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입김에 흔들리는 금융통화위원회 인사에 반발, 제2의 독립운동 펼치는 한국은행
한국은행 직원들은 서글픈 비유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과거 정부에 종속돼 있던 한국은행의 처지를 빗대어 쓰던 말, “재정경제부 남대문 출장소.” 통화정책에 대한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재정경제부의 영향력 아래로 다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재경부는 지난 5월22일 강영주 금통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선임되어 자리가 빈 금통위원 자리에 이근경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전 재경부 차관보)을 추천했다. 애초 재경부 몫인 추천권을 행사한 것이므로 절차상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로써 금통위원 6명 중 3명이 경제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재경부가 파격적으로 한은 출신 인사를 추천할지도 모른다고 잔뜩 기대한 한은 직원들은 허탈감을 넘어 분노를 터뜨렸다.
형식적 장치들은 마련돼 있으나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한은의 반발은 “올 들어 금통위원 6명 중 4명이나 바뀌는 상황에서 한은 출신이 한명도 금통위원으로 선임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은 출신 금통위원은 한은 총재가 추천한 김원태 위원 한명이다. 지난 1월29일 개각에서 장승우 금통위원이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2명의 위원이 임기가 만료되면서 한은 쪽은 후임인사에 잔뜩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물거품이 됐다. 4월 들어 강영주 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선임되자 박승 한은 총재는 추천권이 있는 재경부에 “이번에는 배려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경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이근영 카드는 박 총재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한은 쪽의 반발을 단순히 제 밥그릇 챙기기로 볼 수만은 없다. 인사가 금통위의 독립성 유지라는 취지를 훼손해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본관 로비 벽에 커다란 글씨로 새겨진 ‘물가안정’이란 글귀는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을 표현한 것이다. 물가안정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경제생활이 안정될 수 없으며,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이나 정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물가를 희생시키려는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므로 통화정책의 결정과정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원의 임명이 그 취지대로 이뤄져야 한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은 어느 정도 마련돼 있다. 지난 97년 재경부와 한은 간에 극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98년 한은법이 개정되면서 그 전에는 재경부 장관(옛 재경원 장관)이 맡던 금통위원장이 한은 총재에게 넘어갔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교체하던 한은 총재의 4년 임기도 보장되었다. 금통위원도 상근직이 됐다. 문제는 금통위원 선임과정에 있다. 금통위는 위원장인 한은 총재와 6명의 상근위원이 참여해 합의제로 의사결정을 한다. 위원은 한은 총재, 재경부, 금융감독위원회, 증권업협회, 은행연합회, 상공회의소에서 1명씩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는 정책당국과 중앙은행, 금융시장, 기업현장 등 각계의 전문가들을 두루 포진시킨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추천권이 있는 민간단체들이 재경부의 영향력 아래 있어 이들이 실질적인 추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19일 김대중 대통령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임명된 장승우 위원과 임기만료된 2명의 위원 후임으로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상공회의소 추천), 최운열 서강대 교수(증권업협회 추천),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차관(은행연합회 추천) 등 3명을 신임 금통위원으로 내정했다. 그런데 김태동 위원에 대한 추천권을 행사한 상공회의소 쪽은 청와대가 새 금통위원을 발표하기 몇 시간 전에야 상의 추천인사가 김씨라는 점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적으로만 추천권이 있을 뿐 실제 추천권은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재경부 관료들의 인사적체 해소?
