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선별 제공에 대선후보 검증 발언 등으로 정치권 향해 불호령 태세
“앞으로 ‘부당한’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 곧이곧대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누가, 언제 그 말을 했느냐 하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쏟아지고 있는 재계쪽의 정치자금 발언에서 뒷면의 사연이 자꾸 궁금해지는 것은 꼬불꼬불 비뚤어진 못된 시각 때문일까? 부당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공언 앞에서,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당한 정치자금을 제공해왔다는 실토 아니냐는 반감을 품는 것도 초점을 잘못 맞춘 것일까?
정치의 계절 맞아 목소리 높아져
손길승 SK 회장이 “(정치인들의) 정당한 정치자금 요구에는 응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요구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지난 2월1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20층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조찬회 자리였다. 이날 손 회장의 발언을 시작으로 정치자금과 관련한 재계쪽의 목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오며 봇물을 이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2월8일 월례회장단회의 및 이사회를 열고 올해 실시될 양대 선거가 ‘돈 안 드는 선거’가 돼야 한다는 재계 입장을 정치권에 전달키로 결정했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기업의 투명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법을 어기면서까지 정치자금을 낼 수는 없다”며 불법 부당한 정치자금 요구를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같은 달 16일 전경련은 “정당한 방법이라 해도 전경련 차원에서 돈을 걷는 일은 하지 않기로 입장을 정했다”고 밝혔다. 며칠 뒤에는 법에 의하지 않은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하긴 재계가 정치자금에 대해 나름의 목소리를 낸 게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선거를 몇달 앞두고 정치 바람이 불 때쯤이면 이런저런 통로로 정치자금을 선별해서 준다는 식의 말이 흘러나오곤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구자경 당시 전경련 회장이 “반기업적 입장을 취하는 의원에게는 정치자금을 주지 않겠다”고 발언한 일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또 지난 1999년 12월에는 전경련을 비롯한 5개 경제단체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친재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계획을 따로 강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의 재계쪽 정치자금 발언에도 커다란 뜻을 둘 필요가 없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남일총 박사는 “선거 때가 되면 으레 한번씩 하는 소리”라며 “회계제도가 투명해졌다고는 하나 어차피 될 만한 후보쪽에 많이 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도 “그냥 원론적인 얘기를 한 것인데 외부에서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상무는 “예전과 달리 비자금을 마련할 방도도 마땅치 않아진 환경 변화를 얘기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과거에 이뤄진 정치자금 발언과는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재계의 태도가 훨씬 당당해졌다. 정치자금 제공 때 후보자의 성향을 따지겠다고 발언한 구자경 회장은 청와대쪽의 불쾌감 표명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것으로 세간의 뇌리에 박혀 있다. 이와 달리 근래 들어 터져나온 재계쪽의 정치자금 발언에 대해선 정계쪽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모양새다. 전경련 회장이나 재벌 총수가 개인 자격으로 불쑥불쑥 내던졌다가 주워담곤 하던 데서 단체 명의로 조직화한 현상으로 바뀐 점도 차이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요구의 수준이 훨씬 진전된 모양새도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다. 잇단 정치자금 발언으로 포문을 연 재계가 3월 들어선 대선 후보의 공약을 검토·평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비롯한 경제5단체장이 모인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이 발언은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평가하겠다는 예전의 방침과는 또다른 차원으로 여겨져 관심을 모았다. 이날 조남홍 경총 부회장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 시장경제 육성에 도움이 되느냐를 경제단체협의회 차원에서 검토·평가하겠다는 것”이라며 “우리의 의견을 정치권 또는 대선후보에게 전달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IMF 졸업 뒤 재계 우위 추세
방송통신대 김기원 교수(경제학)는 “재계가 예전보다 훨씬 강한 톤으로 정치자금의 선별 제공 방침을 밝히고 대선후보의 공약을 평가하겠다고 나온 것은 재계 우위의 정경유착을 굳혀가는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정계에 대한 재계의 우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나왔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북경발언’(기업은 2류, 정치는 3류라는 내용을 담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명확히 드러난 것은 그때로 잡을 수 있습니다.” 북경발언 이전 박정희 정권 때까지는 정부가 성장 위주의 산업정책을 통해 재계를 끌고 가는 식의 정계 우위의 정경유착이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박 정권 이후 경제규모가 커지고 민주화가 조금씩이나마 이뤄졌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까지 정계 우위의 기조는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구자경 회장의 발언 등 약간의 균열이 있었지만 이런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관료사회를 포함한 정계와 이에 맞서는 재계의 역학 구도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거치면서 다시 역전된다. 외환위기 와중에서 기업도산 사태가 잇따르고 재벌이 경제위기의 주범이란 시각이 팽배해져 재계의 경제·사회적 헤게모니가 급격히 약해진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를 앞장세운 정부의 개혁 바람에 재계는 내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양새만으로는 완벽하게 정계 우위의 관계였다. 경제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이런 관계를 뒷받침하는 든든한 힘이었다.
