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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주5일제, 아 꿈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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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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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마지막 협상 앞두고 합의안 난망… 노동조건 주고받기에 노동시간 단축은 뒷전

사진/ 주5일제는 노사정 합의로 성사될 것인가. 노사정위원회는 2년여에 걸쳐 합의안 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김종수 기자)
주5일근무제 도입은 ‘의지’의 문제기에 앞서 상대편이 있는 하나의 ‘협상’이다. 지난 4월25일까지 막판 타결을 시도한 노·사·정 간의 주5일제 논의는 이 사실만 거듭 확인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협상 결렬에 따라, 노동법 개정을 통해 오는 7월부터 단계적으로 주5일제를 시행한다는 계획도 큰 차질을 빚게 됐다. 물론 노사 양쪽은 노사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을 토대로 오는 5월4일까지 내부 의견을 모아 다시 한번 타결을 시도할 예정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데까지 온 만큼 한쪽의 통 큰 결단이나 일방적인 양보가 없는 한 합의안 도출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주5일제는 본격 이슈화한 지 4년이 지났고, 노사정위원회에서의 공식 논의만 해도 2년을 끌어왔다. 숱한 논의와 밀고 당기기 끝에 몇번의 ‘상당한 의견접근’이 있었지만 합의안에 도장찍기 직전에 번번이 틀어지고 말았다. 합의로 가는 길이 험난하자 “체력이 달린 쪽이 지쳐 떨어지면 그때서야 합의가 가능할 것”이란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일방적 양보 없으면 합의 불가능


주5일제 도입이 늦춰지면서 혼란도 커지고 있다. 법 개정과 상관없이 정부는 지난 4월27일부터 공무원의 토요휴무제의 시험실시에 들어갔고, 서울지하철공사 등 일부 공기업노조와 금융노조는 노사협상을 통해 자체적으로 주5일 근무를 관철시킬 예정이다.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주5일제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이 야합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5일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의는 뒤로 빠진 채 노사가 노동조건을 놓고 ‘주고받는’ 게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이슈로 내건 노동계에 맞서 사용자 쪽은 애초 시기상조론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입법화 약속이 나오면서 주5일제가 대세로 굳어지자 사용자 쪽은 다시 임금삭감 불가피론을 들고 나왔다. “어차피 주5일제가 대세라면 이 참에 노동법과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이른바 ‘국제적인 기준’이다. 월차·생리휴가 폐지를 비롯해 휴일·휴가제도를 고치고 주휴(주로 일요일)를 무급화하는 등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노동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계는 “노동시간 단축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온 노동자에게 휴식을 주자는 것인데 ‘이걸 줄 테니 다른 것을 내놓으라’는 식의 논의는 노동시간 단축의 취지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발해왔다.

특히 노사 모두 내부에서도 이해가 엇갈리면서 자체 합의안조차 내놓지 못하는 판국이다.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협상 당사자인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조직 내부의 반발을 의식해 책임 있는 자세로 협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계 안에서는 “원칙만 내세운 채 타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부분적 양보가 있더라도 노동시간 단축을 ‘실현’하는 데 의미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성태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노동시간 단축의 대의를 따라 주5일제를 빨리 실현할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중심에 놓고 주5일제를 바라볼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내부 반발이 부담스럽기는 사용자 쪽도 마찬가지다. 전경련은 최근 “경총이 노동 쪽에 너무 많은 것을 내주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경총 김동욱 경제조사팀장은 “합의를 끌어 1, 2년이라도 시행을 늦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중소기업 안에서 나오고 있다”며 “중소기업을 안고 가기가 가장 힘들다”고 곤혹스러워했다. 중소기업뿐 아니라 재계 전체가 ‘어려운 중소기업’을 명분삼아 주5일제 무산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노사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은 △월차휴가를 연차휴가로 통합한 뒤 15∼25일(현행 연·월차는 22∼32일)까지 부여 △주휴일은 현행처럼 유급으로 유지 △초과 노동시간 한도는 3년간 주당 16시간(현재 12시간)으로 연장 △연장·야간·휴일근로 때의 할증률(현행 50%)은 첫 4시간분에 대해 25% 적용 △탄력근로제는 3∼4개월(현행 2주 또는 1개월 단위)로 확대하는 안을 담고 있다. 시행시기는 금융·보험, 공공부문은 법 시행 뒤 3개월, 1천명 이상 사업장은 1년, 300명 이상 사업장은 2년, 20명 이상 사업장은 4년 이내에 도입하고, 20명 미만 사업장은 대통령령으로 따로 정하기로 했다.안영수 노사정위원회 상무위원은 “조정안은 노사 양쪽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한 것”이라며 “이 조정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세노동자 볼모로 제한적 합의할 건가

