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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민영화 좋아요, 아∼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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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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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밀어내고 KT 주식 확보한 SK…정부의 독점규제 가능할까

사진/ 유선이 없는 SK텔레콤은 각 사업부문에서 KT의 통신망의 도움을 받아왔다. SK텔레콤과 KTF의 판촉전. (한겨레 강창광 기자)
KT 정부지분(28.4%)에 대한 공모청약 마지막 날인 지난 5월18일 오후 SK텔레콤 본사 건물 18층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막판까지 삼성의 움직임에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숨을 죽이고 있던 경영전략실과 정책협력실엔 “삼성 특이동향 없음”이라는 외근 직원과 정보원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KT 민영화 과정 전반에 걸쳐 SK텔레콤 전략을 짜고 계획을 총지휘한 경영전략실 조신 상무와 정책협력실 조민래 상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두 부서를 총괄하는 최재원(최태원 SK그룹 회장 동생) 전무에게 ‘승전보’를 담은 보고가 올라가면서, KT 지분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성과 SK텔레콤의 치열한 전투는 SK텔레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삼성은 SK 전략 몰랐나

SK텔레콤은 청약 당일 전략적 주주에게 배정된 원주 5%를 모두 청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청약마감 10분 전에 기습적으로 서류를 제출했다. KT 민영화 과정에서 삼성 견제를 최우선 순위로 설정한 SK텔레콤에게 5% 전략은 이미 나와 있는 답이었다. 실마리는 다름 아닌 삼성이 제공해줬다. 마감 전날인 5월17일 삼성은 삼성생명과 삼성투신운용 두 계열사를 통한 1% 참여를 선언했다. 삼성으로선 이미 저울질을 해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금여력이 충분한 삼성전자는 지난 4월19일 투자설명회 자리에서 KT 지분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선언했고, 5월9일엔 삼성 이건희 회장이 “전략적 참여는 없다”고 분명히 밝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삼성전자나 비금융계열사가 참여하면 기업 총수가 며칠 만에 말을 뒤집었다는 비난을 듣게 되고, 투자자들에게도 거짓말을 한 꼴이 된다.


스스로 발을 묶은 삼성의 곤혹스러운 상황은 SK텔레콤이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삼성이 금융계열사만으로 청약을 들어오면 SK텔레콤으로선 고민이 말끔히 사라진다. 기관투자자로 분류되는 금융회사들은 일반투자자들에게 순위가 밀리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투자자 청약지분 합계가 5%만 돼도 금융회사들에겐 1주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청약 당일 5% 참여를 결정하고 나서도 보안을 유지한 채 마감시간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만에 하나 삼성에게 정보가 흘러나가 삼성이 전격적으로 비금융계열사를 동원할 경우 삼성 배제는 물건너가기 때문이었다. SK텔레콤의 삼성 배제전략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0일 교환사채(EB) 청약에서 SK텔레콤은 자신에게 배정된 모든 물량을 싹 쓸어담아 11.34%의 지분을 확보했다. 5% 청약 직후 이동통신업계의 공룡이 KT까지 노린다는 여론의 비난이 빗발치자, SK텔레콤은 KT 경영권엔 관심이 없다며 “최대지분이 SK텔레콤 지분(9.27%)을 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 약속을 이틀 만에 뒤집은 것이다.

SK텔레콤 고위 관계자는 “SK텔레콤이 교환사채 일부를 포기하면 삼성에게 몫이 돌아가기 때문에 이를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여론의 비난은 잠깐이지만 삼성 밀어내기는 SK텔레콤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는 것이다.

삼성은 SK텔레콤의 이런 전략을 몰랐을까? 현재로선 삼성이 SK텔레콤의 자금동원력을 과소평가했고 정부의 말을 너무 믿은 결과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한 투자분석가는 “삼성은 나름대로 정보망을 총동원해 SK텔레콤의 자금흐름을 예의 주시했고, 2조원에 가까운 현금을 끌어모으는 SK텔레콤의 ‘저의’를 몰랐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분석가는 “청약 마감 전날까지 ‘불참하겠다’는 역정보를 흘려 최대한 삼성을 헷갈리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SK텔레콤에게 삼성이 당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친김에 경영권 확보?

