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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구씨와 허씨의 ‘나눠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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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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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몫 챙기기 급급한 LG 대주주 일가…본래 취지 퇴색한 지배구조 재편 작업

지난 4월 상장된 LG카드의 주주 구성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계열사를 제외한 구씨와 허씨 개인 대주주(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가 무려 73명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지분은 0.01%에서부터 4.26%(구본무)까지 천차만별이다. 친인척 가운데는 구본무 LG회장에 대적할 만한 2% 이상 지분을 가진 사람도 3명이나 된다. 상장에 따른 혜택을 대주주 일가에게 골고루 안배하기 위한 흔적을 쉽게 엿볼 수 있다. LG전자 역시 비슷하다. 지주회사와 분할되기 전인 지난해 말 주주 구성을 살펴보면 구씨와 허씨 개인 대주주가 88명으로 나타나 있다.

지주회사 설립은 지분 나누기 일뿐

LG는 이처럼 매우 독특한 회사다. 절대 지분을 갖고 있는 사주가 따로 없고 구씨와 허씨 수백명이 지분을 나눠 가진 것이다. LG전자와 LG카드뿐 아니다. 거의 모든 계열사의 지분 구조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증자할 때는 여간 복잡하지 않다. 개인 대주주들의 자금사정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계열사 간 거래관계도 복잡하다. 대주주 일가에 대한 안배, 그리고 대주주 개개인이 소유한 회사에 대한 안배가 그룹 경영의 최우선 고려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LG가 지배구조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그룹을 지주회사와 사업자회사 체제로 개편한다는 전제 아래 전자와 화학 부문의 지주회사를 각각 출범시킨 것이다. 내년 3월이면 두 회사가 통합된 단일 지주회사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국내 재벌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갖추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취지가 좋음에도 LG의 지배구조 재편과정은 투자자들에게서 외면을 받고 있다. 지주회사로의 재편과정이 구씨와 허씨 대주주들의 교묘한 자기 몫 챙기기에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소액주주를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전혀 공개되지 않은 채 밀실에서 진행되었다.

과연 LG그룹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대주주들끼리 이룬 내부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계열사들의 지분 변화를 통해 살펴보자.

지난 4월25일 LG화학은 자전거래(CT) 통해 구본무 회장 등 대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던 LG석유화학 지분 632만주를 주당 1만5천원에 사들이고 LG투자증권 지분 526만주를 매각했다. 이는 LG화학이 LG석유화학 상장 전인 1999년 6월 구회장과 구회장의 친인척들에게 1주당 5500원에 판 2744만주(70%) 가운데 일부다. 당시 국내외 기관투자가는 대주주에 대한 특혜라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LG화학의 이번 석유화학 지분 매입은 당시 거래가 대주주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결과적으로 입증해준 셈이다. 대주주들은 이번 거래로 600억원의 차익을 챙겼다. 구씨와 허씨 일가는 또 LG카드가 최근 상장되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렸다. 공모가 5만8천원인 LG카드 주식의 실제 취득값도 5천∼1만원에 지나지 않아 구씨 일가의 평가차익은 1조3천억원에 달하고 허씨 일가는 3천억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재계와 증시 관계자들은 LG 대주주들의 이런 거래를 구씨와 허씨 두 집안의 ‘갈라먹기’로 보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아들이 없어 후계가 마땅찮고, 구씨와 허씨 일가가 3대(55년)에 걸친 동업관계를 맺어오면서 지배구조가 매우 복잡해지자 지주회사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뒤 허씨 일가 쪽이 자기몫을 요구해와 지분 나누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열사간 지분 이동 활발

사진/ LG의 지분정리가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분정리를 통해 구씨 일가가 맡게 될 LG화학 여천공장.
실제 LG 대주주들의 지분 이동은 올 들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LG필립스엘시디 사장은 올해 수차례에 걸쳐 LG석유화학 주식을 팔아치워 매각 차익만 660억원을 올렸다. 이 돈으로 구 사장은 LG투자증권 주식을 사들여, 구본무 회장을 제치고 이 회사의 개인 1대주주에 올랐다. 허준구 LG전선 명예회장의 장남인 허창수 LG건설 회장은 올 들어 LG석유화학 지분을 대량 매각해 상장 당시 6.95%에 달하던 지분이 3.63%로 낮아졌다.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고 허정구 삼양통상 창업주의 2남 허동수 LG칼텍스정유 회장도 2000년 말부터 LG전자·LG화학 등 그룹의 핵심 지주회사 지분과 LG석유화학 등의 지분을 지속적으로 매각했다. 허만정씨는 구인회 엘지 창업회장의 장인인 허만식씨와 재종 간이다.

