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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의 체력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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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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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뒤 숨죽였던 제계가 목소리 높이며 전경련이 다시 사령부로 떠올라

사진/ 6월19일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열린 주요 대기업 회장과의 오찬에 앞서 이건희 삼성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박삼구 아시아나항공 부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왼쪽부터) 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전국이 월드컵 열기에 휩싸인 지난 6월19일 낮 김대중 대통령은 주요 재벌기업의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의 만남은 99년 8월 2차 정·재계 간담회 이후 2년10개월 만의 일이다. 청와대는 이날 간담회에 대해 “월드컵 폐막 뒤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방안을 논의한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가 이번 간담회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르다. 지난 99년의 만남이 정부가 재벌들한테 개혁을 압박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간담회는 ‘개혁’이란 짐을 정부 스스로 털어준 상징적인 자리였다는 것이다.

올 들어 재계의 움직임은 ‘거침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해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파탄의 주범’으로 지탄받으며 숨죽여 지내던 재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중심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재계의 사령부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전경련은 회장을 맡았던 김우중씨의 대우그룹이 99년 파산하는 등 상당수 회원사가 부도를 낸 뒤, 한동안 방향을 잃고 표류해왔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회장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김우중씨의 잔여임기만 채우겠다던 김각중 회장이 회장직을 다시 맡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정부, 재계 규제완화 요구 대폭 수용


5대 그룹 회장들의 적극적인 전경련 모임 참석은 전경련이 재계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5월9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회장단 회의에는 이건희(삼성), 정몽구(현대차), 손길승(SK) 회장 등 13명의 대기업 총수가 참석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주요 기업 총수는 전혀 참석하지 않은 맥빠진 모임이 되곤 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청와대 간담회에 앞서 지난 6월15일 열린 회장단 골프모임에도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은 불참했지만, 회장단 14명이 참석해 재계의 단합을 과시했다.

재벌 총수들의 활발한 모임에는 재계가 정부나 정치권에 더 이상 밀릴 게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재계는 경기침체의 골이 깊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의 재벌정책에 거센 반격을 가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돌격대는 전경련과 주요 대기업이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자유기업원. 민병균 자유기업원 원장은 지난해 5월6일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시장경제와 그 적들’이란 제목의 이메일에서 “정부는 참여연대·전교조·민노총 등과 합세해 한국 사회를 국정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며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하지 못하게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이 정부의 재벌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재계는 더욱 힘을 얻었고, 정부는 결국 재계의 규제완화 요구를 대폭 받아들였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사실상 폐지하고, 재벌 금융사들의 계열사 의결권 제한도 상당부분 풀었다.

전경련은 올 들어 공세를 정치권 전반으로 확대했다. 전경련은 2월22일 정기총회에서 앞으로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경련의 선언에 이어 3월4일 조남홍 경총 부회장은 “경제5단체 산하에 대선평가위원회를 두고 공약을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며칠 뒤 “(공약평가는) 기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발을 뺐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당 안의 ‘재벌개혁 지속론’을 고사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유기업원이 돌격대라면 한국경제연구원은 전경련의 싱크탱크다. 한경연은 지난 4월과 5월 2차례에 나눠 발표한 ‘차기정부 정책과제’ 보고서를 통해 정치권에 재계의 요구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혔다. 한경연은 보고서에서 “기업들의 분식회계는 불법 정치자금 제공 때문에 생긴 불가피한 일이었다”며 분식회계 기업에 대해 일괄사면을 요구했다. 또 경제력 집중 억제에 초점을 맞춘 공정거래법을 경쟁촉진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초에는 법인세율의 단계적 인하를 비롯해 69건의 세제개혁안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전경련의 이런 움직임은 지난 2000년 대한상공회의소와 벌인 ‘재계 맏형’ 논쟁을 무색하게 한다. 당시 박용성 회장은 상의 회장에 취임하면서 “상의가 재계단체의 맏형”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전경련과 사사건건 자존심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그런 논쟁을 우스꽝스런 것으로 만들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상의는 상공인이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법정단체 아니냐”고 말했다. 당시의 일을 해프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를 놓고 한때 경총과 논란을 빚으면서 일었던 경제단체 통합론에 대해서도 전경련은 “일본과 달리 아직 노사관계가 중요한 우리나라에서는 경총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며 통합론을 일축했다.

재별개혁은 멀리 멀리…

사진/ 5대 그룹 회장들의 적극적인 전경련 모임 참석은 전경련이 재계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95년에 열린 회장단 골프모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사실 전경련의 영향력은 애초 다른 경제단체와 비교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회원 수는 적지만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주요 재벌그룹이 중심이 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집력이었다. 전경련 관계자는 “그동안은 대기업들이 경제위기의 책임자로 지탄받아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어려웠고, 또 구조조정 과정에서 서로 이해가 엇갈린 경우도 있어 목소리를 합치기가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실제로 KT 지분 인수 과정에서 빚어진 삼성과 SK 간의 서먹한 관계를 빼면 재벌 간에 이해가 엇갈리는 사안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9월에 열릴 예정인 다음 회장단 회의에도 재벌 총수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벌써부터 점쳐지고 있다. 전경련은 7월24일부터 나흘 동안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하계 세미나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초청했다. 이미 전경련이 대기업 정책에 대한 요구를 밝힌 만큼 대통령 후보들로서는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다. 재계 관계자는 “역대 정부는 정권 초기에 대기업을 개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해왔다”며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경련으로 다시 힘이 쏠리는 현상에 대해 정부의 재벌개혁에 기대를 걸었던 시민단체들의 우려도 점차 커지고 있다. 재벌의 막강한 힘을 감안할 때 그동안의 개혁조처 또한 모두 무력화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5대 재벌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아는 여야 정치권도 전경련을 중심으로 재계가 다시 뭉치는 현실을 마냥 반기지만은 않는 분위기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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