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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용불량을 강요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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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4-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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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인상에 떠는 불량 리스트 대기자들… 가계부채 늘어나 금리가 뇌관으로 작용

사진/ "당신도 신용불량 대기자입니까." 금리인상 조짐에 따라 가계 대출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용호 기자)
지난 4월10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약속의 집’. “계십니까?”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집 안에 있던 석승억(33·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 대표)씨는 누가 왔는지 직감으로 이미 아는 눈치였다. “여기 정00씨가 살고 있죠?” “지금 없는데요. 주소만 이쪽으로 옮겨놓고 실제로 거주는 안 합니다.” 짐작대로 카드빚을 받으러 들이닥친 카드회사 채권회수팀 직원들이었다. “그래요. 혹시 연락처는 압니까?” 석씨로부터 정씨의 휴대폰 번호를 받아적은 그들은 더 묻지 않고 돌아섰다. 기다려봤자 별 소용이 없다고 일찌감치 사태 파악을 한 것이다.

약속의 집은 신용불량자 리스트에 오른 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사람들이 잠시 몸을 의탁하는 곳으로, 석씨가 집주인이다. 신용불량자들의 모임인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의 작은 거처이기도 하다. “저 사람들이 찾는 정씨도 마찬가지예요. 신용카드 빚을 간당간당 갚아나가다 더 못 견디고 결국 신용불량자 대열에 들어선 겁니다. 카드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판에 금리가 인상되면 다들 나자빠지게 될 겁니다.” 그들이 떠나자 석씨가 짤막하게 보탰다.

엊그제 석씨와 상담한 한 20대 카드대금 연체자도 이 카드 저 카드로 2천만원에 이르는 카드빚을 돌려막다 지쳐 끝내 신용불량자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카드빚을 어떻게든 갚아나갈 것인지 아니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될 것인지를 놓고 줄타기하다 결국 빚갚기를 포기하고 만 것이다.

신용불량자 245만명, 사회적 위험 수위


사진/ 카드사들은 대금 연체가 위험수위를 넘어섰는데도 카드 발행을 남발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지난 3월 말 현재 은행연합회에 오른 신용불량자는 245만명. 카드 쪽만 볼 때 신용카드 회원 4800여만명 중 신용불량자는 104만명으로 지난해 7월(62만5천명)에 견줘 대폭 늘어났다. 개인 신용불량 건수는 은행, 카드를 합쳐 699만건으로 지난해 말보다 30만5천건이 늘었다. 금융감독원 김병태 여신전문감독팀장은 “신용불량자 245만명은 경제활동 인구를 2500만명으로 잡을 때 10명 중 1명꼴인 셈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숫자”라며 “이자부담 증가를 커버해줄 정도로 소득이 높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가 인상되면 신용불량자가 더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용불량자 급증은 가계와 금융기관 부실화뿐만 아니라 가정파괴로 이어진다. 특히 신용불량자가 된 뒤 ‘일부러’ 가족과 갈라서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석씨는 “채권추심이 들어오더라도 이혼해버리면 자기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난다는 생각에 가족을 위해 스스로 이혼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신용카드대금 연체는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지난해 말 현재 7개 신용카드사의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등 19조3천억원의 대출채권 중 7.4%(1조4천억원)가 연체되고 있다. 은행권의 가계대출 연체율 1.21%보다 무려 6배 이상 높은 수치다. 현금서비스 한도제한 폐지와 세액공제제도에 따라 신용카드 대출이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카드대출은 99년 48조원에서 지난해 267조원으로 급증하고 있다. 특히 카드론을 제외하고 현금서비스로만 1천만원 이상을 빌린 사람이 지난해 53만명에 달했다. 여러 장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결제하는 ‘돌려막기’ 고객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이런 와중에 금리인상이 임박했다. 한국은행은 현재 4.0%인 콜금리를 조만간 인상하겠다는 메시지를 잇따라 시장에 보내고 있다. 금리인상의 속도와 폭만 재고 있을 뿐이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콜금리 인상에 대비해 시장금리가 이미 오르는 등 금융시장이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금리를 올려도 아픈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빚 내서 다른 빚을 갚는 등 빚더미에 허덕여온 사람들한테 금리인상은 치명타가 될 공산이 크다. 이자부담 증가에 따른 자금압박의 고통을 넘어 신용불량자로 떨어지는 상황이 닥쳐오고 있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박사는 “저금리 시대에 마구 돈을 빌려 주식이나 집을 샀던 사람들이 슬슬 불안해하는 때가 오고 있다”며 “폭증한 가계빚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리가 들썩이면 ‘은행돈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지만,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가장 큰 도화선은 가계부채 규모가 지나치게 ‘빨리’ 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341조원에 이른 가계대출 규모는 3월에만 7조원 이상 늘어나는 등 사상 최고치에 이른 상태다. 이에 따라 가구당 가계부채도 지난해 2330만원으로, 2000년(1850만원)보다 25.9%나 늘었다. 평균 대출금리가 1%포인트 상승할 경우 가구당 이자부담은 연간 22만6천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개발연구원 신인석 박사는 “이는 홍수의 이치와 같다”며 “한해 동안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는 문제되지 않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렸을 때 홍수가 나는 것처럼 지금의 가계부채도 그런 형국”이라고 말했다.

