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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MB 정부 꼼수 가져다 쓴 문재인 정부

‘국가재정법 시행령’ 2014년 민주당 협조로 법제화
문 정부서 20조원대 SOC 예타 면제 가능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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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02 01:21 수정 : 2019-02-0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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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4일. 이명박 정부 당시 기획재정부는 ‘국가재정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은 대형 국책사업의 사전 검증 절차인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에서 제외하는 사업을 명시한 ‘제13조 2항’에 5개 사유를 수정 또는 추가했다. 그중 핵심이 제13조 2항 6호. 기존 예타 면제 대상인 ‘재해복구 지원’이 ‘재해 예방·복구 지원’으로 확대됐다. 재해 예방 목적의 치수 사업으로 포장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예타 없이 신속하게 밀어붙이려는 이명박 정부가 짜낸 꼼수였다. 국가재정법은 1999년부터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 사업은 예산 편성 전에 예타를 하도록 규정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 예타를 적용하고 생략할지를 정부 시행령에 위임한 터라, 정부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예타를 피해갈 수 있었다.  

10년 만의 일괄 면제

당시에는 야당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행령 6호와 더불어 신설된 조항이 있었으니, 바로 9호다.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 지역균형발전 또는 시급한 목적의 국가정책 역시 예타를 거치지 않고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이 시행령 개정안은 9호가 ‘10호’로 자리만 옮긴 채 거의 그대로 3월25일 시행됐다.

그로부터 꼭 10년 만인 2019년 1월, 이명박 정부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시행령 10호’가 문재인 정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1월29일 국무회의에서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가 통과되면서다. 문재인 정부는 10년간 총 24조1천억원을 투입하는 23개 사업을 예타 없이 추진하기로 한 근거로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필요한 사업’임을 들었다. 2008년 9월 전국 7대 권역별로 30대 프로젝트를 선정해 예타를 제외해준 이명박 정부의 ‘30대 선도 프로젝트’(총사업비 19조4천억원) 이후 대규모 ‘일괄 면제’는 10년 만이다.

더구나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 사업비 24조원 중 20조원가량이 도로·철도·항공 등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쓰일 계획이다. 대형 토건사업이었던 4대강 사업(22조5천억원)과 맞먹는 규모다. 이런 내용의 정부 발표를 하루 앞둔 1월28일, 문재인 정부에서 4대강 조사·평가단 민간위원장을 맡은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4대강) 보 처리 방안 도출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 문재인 정부가 경제성 분석과 예비타당성을 무시하겠다니, 이런 이중적인 잣대로 국정을 운영해온 것인가”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한때 사퇴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4대강 사업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문재인 정부가 어쩌다 4대강 시행령을 근거로 정당한 절차도 없이 수십조원의 SOC 투자를 하겠다고 나선 걸까. 다시 이명박 시절로 돌아가보자.


이명박 정부는 2009년 3월25일 시행령 꼼수로 4대강 전체 사업 예산 22조원 중 11.2%만 예타를 거친 채 사업을 강행했다. 훗날 학계의 계산이지만 100원을 투자해 25원도 못 건질 만큼 경제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4대강 사업은, 예타 면제가 아니었다면 애초 추진이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묻지마’ 사업 추진식으로 예타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노영민 대변인), “대형 국책사업을 예타도 없이 임의로 착공할 수 있도록 개정한 시행령은 위헌”(조영택 의원)이라며 4년간 예산 삭감, 소송 제기, 국정조사 촉구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명박 정부를 공격했다.

드디어 2012년 2월 예타를 거치지 않은 4대강 사업 중 낙동강 사업이 국가재정법을 위반했다는 법원 판결이 처음 선고된 뒤에는, 대권 잠룡이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이명박 대통령은 ‘예타 안 해도 된다’고 보고한 자들을 이제라도 문책하는 게 과오를 줄이는 길”이라며 공세에 힘을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이던 2015년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기 위해 국가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예타를 생략해버렸다. 결과는 환경 재앙과 국민 혈세 22조 낭비였다”는 내용의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을 정도로 편법적인 4대강 사업에 비판적이었다. 

설훈 의원 “우리도 집권하면 필요해”

야당은 4대강 사업을 가능케 한 ‘법 위의 시행령’을 뜯어고치겠다며 예타 면제 사업을 법률에 명시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앞다퉈 발의했다.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이던 2013년 4~12월 다섯 차례 걸쳐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의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당시 새누리당도 야당의 움직임에 큰 틀에선 동의하되, 구체적인 면제 사업을 두고선 야당과 줄다리기를 했다. 여야의 논쟁 끝에 우선 4대강 사업에 동원된 ‘재해 예방·복구 지원’(시행령 6호)은 삭제됐다. 또 다른 쟁점은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시행령 10호)을 면제 대상에서 제외할지다. 특히 마지막 심사 날인 2013년 12월19일 격한 논쟁이 오갔다. 한 대목이다.

최재성 민주통합당 의원 “악용의 소지가 있는 법은 만들 필요가 없어요. 사실 ‘지역균형발전’ 이런 것은 준비를 안 해서 시급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이것은 국가 백년지대계 차원에서 다뤄야 하는 것 아니에요?”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것은 긴급하다기보다는, 어느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예타가 경제성 분석만 갖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그런 취지인 거죠).”

(중략)

김현미 민주통합당 의원 “10호(지역균형발전 기준)를 (예타 면제 대상에서) 삭제하면 논란의 여지가 없잖아요.”

이인영 민주통합당 의원 “그러면 정부가 죽으려고 그러겠지.”

(중략)

설훈 민주통합당 의원 “아, 그것 필요해요. 우리도 집권하면 이것 필요해.”

(중략)

윤진식 의원 “미리 집권할 때를 생각하셔야지.”