다른 민간단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증권업협회 관계자는 “최운열 위원을 증협에서 추천한 것은 맞지만, 미리 재경부와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안다”며 “재경부의 눈치를 안 보고 독자적으로 추천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예산처 차관을 지낸 김병일 위원의 경우 장승우 위원이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가면서 자리바꿈을 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법 개정 이후 1기 금통위 때는 2명에 지나지 않던 관료 출신 금통위원이 2기 때는 3명으로 늘어나더니 이번에는 한은 독립을 반대하는 학자까지 포함해 범경제관료가 5명으로 늘었다”고 비난했다. 금통위 인사를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현행 금통위원 추천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경제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지난 3월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0%가 “현행 추천제는 유지하되 잘못된 운영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은 노조는 3명의 신임 금통위원 임명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위원들의 출근일에 맞춰 출근거부 시위를 벌이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금통위원 인사 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명의 금통위원을 임명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지난 4월17일 강영주 위원이 임기를 2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에서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추천된 것이다. 재경부는 “거래소 이사장 추천은 이사장 추천위가 한 것으로 재경부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강 위원의 전직 또한 재경부 관료들의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한은은 이례적으로 전 직원의 이름으로 성명을 내어 “정부의 인사구도에 따라 금통위원이 임기에 관계없이 수시로 교체되는 상황에서는 중립적이고 일관성 있는 통화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재경부를 거세게 비난했다. 관가에서도 강 위원의 임기 도중 전직에 대해 비판적이다. 금통위원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상근직으로 바꾼 것은 통화정책의 중립성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것인데, 정부 스스로가 이런 법취지를 무색하게 했다는 것이다. 관료 출신의 한 금통위원은 “임기제도가 너무 딱딱하게 운영돼서도 안 되지만 이번 경우에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은 쪽은 사실상 재경부가 행사하는 민간단체 추천제도의 개선뿐 아니라, 재경부 차관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재경부 차관은 실제 금통위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지만, 법적으로는 회의에 ‘발언자’로 참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한은은 금통위 회의자료를 만들면 재경부에도 회의 이틀 전에 보내고 있다. 한은노조 관계자는 “재경부가 이 회의자료를 보고 재경부 장관 등이 발언을 통해 통화정책에 개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임 진념 부총리의 경우 재임시절 금통위 회의를 앞두고 여러 차례 금리관련 발언을 하기도 했다. 외국의 경우 경제관료가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경우는 없다. 경제관료가 통화정책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경부 차관 회의참석 막아라
박승 한은 총재는 지난 3월1일 취임 당시 “재경부에게 있는 한은 예산 승인권을 국회나 기획예산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경제장관간담회에는 회의 안건에 따라 참석 여부를 결정할 것이며, 중앙은행과 관련없는 회의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은의 독립성을 높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금통위원 인사는 박 총재나 한은 쪽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왔다.
한은 직원들은 이번 금통위원 인사파문을 계기로 ‘제2의 한은 독립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변성식 노조위원장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본격적인 싸움에 다시 나서겠다”며 “이근경 위원의 출근을 끝까지 저지하겠다”고 말했다. 낡은 싸움방식을 또다시 동원해야 하는 한은노조의 선택은 어쩌면 시대에 걸맞지 않은 한은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재경부가 금융통화위원으로 이근경 전 재경부 차관보를 임명하자 한은 직원들은 허탈감을 넘어 분노를 터뜨렸다. (김종수 기자)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한은의 반발은 “올 들어 금통위원 6명 중 4명이나 바뀌는 상황에서 한은 출신이 한명도 금통위원으로 선임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은 출신 금통위원은 한은 총재가 추천한 김원태 위원 한명이다. 지난 1월29일 개각에서 장승우 금통위원이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2명의 위원이 임기가 만료되면서 한은 쪽은 후임인사에 잔뜩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물거품이 됐다. 4월 들어 강영주 위원이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선임되자 박승 한은 총재는 추천권이 있는 재경부에 “이번에는 배려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경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이근영 카드는 박 총재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한은 쪽의 반발을 단순히 제 밥그릇 챙기기로 볼 수만은 없다. 인사가 금통위의 독립성 유지라는 취지를 훼손해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본관 로비 벽에 커다란 글씨로 새겨진 ‘물가안정’이란 글귀는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을 표현한 것이다. 물가안정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경제생활이 안정될 수 없으며,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이나 정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물가를 희생시키려는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므로 통화정책의 결정과정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통위원의 임명이 그 취지대로 이뤄져야 한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은 어느 정도 마련돼 있다. 지난 97년 재경부와 한은 간에 극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98년 한은법이 개정되면서 그 전에는 재경부 장관(옛 재경원 장관)이 맡던 금통위원장이 한은 총재에게 넘어갔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교체하던 한은 총재의 4년 임기도 보장되었다. 금통위원도 상근직이 됐다. 문제는 금통위원 선임과정에 있다. 금통위는 위원장인 한은 총재와 6명의 상근위원이 참여해 합의제로 의사결정을 한다. 위원은 한은 총재, 재경부, 금융감독위원회, 증권업협회, 은행연합회, 상공회의소에서 1명씩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는 정책당국과 중앙은행, 금융시장, 기업현장 등 각계의 전문가들을 두루 포진시킨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추천권이 있는 민간단체들이 재경부의 영향력 아래 있어 이들이 실질적인 추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19일 김대중 대통령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임명된 장승우 위원과 임기만료된 2명의 위원 후임으로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상공회의소 추천), 최운열 서강대 교수(증권업협회 추천),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차관(은행연합회 추천) 등 3명을 신임 금통위원으로 내정했다. 그런데 김태동 위원에 대한 추천권을 행사한 상공회의소 쪽은 청와대가 새 금통위원을 발표하기 몇 시간 전에야 상의 추천인사가 김씨라는 점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적으로만 추천권이 있을 뿐 실제 추천권은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재경부 관료들의 인사적체 해소?

사진/ 한국은행의 본관 로비에 걸려 있는 휘호.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 (윤운식 기자)

사진/ 지난 5월8일 한국은행 정문에서 한은 노조원들이 금융통화위원회 신임위원 3명의 출근을 막기 위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