정부는 삼성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SK텔레콤이 1∼3% 정도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삼성 쪽에 계속 흘려줬다. 삼성은 정부 말만 믿고 교환사채를 포함해 3% 정도를 청약하면 다른 대기업과 적당히 지분을 나눠 갖게 돼 경영권을 노린다는 의혹을 희석시키며 KT 입성에 성공할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SK텔레콤은 왜 그렇게 삼성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을까? 이는 SK텔레콤이 경영전략실과 정책협력실을 중심으로 KT 민영화 대책반을 운영하면서 올해 초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내부문건에 잘 나타나 있다. SK텔레콤은 대외로비 지침서 성격의 이 문건에서 “삼성이 KT 경영권을 확보할 경우 삼성은 국내 전체 기업 시가총액의 30%를 차지해 ‘삼성공화국’이 될 것”이라며 “KT의 민영화 전제조건으로 KT 독점체제 해소와 재벌의 경영권 장악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적극 부각시킬 것”을 언급하고 있다.

SK텔레콤이 애초 가장 두려워한 대목은 KT가 부실덩어리인 공기업의 틀을 깨고 민영화해 효율적인 체제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KT는 이상철 사장 부임 이후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펼치면서 SK텔레콤의 ‘이동통신 황제’ 자리를 바짝 위협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산규모 30조원이 넘는 KT가 국내 최고의 경영능력과 자금을 갖춘 삼성과 결합하면 SK텔레콤은 말 그대로 언제 사업을 접게 될지 모를 일이다.

KT는 시내전화 시장의 97%, 시외전화 시장의 85%, 전용회선 시장의 68%를 틀어쥐고 있으며, 출발이 늦은 초고속인터넷시장도 단번에 1위 자리를 빼앗아 5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KT가 공기업으로서 그동안 정부의 각종 규제를 받으며 ‘손해’를 감당해오는 사이에 가장 큰 반사이익을 누려온 SK텔레콤에게 KT의 민영화는 바람막이를 상실하는 것 이상이었다. 유선이 없는 SK텔레콤은 각 사업부문에서 KT의 통신망의 도움을 받아왔다. SK텔레콤은 가입자망(전화국-가정)이 있는 KT망을 이용하는 대가로 해마다 엄청난 접속료를 지급하고 있다. 유·무선 복합서비스를 기초로 한 차세대이동통신이 열리면 유선망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SK텔레콤은 더구나 40∼50대 가입자 비중이 높아 미래 수익구조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다.

결국 SK텔레콤은 이번 청약 과정에서 삼성을 밀어내는 것은 물론 KT가 가지고 있는 SK텔레콤 지분 이상의 지분을 확보해 KT를 견제하면서도 긴밀한 ‘협조’까지 받을 수 있는 바탕을 구축했다. 또 지분을 가지고 있다가 내친김에 KT 경영권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유리한 고지까지 점령했다.

정관에 규제장치 마련해도 쓸모 없어

민영화 일정에 쫓겨 재벌기업들이 최대 15%까지 지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정부는 경제력 집중과 통신망 독점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시 SK텔레콤을 견제해야 할 처지가 됐다. SK텔레콤이 KT의 경영권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각종 방지장치를 정관에 마련한다지만 이 방안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은 정부도 잘 알고 있다. 정관이야 업체가 주총을 열어 바꾸면 그만이다.

정보통신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런 이유로 SK텔레콤이 인수한 KT 지분을 KT의 SK텔레콤 지분과 맞바꾸도록 압력을 넣고 있지만, SK텔레콤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삼성과 KT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참여했지만, KT 주인이 될 수 있는 마당에 SK텔레콤이 정부 말을 들을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정부 뜻에 따르더라도 전제조건으로 그에 상당하는 대가성 특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공은 이제 SK텔레콤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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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진 기자/한겨레 경제부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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