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자의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배상 가능…7월1일부터 시행된 제조물책임법은 무엇인가
제일제당은 지난달 초부터 무려 3천여개에 이르는 제품마다 사용설명서를 일일이 바꾸고 있다. 캔 장조림 제품의 경고 스티커는 ‘개봉시 절단 부분에 손이 닿지 않도록 하시오’에서 ‘절단 부분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고쳤다. 포장김치에는 ‘새우젓을 넣었습니다’라는 문구를 새로 집어넣었다. 새우젓 알레르기가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소비자들한테 알리는 것이다. 애완견 사료의 포장지에 붙은 ‘보관상 주의사항’에는 ‘어린아이들이 먹지 않게 주의하시오’가 새로 들어갔고, 김치 제품표시도 ’냉장보관하라’는 밋밋한 표현을 ‘1도에서 10도로 보관하라’로 구체화했다. 제일제당 PL사무국 고규석 상무는 “제조물책임법이 시행되면서 표기상 오해의 소지가 있고 소비자들이 잘못 다룰 수 있는 부분을 대대적으로 바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제조업체들 비상
7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제조물책임(PL·Product Liability)법은 소비자가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신체·재산상 피해를 입었을 때 제조업자의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한 제도다. 지금까지는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제품 결함 및 기업 쪽의 고의·과실까지 입증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결함으로 피해가 있었다는 것만 입증하면 된다. 갑자기 세탁기에서 불이 나 하마터면 집을 다 태울 뻔했더라도 제품 결함이나 제조업자의 고의·과실을 가정주부가 무슨 수로 입증할 것인가. 그런 만큼 이번 PL법 시행은 소비자 주권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거꾸로 제조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PL법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커버하기 위해 저마다 PL 관련 보험을 들고 있다. 보험가입은 가장 손쉬운 대책이지만 보험만으로 PL법을 비켜갈 순 없다. 제일제당이 제품 사용설명서를 바꾸는 건 이 때문이다. 정유업계 역시 ‘주유소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마세요’란 문구가 삽입된 스티커를 주유기 등에 붙이고 있다. 휴대폰의 불량 배터리에서 불꽃이 튀어 기름에 옮겨붙는 사례가 간혹 일어나기 때문이다. PL법에 따르면 제품 자체의 결함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사용상 부주의에 따른 사고도 ‘취급상 주의사항’에 명시돼 있지 않으면 제조업자의 책임이 된다. 업계에서는 PL법 시행으로 ‘제품 사고는 곧 제조자 책임’으로 인식돼 소비자들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95년 PL법이 도입된 일본에서는 그동안 침묵하던 소비자들이 저마다 소송에 나서면서 소송건수가 한해 1천건을 넘었다. 따라서 결함 있는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가 거액의 집단소송에 휘말리는 기업은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지난 82년 석면 질환과 관련해 오랜 소송에 시달리던 세계 최대의 석면제조업체인 미국 맨빌사는 배상금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는데, 지금도 소송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이미지의 추락까지 겹쳐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업이 속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PL법이 기업을 망하게 하는 법도 아닌데 우리 기업들은 무작정 겁부터 집어먹고 있고,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입했다가 사고가 나면 무조건 거액을 배상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도 하다. PL법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PL법이 적용되는 대상은 제조물이다. 제조물은 제조·가공된 제품으로 공산품(완제품, 부품, 원재료)을 뜻한다. 부동산·농수산물 등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부동산화된 동산, 예컨대 전기시설, 엘리베이터, 건축자재 등은 PL법이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자체는 형체가 없으므로 PL법에서 제외되지만, 소프트웨어가 디스크 등에 설치돼 함께 사용될 때는 제조물책임의 대상이다. 제조업자가 과실 없었다는 사실 입증해야
그렇다면 PL법에서 말하는 ‘결함’이란 무엇을 뜻할까. PL법은 ‘통상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안전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함을 규정하고 있다. 결함은 △제품개발 단계에서의 설계상 결함 △제조과정에서 발생한 결함 △제품사용에 대한 안내 및 경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표시상의 결함으로 나뉜다. 산업자원부 유통서비스정보과는 “멀쩡하게 잘 쓰다가 느닷없이 문제가 생기는 등 상식적 수준의 안전성이 없다면 결함으로 인정된다”며 “물론 소비자가 오작동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경우라야 한다”고 말했다. 휴대폰을 사용하다가 귀가 멍멍해지면 전자파에 의한 결함으로 보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사막 한가운데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것을 결함으로 볼 수는 없다.
