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약재 첨가한 약주시장 급성장…정통 희석식 소주도 건강 지향성 소주에 위협당해
지난 한해 우리나라 술 소비량은 306만kl. 20살 이상 성인 한 사람이 맥주(500ml들이 기준) 119병, 소주(360ml) 79병, 위스키(500ml) 1.4병을 마셨다. 물처럼 ‘들이켜는’ 수준이다. 지난해 360kl가 팔린 약주·청주는 한 사람이 4.6병을 비웠다.
양적 증가 못지않게 눈에 띄는 건 약주·청주의 뚜렷한 약진이다. 지난해 약주·청주 소비량은 5만6천kl로 98년(4만kl)보다 40% 늘었다. 전체 술소비 증가율(20%)을 훨씬 웃돈다. 약주만 보면 가히 폭발적이다. 백세주 등의 소비가 크게 늘면서 2001년 약주소비시장(3만2천kl)이 4년 새 10배나 커진 것이다. 이런 약주시장의 급팽창 뒤에 깔려 있는 게 술의 ‘건강 지향성’이다.
도수 낮추기에서 ‘기능성’으로
약주시장이 급성장하자 정통 희석식 소주만 고집하던 소주업계도 ‘건강’을 고려한 술을 속속 내놓고 있다. 두산음료BG가 지난달에 새로 내놓은 ‘자연산송이’가 대표적이다. 소주에 녹차잎 성분을 넣은 ‘산’을 내놓아 “소주냐 아니냐”는 논란을 일으킨 두산이 이번에 다시 산송이 술로 주류업계에 건강 트렌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알코올 18도인 자연산송이는 소주가 아닌 일반 증류주(정통 희석식 소주와 달리 약재나 감미료 등을 첨가한 소주)다. 두산은 “자연산송이는 소주 특유의 깨끗한 맛과 약주·매실주의 건강개념을 합쳐 탄생한 건강 지향적 고품격 술”이란 점을 내세우고 있다. 콜레스테롤을 저하시켜 고혈압·동맥경화를 예방하고 항암효과도 탁월한 자연송이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소주(알코올 22∼23도)는 독해 부담스럽고, 약주·매실주(13∼14도)는 너무 약해 술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비자층을 겨냥하고 있다.
보해양조도 건강 지향성 소주에 뛰어들었다. 지난 2월 야심작으로 내놓은 ‘잎새주’를 앞세워 수도권 시장공략에 나선 것이다. 잎새주는 단풍나무 수액과 아스파라긴산이 첨가된 기능성 소주다. 보해양조는 “단풍나무 수액은 노폐물을 제거하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잎새주는 알코올 22도짜리로, 약주가 아닌 일반 소주에까지 부는 ‘건강 바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건강 지향성 술의 등장과 성장은 소주시장의 빠른 교체와 맞물려 있다. 소주시장은 ‘순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대표되는 알코올 저도주로 재편된 지 이미 오래다. 알코올 35도짜리가 있던 소주시장은 자꾸 알코올 도수가 내려간 끝에 이제 22도주가 완전 정착됐다. 업계에서는 더 이상 내려가기 힘든 지점까지 알코올 도수가 떨어진 것으로 본다. 더 내려가면 “술맛이 안 난다”는 불만이 터져나올 거란 얘기다.
이에 따라 소주업계의 치열한 경쟁은 알코올 도수에서 이제 기능성 술로 옮겨붙었다. 사실 술에 건강을 접목하는 현상은 소주업계의 ‘물싸움’에서 이미 시작됐다. 너나 할 것 없이 “지하 수백m에서 뽑아올린, 미네랄이 풍부한 천연 암반수로 빚었다”고 열띤 광고전을 펴온 것이다. 소주의 세대교체 역사를 보면 ‘마시면 취하는 술’은 이미 옛말이 됐다. 무겁고 텁텁한 맛을 털어낸 깔끔한 술로 바뀐 데 이어, 이제 몸에 좋은 약재를 술에 넣는 새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술에 부는 건강 트렌드는 소주업계의 전반적인 침체와 무관하지 않다. 올 들어 소주업계 판매량은 2월에 665만 상자가 팔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7%, 3월 -5.8%, 4월 -3.5%를 기록하는 등 전례없는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경기가 풀리면서 양주 등 고급주로 수요가 쏠리고, 여름철이 이어져 소주 소비량은 더욱 줄었다”고 말했다. 소주 같은 독주(毒酒)는 날씨가 더운 여름철이 되면 매출이 크게 꺾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강을 내세워 소주를 ‘변신’시키는 현상은 소주시장 침체와 여름철 비수기를 돌파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송이술 나오자 소주회사마다 긴장
정통 소주가 내리막길로 치달으면서 빈자리에 대신 들어서는 게 소주에 다양한 약재 성분을 넣은 일반 증류주와 과실주다. 지난 2월 희석식 소주 출고량은 6만1천kl로 1년 전(7만4천kl)에 견줘 크게 줄어든 반면 일반 증류주는 올 1, 2월에만 2877kl가 팔려 330%, 과실주(1, 2월 판매량 1763kl)는 130%가 늘었다.
