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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굴뚝이 막히면 첨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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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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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CEO’로 불리는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의 한국식 첨단기업론

사진/ (박승화 기자)
그는 인터뷰 도중 자꾸 말 허리를 잘랐다. 바깥에서 듣던 그대로였다. 워낙 말이 빠른데다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니 그럴 법도 했다. 박용성(62)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재계 인사 중 ‘갑자기 떠오른 인물’이다. 대한상의 회장 자리를 맡은 이후 2년여 동안 그는 거침없이 소신을 쏟아냈다. “발만 튼튼하다면 문어보다 많은 발을 가진 ‘지네발 경영’도 괜찮다”며 핵심역량에 집중하라는 정부정책을 비판했는가 하면, 최근에는 “한국의 기업은 돈이 된다 하면 그쪽(첨단산업)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들쥐떼 근성’을 갖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국의 세번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이자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회장이기도 한 그는 나라 안팎에서 무려 60가지가 넘는 공식직함을 갖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이라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도 있지만 원체 ‘일 욕심’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을 너무 벌인다고 하지만 분명히 가려서 하고 허투루 감투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표현대로 “쪽팔리게” 매스컴을 많이 탄 탓에 주변에서 “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려고 그러나?” 하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는데 대해서도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을 동원했다. “내가 만약 정치에 뜻이 있다면 성을 갈 겁니다.” 그에게는 ‘디지털CEO’라는 명함이 따라다닌다. 소형 망치와 드라이버는 해외 출장길을 떠나는 그의 노트북가방 속 필수품이다. 호텔에 들어가면 노트북 사용 시스템을 체크하고 안 맞으면 직접 손을 보기 때문이다. 1시간 동안의 빠듯한 인터뷰 끝에 그는 “못다 한 말도 있지만 과거에 한 말을 그대로 옮겨 써도 괜찮다“며 “나는 한결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기 때문”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규제로 꽁꽁 묶으면 경쟁력 떨어져


요즘 이런저런 발언을 많이 쏟아내고 있는데….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설치고 다닐 수밖에 없다. 낸 회비만큼 회원사한테 돌려줘야 한다. 내가 여기저기서 말을 많이 하고 다녀야 “아, 상공회의소가 뭘 좀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신문사에서 갑자기 지면이 펑크나면 내가 인터뷰로 채워주기도 한다.

대한상의를 비롯한 경제5단체가 요즘 규제완화를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지금은 세계의 모든 기업이 다 동업자고 경쟁자다. 우리 기업을 규제로 꽁꽁 묶어놓아서는 안 된다. 대마불사 신화는 완전히 깨졌다. 외환위기 이후 30대 기업 중 17개의 주인이 물러나지 않았나? 자기도 대우꼴 날지 모르는데 무리하게 투자하고 차입경영할 사람은 없다. 기업 소유지배구조를 바꾸고 투명성을 높이는 등 좋다는 정책은 다 도입했다. 다 발가벗겨놓고 또 뭘 규제하겠다는 것인가.

“대선후보의 공약을 검증하겠다”고 재계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좀 창피하게 됐는데, ‘경제5단체장 결의’를 발표할 때 문구에 공약검증이 들어 있어서 원칙적으로 그러자고 한 것일 뿐 선언적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뭘 어쩌자고 정한 것도 없다. 경총에서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하고, 다른 경제단체는 시큰둥하면서 마치 재계 안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으로 와전되었다. 나는 원칙적으로 찬동한다. 만약 어느 후보가 느닷없이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지 않은가.

“부당한 정치자금은 내지 않겠다”고 했는데 부당한 정치자금이란.

부당한 정치자금이 뭔지 모르겠지만, 기업이 청와대에 돈 싸다 주는 건 이제 없어졌다. 정치자금은 후보·정당에 대한 선호와 자기 능력에 따라 주면 되는 것이다. 꼭 비자금을 만들어 세금처럼 일률적으로 다 내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선거공영제 등 선거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 한강 백사장에 몇십만명을 모으는 군중동원은 다 돈으로 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직원을 모아도 슬금슬금 도망치는데, 돈으로 사람 모은다고 되겠는가?

재계가 바라는 정당과 후보는.