이인영 의원 “우리 집권 안 해도 좋으니까 그러면 하지 마요.”

(중략)

김현미 의원 “10호를 유예기간 4년 두고 이걸 4년 후에는 헌법으로 올려.”

(일동 웃음)

국정 운영 기조가 달라졌다

당시 소위 회의록을 보면 국가 재정의 문지기 역할을 해온 예타 제도에 큰 구멍을 낸 주인공은 민주통합당이었다. 최재성·이인영 의원은 지역균형발전 사업이 예타 면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같은 당 설훈 의원(현 최고위원)이 ‘집권 대비 플랜’을 앞세워 정부·여당 편에 섰고 김현미 의원(현 국토교통부 장관)도 이에 사실상 동조했다. 소위의 결론대로, 지역균형발전 사업을 예타 면제 사유(제38조 2항 10호)에 명시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2014년 1월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정의당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던 박원석 전 의원은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예타 면제 조항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기 때문에 당시 대상을 최소화하는 법안을 냈다. 뒤늦게 통과된 개정안에 (지역균형발전 사업 등이 포함된 것을 보고) ‘나중에 악용될 소지가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그 조항이 악용될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시 지역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예타를 면제해주는 개정안에 가장 반대했던 최재성 의원은 “소위에서 그런(반대) 의견을 내긴 했지만 여야 합의로 법안이 통과됐고, 그 법률에 입각해 문재인 정부가 사업을 추진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설훈 의원의 ‘빅 픽처’(큰 그림)였을까.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0월 ‘국가균형발전과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는 공공투자 사업을 선정해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며 예타 면제를 통한 SOC 투자 확대를 꺼내들었다. 10년 전 이명박 정부의 시행령, 그리고 이를 3년여 전 법률로 명문화한 국가재정법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집권 첫해인 2017년, ‘2018년 예산안’을 짜면서 대선 공약대로 SOC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아동수당 같은 사회보장제도나 청년 구직활동 지원금을 비롯한 일자리 정책에 제한적으로 예타를 면제해주던 국정 운영 기조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역의 성장판이 열려야 국가 경제의 활력이 돌아온다”며 ‘1개 광역 시·도-1개 사업 예타 면제’ 기준까지 제시했다.

경제지표 악화가 영향 미쳤나

정부의 변신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문재인 정부 2년차 들어 취업자 증가폭이 나날이 줄어들고, 건설투자 감소로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등 경제지표가 악화됐다. 이와 더불어 집권 초 80%대이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충청권과 부산·울산·경남을 중심으로 40% 중반까지 내려앉았다. 임시직·일용직이긴 하지만 취업유발계수가 크고 다른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후방연쇄효과가 큰 건설 부문 투자가 문재인 정부에는 경제지표를 끌어올리고 지역 민심을 다독이는 묘수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국정 철학에 맞게 2020년부터 10년에 걸쳐 멀리 보고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강조해도, “국민들 미래의 삶을 담보로 경기부양을 위해 선심성 토건사업에 몰두한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시혜성 사업이 대부분”(자유한국당)이라는 지적이 야당·시민사회·학계에서 끊이지 않는 이유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노무현 정부의 호남 고속철

예타 통과 못해도 성공한 사업 있지만

“호남고속철도 건설은 인구나 경제성 같은 기존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정부에서 예비타당성조사(예타) 결과 사업성이 없다고 결론 내린 호남고속철도 건설을 밀어붙였다.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정치적 결단이라고 했다. 그 뒤 2015년 개통된 호남고속철도는 1년 만에 이용객이 950만 명을 돌파했다. 지역 불균형 해소에 기여한 대표적 사회간접자본(SOC)으로 꼽힌다.

호남고속철도처럼 예타를 통과하지 못했거나 면제받은 사업도 대통령의 통치 행위로 추진이 결정될 수 있으며, 우려와 달리 성공할 수도 있다. 현재 예타는 경제성(35~50%), 정책성(25~40%), 지역균형발전(25~35%) 등을 평가지표 삼아 사업성을 평가하는데, 아무래도 경제성이 결과를 좌우하는 만큼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애먹는 지역 사업이 많다.

문재인 정부의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에 선정된 23개 사업 중에도, 경제성이 낮아 예타 통과는 어렵지만 지역 공공 인프라 확충과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사업들이 포함돼 있다. 대표적으로 평택~오송 복복선화(사업비 3조1천억원) 사업이다. KTX와 SRT(수서고속철도)가 교차하는 구간에 병목현상이 일어나 복선을 추가 건설해야 한다는 지역의 요구가 높았다. 전북 상용차 혁신성장·미래형 산업 생태계 구축 사업(2천억원)은 한국지엠(GM) 공장의 폐쇄로 지역경제가 침체된 군산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불어넣고, 울산 산재 전문 공공병원 사업(2천억원)은 중공업 공장이 밀집한 지역에서 중증 산업재해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 인프라를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그러나 지역균형발전의 명분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의 사업성은 확보되지 않고 낙관적 전망만 있는 사업이 적지 않다. 단일 사업으로 규모가 가장 큰 남부내륙철도 사업(4조7천억원)은 2006년부터 추진됐으나 예타 문턱에서 오랫동안 표류해온 사업이다. 울산 외곽순환도로(1조원), 부산 신항~김해 고속도로(8천억원), 서남해안 관광도로(1조원) 등 6개 사업도 이미 예타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다. 새만금국제공항 사업(8천억원)은 항공 수요가 부풀려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부가 사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절차인 예타를 생략하면서까지 사업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면 ‘예산 낭비’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사업들이다. 다른 정부에서 추진된 4대강 사업이나 전남 영암 포뮬러원(F1) 경주장 사업처럼 예타를 면제받았으나 결국 지역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사업이 수두룩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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