섞인 시각도 이 때문이다. ‘동부의 자금 규모로 세계적인 업체들과 경쟁하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미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다. 대만 TSMC(매출 37억달러)와 UMC(18억9천만달러), 싱가포르 차터드(4억6천만달러) 등 3개 업체가 세계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0.13㎛ 시제품을 생산하는 단계다. 동부전자가 0.18∼0.25㎛, 아남반도체가 0.18∼0.35㎛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기술적 격차가 크다.

동부전자는 월 5천장 규모의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데만 해도 많은 자금을 들였다. 지난해 말 산업은행 등 11개 금융기관으로부터 유치한 신디케이트론 1차분 2500만달러는 신규투자에 쓰지도 못하고 밀린 대금을 갚는 데 들어갔다. 올해 생산능력을 월 1만장 수준으로 늘리는 데 1800억원이 더 들어간다. 물론 이에 필요한 자금은 신디케이트론 2차분 2600억원의 사용승인이 난 상태여서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를 4만장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또 수천억원의 돈이 필요하다. 과연 이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금융계열사 동원에 우려도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번 아남반도체 인수에 금융 계열사를 동원했다는 점이다. 고객이 맡긴 금융 계열사의 돈을 그룹의 사업 확장에 동원한 것이다. 이는 외환위기 이전 한국 기업들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 재벌기업들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위해 금융 계열사의 돈을 마구 가져다 썼고, 이로 인한 과잉투자로 기업과 금융이 모두 부실화한 전례를 국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동부는 이미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외환위기 직전 추진한 메모리 사업만 해도 그렇다. 당시 외환위기가 없었으면 동부는 더 큰 위기에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번 시작하면 1년에 1조원 이상의 지속적인 투자자금이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동부가 그런 경쟁을 버텨내기엔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빅3인 하이닉스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더라도 반도체 산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동부전자가 지난해 공장 가동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전망 역시 마찬가지다. 2001년 말까지 생산규모를 월 2만5천장으로 확대하고, 2002년 말까지 이를 4만장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공장 가동 초기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동부는 아남반도체 인수로 리스크가 큰 반도체 산업에 완전히 발을 들여놓았다. 아남반도체 인수는 하나의 돌파구임에 틀림없지만, 어려움이 닥쳐도 외환위기 때처럼 반도체 사업에서 쉽게 물러날 수 없다. 그룹 전체의 흥망이 반도체 사업에 달린 셈이다. 동부는 이전보다 큰, 또 하나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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