그야 사유재산제를 인정하고 자본주의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 사실 정당마다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정책마다 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들쥐떼 근성론’이 재계에 화제인데(그는 최근 한 특강에서 “한국기업들은 뭐가 좋다고 하면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장을 어지럽히는 들쥐떼 근성이 있다”고 질타했다).

우리가 앞으로 10년 이상 먹고살 것은 굴뚝산업 즉 전통제조업밖에 없다. 그런데도 첨단산업 쪽으로만 우르르 몰려가 다 망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전통산업도 영원무궁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전통산업과 첨단산업을 접목시켜 몇년 뒤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통제조업과 첨단산업은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가.

(옆에 있는 찻잔을 가리키며) 이것을 보자. 인류가 있는 한 누군가 이런 그릇이며 신발, 철강, 자동차, 선박을 만들어야 한다. 대신 첨단 신기술과 디자인을 전통산업에 접목해 얇고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면 된다. 첨단을 전통과 자꾸 묶어 이용해야 하는데, 첨단 자체만으로 무엇을 해결하려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첨단만 앞세우고 전통산업은 서둘러 문닫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거다.

그런 우를 범한 것이 어떤 분야인가.

전통산업을 왜 저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대구의 밀라노프로젝트(섬유부흥사업)나 부산의 뒤늦은 신발육성사업을 보라. 멀쩡하게 얼마든지 해먹을수 있는데도 사양산업이라고 죽여 보따리 싸서 떠나게 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살리겠다고 돈을 퍼붓고 있다. 한번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나.

언젠가 ‘지네발 경영’을 해도 괜찮다고 했는데

발이 수십개라 해도 썩지 않고 다들 제 역할만 하면 된다. 과거의 선단식 문어발 경영은 자금이든 인력이든 모선으로부터 파이프라인이 끊기면 다 죽고 말았다. 하지만 튼튼한 발이고 그래서 모선을 끌어주는 선단이라면 문어발이든 지네발이든 괜찮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한을 풀기 위해 오늘 다시 갑자기 자동차를 시작한다고 하면 외국인 주주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참여연대가 떠드는 게 문제가 아니다.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시장보다 기업한테 더 무서운 건 없다.

‘시장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가.

시장이라는 가장 좋은 감시자가 있는데 왜 집단소송제를 통해 기업을 고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대통령도 50%가 안 되는 지지율로 한 나라를 통치하는데, 왜 이재용씨라고 삼성을 맡으면 안 되나? 이재용씨도 자기 전 재산을 걸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기가 회사 망치면 망신은 물론 명예도 돈도 날리고 쫓겨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기업인은 기업에서 쫓겨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기업 감시자는 시장… 노동정책 바꿔야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정부가 노동정책을 바꿔야 한다. 주 5일근무를 보자. 물론 노동자도 스포츠·레저에 쏟을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고, 주 40시간 근무를 할 때도 됐다. 하지만 주 40시간으로 가려면 거기에 맞게 휴일·휴가제도를 고쳐야 한다. 안 그러면 14%에 달하는 인건비 상승부담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다. 월차휴가와 생리휴가를 주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정부가 내놓은 안이 1년 휴일 143일인데 일본의 138일보다 많다. 일본보다 더 놀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단계적으로 주 5일제를 하자는 게 정부안 아닌가.

내 말은 그런 휴일과 임금부분들을 다 고치고 나서 주5일제를 하자는 것이다. 고모가 죽어도 휴가를 보내주는데 이번 기회에 휴일제도를 완전히 고쳐야 한다. 이번에 우리 회사인 두산중공업 노동자들이 민영화 반대 동조파업을 했는데 모두 징계조처했다. 물론 월차휴가를 냈다면 동조파업을 하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노사관계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져야 한다.

대한상의가 재계에서 맏형이라고 줄곧 얘기해 왔는데.

대한상의야 118년의 역사와 회원 수로도 그렇고, 가나다순으로 봐도 맏형이다. 형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늘 전경련이 먼저다. 설사 셋째동생이 출세했더라도 부모가 형제를 부를 때 큰형부터 부르지, 셋째부터 부르는 집안이 있나?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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