LG전자의 경우 지난해 5월 이후 구씨 일가는 총 110억원어치의 주식을 꾸준히 매수해왔다. 반면 허동수 회장이 95억원어치를 매각하는 등 허씨 일가는 14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최근에는 구씨 일가 중에서도 구본무 회장이 LG전자(LGEI) 지분을 매각하는 반면, 구본준 사장 쪽은 이를 매입해 LGEI 지분율을 1.08%로 높였다. 이에 따라 LG그룹의 확고한 2인자로 부상한 구본준 사장이 구본무 회장과 함께 향후 LGEI와 LGCI를 역할 분담해 경영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달 초에는 LG그룹 각 계열사가 보유하던 LG전선·LG칼텍스가스·극동도시가스·LG니꼬동제련의 주식을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들인 태회ㆍ평회ㆍ두회 창업고문 일가가 전량 매입해 계열 분리했다. 이에 앞서 1999년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고 구철회씨의 장남 자원씨가 LG화재 회장을 맡아 분가했고,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인 자학ㆍ자두씨도 각각 아워홈, LG벤처투자 회장을 맡아 2000년 분가했으며, 구 명예회장의 차남과 4남인 본능ㆍ본식씨도 희성그룹으로 계열분리했다. 이로써 LG의 구씨 가문은 회(會)자 돌림의 창업 1대와 자(滋)자 돌림의 2대의 방계가족 분가가 사실상 완료돼 창업주 장손인 구본무 회장 직계 경영체제가 됐다.

내년 3월 단일지주회사 출범을 앞둔 LG그룹이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는 구씨와 허씨 일가 간 지분 나누기 작업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엘지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단일지주회사 아래 금융계열사를 제외한 화학·전자·정유·텔레콤·건설·유통 등 대부분의 계열사가 자회사로 편입된다”며 “이는 어디까지나 사업 구조조정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이를 양가의 분리와 결부시켜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업 자회사의 경영권은 어떤 형태로든 나뉠 수밖에 없어 구씨와 허씨 일가 간 지분과 자리이동 등을 감안할 때 이미 큰 그림을 그려놓고 움직인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자는 네가 갖고, 건설은 내가 갖고…

사진/ 대주주 지분 고가매입의 이익은 누구 손에? LG화학의 LG석유화학 지분 매입은 지난 4월 25일 종합주가지수 폭락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재계에서는 구씨 일가가 전자·통신·화학계열사들을 맡고, 허씨 일가는 건설·정유·유통부문 계열사를 맡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화학부문 지주회사인 LGCI와 전자부문 지주회사인 LGEI의 등기이사직을 보유하고 있고, 동시에 LGCI의 최대주주다. LGCI의 2대주주인 LG연암학원과 LG연암문화재단, 기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모두 더하고, 자사주까지 고려하면 구회장이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LGCI 의결권은 8∼9%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회장은 LGEI의 경우도 LGCI의 지분과 자사주 등을 더할 때 실질적인 의결권은 9∼10%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구본준 사장도 LGCI와 LGEI의 개인 2대 주주로 지분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허씨 일가는 LG그룹의 지주회사에 보조적인 역할로 참여하면서, 건설과 정유부문의 경영을 맡을 것이 확실시된다. 또 올 7월 LG백화점·LG유통·LG마트·LG엠알오 등을 묶어 단일회사로 출범할 유통 쪽도 허만정씨의 8남이자 허준구 엘지전선 명예회장의 동생인 허승조 LG백화점 사장을 비롯한 허씨 일가가 맡을 것이 유력하다. 그러나 유통부문에서 LG 내 최대 알짜회사 중 하나인 LG홈쇼핑의 경우, LGCI가 이미 자회사의 요건인 지분 30%를 확보해놓고, 개인 대주주인 구씨와 허씨 일가들은 지속적으로 매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구씨 일가 쪽으로 넘어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남은 것은 지주회사에 편입되지 못하는 금융 쪽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금융 쪽도 구씨 일가가 장악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본준 사장이 LG상사·LG백화점·LG엠알오 등 이른바 허씨 쪽 사업으로 분류된 기업들이 대량으로 매각한 주식을 매입해 개인 1대주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부문 지주회사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되는 LG투자증권의 경우 허씨 일가의 지분이 없다.

문제는 이러한 지분 정리과정이 소액주주 등 투자자에게조차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채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주주 개인들의 자기 이익 챙기기가 관철되고 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지주회사제도는 순환출자로 얽혀 있는 재벌체제의 소유·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장점이 있다”며 “그러나 대주주의 주식이동 과정이 투명하지 않다면 LG가 사운을 걸고 추진하는 지배구조 개편작업은 그 취지와 상관없이 시장으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효상 기자 hs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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