PL법의 핵심은 결함의 ‘입증책임’이다. 물론 소비자가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제조물의 결함으로 손해가 발생했다는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입증책임은 소송을 제기한 소비자에게 있다. PL법은 소비자의 입증 부담을 덜어준 것일 뿐 아예 없앤 것은 아니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제품을 잘못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만 입증하면 된다. 대신 제조업자는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 또는 ‘소비자가 잘못 다뤄서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배상책임을 면한다. 물건을 만들고 파는 기업의 책임을 강화한 것이다. 따라서 결함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기업은 재판절차까지 가기 전에 소비자와 합의를 보려 할 것이고, 그만큼 소비자로서는 분쟁해결이 쉬워지는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배영일 수석연구원은 “PL법 이전에는 기업이 제품결함을 최대한 쉬쉬하다가 최후에 리콜을 실시했지만 앞으로는 결함 은폐가 불가능해져 기업 스스로 판단해 자발적으로 리콜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배상책임은 제조업자에게 있는데, OEM(주문자상표생산) 업체도 브랜드 업체와 마찬가지로 배상책임을 진다. 제조업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공급자 또는 판매자가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유통업자는 자신이 파는 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제조원을 모른 채 불량 수입품을 팔았다가는 수입업자가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한국PL법연구원 최병록 원장은 “판매자가 책임을 면하려면 공급자 또는 제조자를 소비자한테 알려줘야 하는데, 정식 루트를 통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제품을 판 경우 판매자가 배상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의 PL법은 미국과 달리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몇명이 대표소송을 제기해 이기면 다른 모든 피해자들도 다같이 배상을 받는 제도다. 한국PL법연구원 최병록 원장은 “우리나라의 PL법은 집단소송제가 아니어서 누가 특정 제품을 쓰다 피해를 입어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경우, 동일 제품을 사용하던 피해자라도 개별적으로 따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나도 그 제품으로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자신도 소송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제품 결함으로 인해 실제로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사건마다 구체적인 정황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거액의 배상금 받는다는 환상 버려야
손해배상은 실제로 일어난 재산상, 정신적 손해를 보상해주는 전보적 배상과 결함을 알면서도 “사고가 터지면 배상하지 뭐” 하는 식으로 은폐할 때 물리는 징벌적 배상이 있다. 미국에서 몇몇 기업들이 PL법으로 쓰러진 건 거액의 징벌적 배상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PL법은 징벌적 배상을 채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비자들이 PL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거액의 배상금을 받기는 어렵다. 배상을 받더라도 사용상의 소비자 과실이 일부 있었다면 이 부분이 감안돼 배상액이 정해진다. 물론 소송에서 소비자가 기업한테 지면 당연히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야 한다.
제조업자라고 무한책임을 지는 건 아니다. PL법은 기업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다. △제품을 만들 당시의 기술 수준의 한계로 인해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거나 결함이 불가피한 경우 △제조 당시의 관련 법을 그대로 따르다가 어쩔 수 없이 결함이 발생한 경우 제조업자는 배상책임을 면한다. 또 7월1일 이전에 출시된 제조물은 새로운 PL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법정 소송으로 가기 전에 업종별 PL상담센터(표 참조)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PL상담센터는 소비자 및 업종별 단체, 학계, 법조계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분쟁해결기구로, 소비자와 제조업자의 중간에 끼어들어 화해를 알선·조정한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PL상담센터 안에 설치된 분쟁조정위원회에서 합의를 시도하는데, 한쪽이라도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법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PL법 시행에 따라 SK(주)의 한 주유소에서 '사용중 주의사항'을 새로써서 붙이고 있다. (이용호 기자)
거꾸로 제조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PL법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커버하기 위해 저마다 PL 관련 보험을 들고 있다. 보험가입은 가장 손쉬운 대책이지만 보험만으로 PL법을 비켜갈 순 없다. 제일제당이 제품 사용설명서를 바꾸는 건 이 때문이다. 정유업계 역시 ‘주유소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마세요’란 문구가 삽입된 스티커를 주유기 등에 붙이고 있다. 휴대폰의 불량 배터리에서 불꽃이 튀어 기름에 옮겨붙는 사례가 간혹 일어나기 때문이다. PL법에 따르면 제품 자체의 결함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사용상 부주의에 따른 사고도 ‘취급상 주의사항’에 명시돼 있지 않으면 제조업자의 책임이 된다. 업계에서는 PL법 시행으로 ‘제품 사고는 곧 제조자 책임’으로 인식돼 소비자들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95년 PL법이 도입된 일본에서는 그동안 침묵하던 소비자들이 저마다 소송에 나서면서 소송건수가 한해 1천건을 넘었다. 따라서 결함 있는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가 거액의 집단소송에 휘말리는 기업은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지난 82년 석면 질환과 관련해 오랜 소송에 시달리던 세계 최대의 석면제조업체인 미국 맨빌사는 배상금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는데, 지금도 소송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브랜드 이미지의 추락까지 겹쳐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업이 속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PL법이 기업을 망하게 하는 법도 아닌데 우리 기업들은 무작정 겁부터 집어먹고 있고,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입했다가 사고가 나면 무조건 거액을 배상받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도 하다. PL법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PL법이 적용되는 대상은 제조물이다. 제조물은 제조·가공된 제품으로 공산품(완제품, 부품, 원재료)을 뜻한다. 부동산·농수산물 등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부동산화된 동산, 예컨대 전기시설, 엘리베이터, 건축자재 등은 PL법이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 자체는 형체가 없으므로 PL법에서 제외되지만, 소프트웨어가 디스크 등에 설치돼 함께 사용될 때는 제조물책임의 대상이다. 제조업자가 과실 없었다는 사실 입증해야

사진/ 소비자들은 법정소송으로 가기 전에 PL상담센터를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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