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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붉으면 불티나게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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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6-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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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맞아 ‘레드 마케팅’ 재미 쏠쏠…의류, 잡화, 가구에까지 부는 붉은 바람

사진/ 업계는 '레드마케팅'이 반짝특수에 그칠 것으로 본다. 백화점에 내걸린 붉은색 티셔츠. (이용호 기자)
이번 월드컵 최대 히트상품은 역시 붉은악마다. 더 상업적으로 말하자면 붉은색 티셔츠다. 이른바 ‘레드 열풍’은 ‘비 더 레즈’(Be The Reds)라고 쓰인 붉은악마 응원 티셔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저 붉은색이면 붉은악마의 티셔츠로 통한다.

온통 붉은 옷을 입고 경기장과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는 광경을 보고 세계가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붉은 티셔츠의 물결에 가장 놀란 곳은 티셔츠 업계다. 폭발적인 붉은색 티셔츠 판매량이 이를 말해준다. 응원 티셔츠는 그동안 한국대표팀 공식 유니폼 스폰서 업체인 나이키스포츠코리아가 15만장, 국제축구연맹(FIFA)의 월드컵 라이선스 사업권업체인 코오롱TNS월드가 4만여장을 팔았다. 그러나 이런 공식 라이선스업체들의 물량은 ‘레드 마케팅’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업계는 붉은악마 응원 티셔츠를 비롯해 붉은색 계통의 티셔츠가 전국적으로 5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한다. 각종 스포츠 의류 브랜드와 흔히 ‘짜가’로 불리는 값싼 복제품 티셔츠를 포함한 것이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색은 아니지만


레드 열풍을 타고 흰색으로 내놓은 티셔츠를 부랴부랴 붉은색으로 교체하는 곳도 있다. 대한축구협회 라이선스 브랜드를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납품하는 서호트레이딩은 흰색 티셔츠 5만여장을 붉은색으로 다시 염색하고 있다. 서호트레이딩 쪽은 “원래 흰색·붉은색 등 여러 색깔로 제작했는데 프랑스와의 평가전 때부터 붉은색 주문이 밀려들더니 이제는 아예 붉은색이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며 “물량이 달려 흰색 유니폼을 붉은색으로 다시 염색처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오롱TNS월드도 붉은색 물량 확보에 애먹기는 마찬가지다. 이 회사의 정경태 과장은 “월드컵 티셔츠로 12가지 색상을 내놓았는데 다른 색깔은 외국인들이 기념품 정도로 사가는 정도”라며 “수요가 폭발한 붉은색 셔츠 3만여장을 서둘러 추가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만드는 거성어패럴은 월드컵 특수 덕을 두배로 보고 있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주문받은 것은 아니지만, 붉은악마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이후 미국의 한 바이어로부터 50만장의 티셔츠 납품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사진/ 브랜드 이미지를 붉은색으로 바꾼 푸마는 월드컵 문구 없이도 로고티 특수를 누리고 있다.
‘레드 열풍’을 가장 많이 타는 곳은 역시 백화점의 스포츠캐주얼 매장이다. 매장에 붉은 옷을 입은 판매사원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붉은색 상품을 매장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쪽은 “의류뿐만 아니라 핸드백·모자·선글라스 등 잡화 매장에서도 빨간색을 찾는 손님이 늘고 있다”며 “들여놓으면 금방 바닥나버리는 붉은색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고 전했다. 티셔츠는 물론 운동화, 두건 그리고 여성 블라우스나 원피스까지도 붉은색 계통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푸른색이었던 브랜드 이미지를 2년 전에 붉은색으로 바꾼 스포츠브랜드 푸마는 티셔츠에 월드컵 문구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데도 붉은색 매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푸마 쪽은 “한국팀 경기가 열린 날이면 푸마 명동점, 동대문점 등 각 매장에서 하루에 붉은색 로고티가 800여만원어치씩 팔렸다”며 “평소보다 10배 이상 매출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보루네오가구는 가을 신제품의 특징을 아예 ‘레드 트렌드’(Red Trend)로 정했다. 이에 따라 고광택 재질의 붉은색 ‘하이그로시’(High Grossy) 가구를 다음달에 업계 처음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보루네오가구 디자인연구소 손영미씨는 “지난해부터 세계적으로 강렬한 붉은색 계통의 ‘차이니즈 레드’(Chinese red)가 주목받고 있다”며 “그동안 주춤하던 붉은색 기운이 도는 체리목 톤이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뜰 것 같다”고 내다봤다.

이는 모두 월드컵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월드컵을 제쳐두고 볼 때 붉은색은 소비자들한테 과연 어필하는 색상일까. 대다수 기업체 디자인 전문가들은 상품에 붉은색을 입히는 것을 일종의 ‘모험’으로 여긴다. 붉은색이란 게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쉽게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LG전자 디자인연구소 김태경 연구원은 “빨간색은 포인트를 줘 시선을 끄는 데 쓰이는 컬러”라며 “붉은색 열풍은 붉은악마 티셔츠에만 해당될 뿐 일반적인 트렌드는 아니다”고 말했다. 강하고 정열적인 느낌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좋지만 일반적으로 소비자에게 매력을 주는 색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집안에서 매일 봐야 하는 가전제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과거에 붉은 코끼리 밥솥이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는 아이보리색으로 바뀌는 추세다. 전자레인지도 점차 붉은색이 퇴조하고 있다.

상품의 색깔을 고민하는 기업체 디자인실 관계자들은 붉은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는 색”으로 친다. 붉은색에 정열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너무 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찮다는 것이다. 기업들마다 상품에 쓰더라도 원색의 붉은 빛깔보다는 깊이감이 있는 흑장미색이나 체리색 계통의 엷은 붉은색을 쓰는 건 이 때문이다.

업계 “월드컵 지나면 열풍 꺽일 것”

삼성전자도 휴대폰·청소기·전화기·전기밥솥 등에 붉은 계열의 색상을 내놓고 있지만 파스텔톤풍의 레드, 핑크빛이 도는 트로피컬 레드 등 변형된 붉은색을 적용하고 있다. 강렬한 원색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다. 삼성전자 쪽은 “가전제품의 붉은색은 금방 질리기 때문에 다소 죽인 색깔을 쓴다”며 “붉은악마가 아무리 뜨고 인기를 끌어도 가전제품은 붉은색을 쓰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단기매출을 지향하는 티셔츠 같은 소비재와 달리 가전제품 같은 내구재에 붉은색을 쓰면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레드 열풍에도 불구하고 붉은 색상은 휴대폰처럼 유행에 민감하고 교체주기가 빠른 제품에만 제한적으로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물론 월드컵 열풍이 상품 색깔의 ‘레드 콤플렉스’를 다소 완화시킨데다 한국팀의 16강 진출로 붉은색 마케팅이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색이 발랄한 자기 표현이자 찌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색깔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게다가 붉은악마가 단순한 서포터스를 넘어 자발적인 변화의 주체로 계속 주목받는다면 월드컵 이후에도 ‘붉은색 신드롬’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업계는 상품에 붉은색을 넣는 ‘레드 마케팅’은 반짝 특수에 그치고, 월드컵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붉은색 열풍이 꺾일 것으로 보고 있다. ‘푸마’ 디자인실 정수진 팀장은 “월드컵 이후 가을 시즌이 되면 붉은색 열기는 수그러들 것”이라며 “계절로 보더라도 레드 컬러는 여름철에 어울리지, 가을과 붉은 컬러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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