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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승처럼 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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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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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고객지향 경영 2년… 기업이익 사회환원은 기본적 상도

사진/ 대기업 오너로 너무나 평범해서 특별해 보이는 신창재 회장. 신 회장은 의사시절의 진단과 처방 경험을 경영에 적용하고 있다. (이용호 기자)
자산 26조원을 움직이는 교보생명 회장의 집무실은 몇 평이나 될까? 10평, 20평? 아니면 넓게 잡아 30평?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신창재 회장의 사무실은 4∼5평에 불과하다. 접견실은? 더 좁다. 3평이 채 안된다. 집기도 책상과 책장, 5∼6명이 앉을 수 있는 소파와 탁자가 전부다.

사는 집도 300∼400평의 대저택을 상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평수가 조금 넓기는 하지만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58평형이 고작이다. 어쩌면 대기업 오너 가운데 아파트에 사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황제경영’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재벌체제 속에서 신창재 회장은 그렇게 남다른 사람이다. 유난히 두드러진 특징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무나 평범하기에 특별해 보인다고나 할까….

그는 젊은시절 상대 가기를 권유하던 부친 신용호 전 회장의 요구를 뿌리치고 산부인과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비록 가업을 이었지만 자식들에게도 경영수업을 강요하지 않는다. “회사를 물려준다고요? 앞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다. 재벌 2세라 할지라도 인생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회사 경영을 맡으려면 그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목표’를 세우라고 요구한다. “인생의 목표를 세운 뒤라야 자신이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생각 때문에 신 회장 역시 오랜 갈등과 고민을 거쳐 회사 경영에 나섰다. 그토록 어렵게 자리를 굳힌 의대 교수의 길을 접고 회장직에 취임한 것이다. 늦었기 때문에 준비는 힘들었다. 96년 교단을 떠나 대산재단 이사장과 교보생명 이사회 의장을 거치면서 힘겨운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0년 4월 회장에 취임했고 지난해말부터는 ‘고객지향의 경영’을 외치면서 교보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49살의 전혀 다른 ‘회장님’이다.


서울의대 교수에서 대기업 ‘회장님’으로

사진/ "자기 이익만 취한다면 마피아나 같다." 지난해 교보생명이 고객만족경영대상을 수상한 뒤 신창재 회장이 대상 깃발을 흔들고 있다.
서울의대 교수에서 보험사 회장으로 행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고교 때 부친이 상대 갈 것을 권유했으나 경영에 뜻이 없어 의대를 택했다. 부친도 사업을 하려면 거기에 맞는 성격과 기질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영을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당위론과 주위의 권유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4∼5년이 걸렸다. 의대 교수 자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명에 불과하지만, 교보생명 회장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판단해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

의사와 경영자를 비교한다면?

내가 간 길은 의사라기보다는 의대 교수였다. 의대 교수는 아무래도 보험사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보험사 조직은 훨씬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다. 그러나 공통점도 많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한 뒤 처방을 내리고 치료하는 과정은 회사를 운영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현상을 파악한 뒤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대책을 세우는 원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금융회사를 운영하려면 상당한 능력이 필요할 텐데.

나는 조직관리에 역점을 둔다. 잘 모르는 사람이 권한을 휘두르면 곤란하지 않느냐. 보험영업이나 재무관리 등 분야에 대해서 모니터링은 하지만 정확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지식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장점이 되기도 한다. 경영환경이 급변하고 있어 옛날식 사고방식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개인 역량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자기 역량을 개발하는 일은 말단 사원에서부터 회장까지 누구나 다 해야 할 일이다. 경험과 역량도 시간이 갈수록 감가상각되기 때문이다. 매년 5%씩만 자기능력을 개발하면 10년 뒤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두배 이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려면 조직문화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물론 문화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문화란 한 조직이 수십년 동안 일하면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2010년 비전을 만들었다. 고객지향, 정직과 성실, 도전정신 3가지 핵심가치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특히 고객지향은 노력하고 키워가야 할 부분이다. 비전에서 제시한 ‘고객이 가장 선호하는 회사’란 고객감동을 주는 회사를 말한다. 고객만족이 보험료 인하 등 일시적인 것이라면 고객감동은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충성도 높은 고객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이익을 보는 만큼 고객에게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가치를 제공해줘야 한다. 자기 이익만 취한다면 마피아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상도’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상도>를 자주 보나?

<여인천하>를 보다가 <상도>로 돌린 지 오래 됐다. 드라마 내용 가운데도 도움될 만한 것들이 많다. 개인 이익에 너무 집착하면 실패하기 쉽고, 권력과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상도>의 저자인 작가 최인호 선생이 최근에 한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얘기가 가슴에 와닿았다. 윤리경영, 고객만족 경영을 하라는 얘기다.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은 옛말이다.

비효율적 보험업계… 경영세습 시대 마감

사진/ 간부급 사원들과 산에 오른 모습.
요즘 보험업계의 상황은 어떤가?

시중금리 하락으로 인한 이차 역마진이 가장 큰 문제다. 역마진이 해소되려면 4∼5년은 걸릴 것이다. 보험사들이 과열경쟁으로 고금리 상품을 양산해냈던 것이 원인이다. 이를 돌파하려면 경영을 효율화해야 한다. 그리고 시장 상황에 맞는 변동금리 상품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또 위험도가 높은 계약자를 가려내는 언더라이팅이 중요하다. 일종의 리스크 관리다. 문제는 위험도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하는 시스템이 국내에선 잘 안돼 있다는 점이다.

설계사 조직이 비효율적이지 않나?

설계사들의 정착률(1년 이상 보험영업을 계속하는 비율)이 외국계에 비해 크게 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뿌리가 다르다. 외국계는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조직을 꾸렸다. 정착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도 외국계 회사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고객의 재무설계를 상담해줄 수 있도록 정예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남성 대졸 설계사 조직을 육성하고 있다.

교보의 보험수지가 계속 적자다.

종업원퇴직보험이 감소하면서 지난해 보험료 수입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보험료 수입의 일시적인 증감이 중요한 건 아니다. 교보는 지금 리스크 관리를 위해 거품을 빼는 과정에 있다. 회사에 이익을 주지 못하는 상품, 조직, 자산을 줄여가야 한다. 이들을 수익성 있는 쪽으로 농축해가야 한다. 그래서 보험수지 적자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은 내실화의 기회다.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있나?

22살과 20살짜리 두명이 있다. 자기가 타고난 인생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코치만 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항상 얘기한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 내가 아직 젊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물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성숙하면 대주주 지분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너라 해서 무조건 경영을 맡을 수는 없다.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 경영자가 돼야 한다. 특히 대기업 경영자의 책임은 막중하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요구된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집 앞을 산책하거나 빨리걷기, 런닝머신을 주로 한다. 회사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러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담배는 끊었다. 전에는 1달에 1갑 정도 피웠다. 술자리에서나 골프치다가 잘 안 맞으면 피웠다. 그러나 과장들과 대화를 하다가 담배도 못끊는 사람이 무슨 변화와 혁신을 이끌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끊어버렸다.

취미나 여가 생활은?

회사일 때문에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그래서 불필요한 행사를 최대한 줄인다.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자잘한 행사에 참석하기가 어렵다. 의대 교수 시절에 맺었던 인간관계도 거의 포기했다. 회사일 외에는 건강관리와 가정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회사도 중요하지만 인생과 가정도 중요하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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