시장금리는 콜금리 인상에 대비해 벌써 가파른 오름세를 타고 있다. 3년만기 국고채 유통수익률은 19일 현재 6.47%로, 지난해 10월 사상 최저치(4.34%)에 비해 2.13%포인트나 올랐다. 가계대출금리의 기준이 되는 양도성예금증서(CD) 수익률도 3월 초 연 4.4%대에서 이달에는 4.8%대까지 올랐다. 이런 금리인상은 카드와 사채 금리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연 20% 이상의 고리인데다 신용이 취약한 카드 대출에서부터 연체가 발생하고, 이것이 고스란히 신용불량자 양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카드대출이 신용불량자를 쏟아내는 데는 카드사의 허술한 고객관리도 한몫한다. 카드사는 다른 카드로 돌려막든 사채를 끌어다 막든 꼬박꼬박 빚을 갚으면 우량고객으로 분류해 대출한도를 마구 올려준다. 사실은 속이 썩어들어가는 부실고객인데도 속사정을 모른 채 카드대출 실적이 좋은 우량고객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출금액은 자꾸만 더 늘어나고, 여기에 금리인상은 신용불량을 터뜨리는 뇌관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구잡이 대출이 대기자 양산

사진/ 개인신용이 위협받고 있다. 박승(왼쪽) 한국은행 총재는 취임직후부터 금리인상을 공언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물론 당장 급해 카드로 돈을 뽑아쓰는 사람한테 금리는 나중 일이다. 그러나 대출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여기에 금리인상이 겹치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피부로 다가오는 것이다. 돌려막기에다 카드깡 그리고 중간에 멈출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사채업자한테까지 찾아가고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고 마는 과정은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 홈페이지의 회원 게시판에 여럿 올라 있다. ‘신용불량 대기 중’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린 한 회원의 카드빚은 4천여만원. 이 카드 저 카드를 돌리며 산 지 5년째다. 그는 “겁없이 돈을 빌려 쓰는 동안 이자에 이자가 불어나고 돈이 돈을 물고 갔다”며 “정신차려 보니, 내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빚이 우습게 불어났다”고 씁쓸해했다. 카드빚이 계속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고 마는 ‘달리는 자건거’와 같다는 점을 이제서야 깨달은 그는 “다음달이면 카드빚을 더 이상 막기 어려울 것 같다”며 “신용불량자 리스트에 오르는 일이 터지기 전에 대처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카드빚이 8천만원에 이른다는 다른 회원은 “보증인을 세워 연체금을 갚으라는 공문이 카드사에서 날아왔다”며 “곧 다른 카드사에서도 전화가 오고 공문이 날아올 텐테 마치 폭풍 전의 고요 같다”고 한숨지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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