술과 건강이 가장 먼저 만난 건 아무래도 약주다. 술시장에서 돌풍을 몰고 온 국순당의 ‘백세주’가 대표주자다. 국순당의 백세주 전략은 ‘약으로 쓰는 술’. 자양·강장과 더불어 당뇨병·해열 등에 좋고 눈을 맑게 해주는 10가지 한약재를 썼다는 것이다. (주)진로의 ‘천국’도 몸에 좋은 14가지 약초를 달여 빚은 약초술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진로는 “천국에 쓴 국화수는 불로장생의 으뜸으로 치는 것으로, 얼굴빛을 좋게 해주고 어지럼증·풍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약주와 정통 소주시장의 틈새를 노린 두산이 이번에 송이술로 치고 나가자 소주회사마다 눈치보기에 들어갔다. 진로는 “두산의 산송이 술이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그러나 우리도 정통 소주 하나만으로 갈 수는 없으므로 트렌드 변화에 맞춘 새 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로가 월드컵에 맞춰 선보인 ‘JINRO for 2002’는 비록 3만7천병만 한정 생산했지만, 이른바 ‘건강 술’의 시장을 떠본 성격이 짙다. 진로 쪽은 “6년 뿌리 홍삼을 넣은 이 제품은 요즘 술시장에 부는 건강 개념을 적극 반영한 것”이라며 “시장에서 어필할 수 있는지 테스트할 기회도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로는 ‘참이슬’이 여전히 소주시장에서 독주하는 만큼 섣불리 새 상품을 내놓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보해양조뿐 아니라 지방을 본거지로 한 소주업체들도 건강 바람을 타기는 마찬가지다. 금복주는 알코올을 빨리 분해해 숙취 해소에 좋다는 아스파라긴을 강화해 기존 ‘참소주’를 업그레이드했다. 콩나물 뿌리에 든 아스파라긴 성분을 2배 더 높인 것이다. ‘화랑’이 대표상품인 경주법주는 “화랑은 위장에 좋은 찹쌀 100%로 빚은 술”이란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무학은 “우리 쌀 100%를 써 숙취가 일찍 풀린다”는 ‘화이트소주 2002’를 지난달에 새로 내놓았다.
매실주 역시 건강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술이다. 매실은 피로 회복, 노화 방지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산의 ‘설중매’와 보해의 ‘매취순’이 나눠 갖는 형국인 매실주시장은 지난해 2천억원 수준에 이르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그동안 매실주시장을 나름대로 공략해온 무학도 건강 바람을 타고 ‘청매화’, ‘매실마을골드’ 등 프리미엄급 매실주를 잇따라 내놓았다.
‘약소주’ 돌풍 일으킬까
물론 술은 어디까지나 술이지 결코 ‘약’이 될 수 없다. <동의보감>에는 “술은 성질이 열(熱)하고 맛이 쓰고 달며 독이 있으니 약세(藥勢)를 행한다”고 쓰여 있다. 술기운을 이용해 약세 즉, 약기운을 잘 돌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약기운을 돌게 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건강을 챙기는(?) 술의 등장은 일종의 모험이다.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다는 보고서도 있지만 술이 건강을 해친다는 건 상식이기 때문이다. 주류공업협회는 “소주에 약재를 넣은, 건강을 고려한 술은 아직 출시 초기라 시장에서 자리잡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며 “아직은 정통 소주가 그래도 대중주”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산이 내놓은 자연산송이술과 비슷한 송이술을 롯데칠성음료에서 지난해 슬쩍 내놓았다가 신통찮은 반응에 물러선 전례가 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술의 기능성과 건강을 강조하다가 자칫 약처럼 변해버리면 약을 먹지 누가 술을 먹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건강 지향성 술이 김치냉장고 돌풍을 따르지 말란 법도 없다. 애초 LG전자에서 처음 내놓았다가 별 호응을 못 받고 쑥 들어간 김치냉장고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듯이 건강 트렌드를 접목한 술이 소주시장을 뒤흔들 수도 있다. 술시장이 지각변동에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롯데칠성음료에서 내놓은 ‘하이주’(주류)의 경우 이름만 들으면 술인지 음료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술의 영역 파괴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콜라에 알코올이 들어간 ‘콜라 칵테일’도 곧 나오는 세상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소주업계의 치열한 경쟁이 알코올 저도주에서 기능성 술로 옮겨붙고 있다. (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