사진/ 노동계는 주5일제로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사측의 임금삭감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최종 타결이 실패로 끝난다면 노사가 합의하는 부분만 노동법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개별 사업장에 맡기는 식의 ‘제한적 합의’로 갈 공산도 크다. 이럴 경우 힘 있는 대기업 노조는 법과 상관없이 단체협약으로 주5일제와 임금보전을 따낼 수 있지만, 문제는 노조도 없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다. 물론 임금이나 노동조건이 조금 후퇴하더라도 일주일에 이틀을 쉬고 싶은 노동자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법 개정 이전이라도 단체협약이나 정부 방침으로 주5일제를 먼저 실시하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자신들의 주5일 근무에만 급급해 더 어렵고 힘든 노동자들에게 주5일제에 서둘러 합의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행시기 못지않게 현재 노사 간에 불거진 가장 큰 쟁점은 주휴 무급화다. 일요일이 무급으로 바뀌면 평균임금과 통상임금이 깎이고 이에 따라 퇴직금, 상여금, 각종 수당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토요일 4시간을 쉬는 대신 △생리휴가 무급화 △탄력근로제 확대 △휴일·휴가 축소 △초과근로 할증률 인하에 주휴까지 무급화할 경우 크게 임금삭감을 불러올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경총은 현재 유급으로 돼 있는 주휴를 반드시 무급화해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관철시킨다는 방침이다.

결국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풀릴 듯하면서도 임금문제와 맞물리면서 다시 꼬여가는 형국이다. 사실 생계임금의 상당부분을 잔업, 시간외노동, 휴일노동에 기대온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이 뒤따르는 노동시간 단축은 안 하니만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 휴가가 쉬는 날이라기보다는 저임금을 보전해주는 ‘돈’ 노릇을 해온 현실에서 휴가축소는 임금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게 된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연월차휴가를 15∼22일로 줄이고 생리휴가와 일요일을 무급화하면 10년 근속 노동자를 기준으로 정규직 남성노동자는 3.4%, 여성은 6.5%의 임금이 삭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토요일(4시간)을 쉬면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1년(52주)에 26일을 더 놀지만 임금은 52일분을 빼앗긴다는 계산이다. 게다가 월급제가 아닌 시급제, 일급제, 도급노동자의 경우 일요일을 무급화하면 20.3%의 임금이 삭감된다. 박강우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대다수 노동자가 잔업 등을 통해 초과노동수당으로 먹고사는데, 주5일제를 한답시고 다른 노동조건들을 후퇴시키면 생활임금이 위협받는다”며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휴일·휴가를 줄이면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마저도 사라지고 만다. 조정안대로 될 경우 근속연수 1∼10년의 남성노동자는 연간 시간단축 효과가 104∼152시간에 지나지 않고 여성은 단축되는 노동시간이 연간 8∼56시간에 그친다. ‘임금은 삭감되고 노동시간 단축효과는 거의 없는’ 주5일제가 되고 마는 셈이다. 물론 전체 노동자의 85%가 넘는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는 단계별 시행에 따라 한참 뒤에나 주5일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꼬이고 꼬인 임금문제… 사업장별 협상?

그럼에도 연간 2500시간(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400∼1800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주5일제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노동계는, 경총이 말로는 “주5일제 도입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면서도 중소기업을 내세워 주5일제를 자연스럽게 후퇴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런 경총과의 합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경총보다는 정부를 압박해 ‘온전한 주5일제’를 쟁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한국노총이 대선 후보들에게 주5일제 시행을 공약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가 안 될 경우 노동부가 자체 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주5일제 관련 법안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노사 간에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주5일제를, 그것도 합의가 안 된 법안을 국회가 쉽게 떠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서 민주노총은 5월부터 본격화하는 임단협에서 주5일제 쟁취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기로 했다. 주5일제 논란이 노사정위원회의 틀을 넘어 이제 각 사업장으로 옮겨붙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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