그러던 것이 IMF 구제금융을 모두 갚고 졸업을 선언할 즈음 또다시 관계가 역전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재벌개혁과 관련한 갖가지 조처가 후퇴하는 조짐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경기활성화 및 규제완화를 빌미삼아 재벌개혁에서 뒷걸음질쳤다는 건 대기업집단의 출자총액 제한 폐지 검토, 은행소유 한도 확대 등 최근의 정부 방침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더욱이 재계가 새로운 주장을 내고 정부 부처가 이를 받아 허겁지겁 따라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에 나타난 재계 우위의 정경유착이 IMF 사태 이전과 달리 개혁에 대한 재계의 저항을 담고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진다.
물론, 재계가 정계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또 정경 ‘유착’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맞서게 되는 권력의 ‘분화’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IMF 졸업 뒤 기력을 회복한 재계가 급격하게 힘을 키워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 재벌 산하 연구기관이나 경제단체에서 들고 나온 방안이 정부 정책으로 굳어지는 사례가 잦다는 점에서 정·재계는 분화되기보다는 유착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홍익대 전성인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풍부한 인적 자원과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는 재벌의 힘은 추세적으로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재계 우위의 역학관계가 집권 말기 및 선거국면 돌입이란 특수한 시점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장기적인 흐름 위에 있다는 분석이다.
자금을 무기로 삼은 정치권 길들이기?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는다든가, 대선 후보의 공약을 평가하겠다는 재계의 발언을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크게 시비를 걸 만한 점도 딱히 없다. 그런데도 씁쓸함을 감추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최근 재벌의 발언에선 힘의 과시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며 “한편으론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선후보의 공약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돈을 매개로 국정을 농단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처장은 “재벌 회장 개인이 주머니 돈을 털어 정치자금을 내는 것은 상관할 바 아니나 법인의 돈은 소액주주, 종업원 등 후보(정치인)별 선호를 달리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최근의 정치자금과 얽힌 재계의 발언에선 이같은 근본적인 인식이 빠져 있다는 비판이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진/ 시난 2월22일 전경련은 정기총회에서 정치자금 관련 결의문을 박수로 통과시켰다. (한겨레 서정민기자)

사진/ 부당한 정치권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힌 손길승 SK회장.
하긴 재계가 정치자금에 대해 나름의 목소리를 낸 게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선거를 몇달 앞두고 정치 바람이 불 때쯤이면 이런저런 통로로 정치자금을 선별해서 준다는 식의 말이 흘러나오곤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구자경 당시 전경련 회장이 “반기업적 입장을 취하는 의원에게는 정치자금을 주지 않겠다”고 발언한 일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또 지난 1999년 12월에는 전경련을 비롯한 5개 경제단체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친재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계획을 따로 강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근의 재계쪽 정치자금 발언에도 커다란 뜻을 둘 필요가 없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남일총 박사는 “선거 때가 되면 으레 한번씩 하는 소리”라며 “회계제도가 투명해졌다고는 하나 어차피 될 만한 후보쪽에 많이 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경련 김석중 상무도 “그냥 원론적인 얘기를 한 것인데 외부에서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상무는 “예전과 달리 비자금을 마련할 방도도 마땅치 않아진 환경 변화를 얘기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과거에 이뤄진 정치자금 발언과는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재계의 태도가 훨씬 당당해졌다. 정치자금 제공 때 후보자의 성향을 따지겠다고 발언한 구자경 회장은 청와대쪽의 불쾌감 표명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것으로 세간의 뇌리에 박혀 있다. 이와 달리 근래 들어 터져나온 재계쪽의 정치자금 발언에 대해선 정계쪽에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모양새다. 전경련 회장이나 재벌 총수가 개인 자격으로 불쑥불쑥 내던졌다가 주워담곤 하던 데서 단체 명의로 조직화한 현상으로 바뀐 점도 차이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요구의 수준이 훨씬 진전된 모양새도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다. 잇단 정치자금 발언으로 포문을 연 재계가 3월 들어선 대선 후보의 공약을 검토·평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비롯한 경제5단체장이 모인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이 발언은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평가하겠다는 예전의 방침과는 또다른 차원으로 여겨져 관심을 모았다. 이날 조남홍 경총 부회장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 시장경제 육성에 도움이 되느냐를 경제단체협의회 차원에서 검토·평가하겠다는 것”이라며 “우리의 의견을 정치권 또는 대선후보에게 전달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IMF 졸업 뒤 재계 우위 추세

사진/ 정치와 경제의 영역이 맞서며 권력이 분화되고 있는 것인가. 그동안 기업은 국회의원 후원회에 뭉칫돈을 내놓기 일쑤였다. (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