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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기관투자가 몸이 풀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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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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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주주총회장서 경영진 견제 목소리… 사전 준비로 기업 투명성 문제 등 지적

외환위기 이전 기업 주주총회는 유명무실한 거수기였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매년 반복되는 시민단체와 경영진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힘겨루기의 무대였다. 그렇다면 올해의 주주총회는 어떨까? 2월28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업들의 주총이 지난해와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잦아든 대신 기관투자가들의 목소리가 불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기관투자가들이 주총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지난 2월28일 효성주총에서 한 투자회사 관계자가 발언하고 있다. (김종수 기자)
28일 오전 10시 삼성전자 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삼성생명 건물 1층 씨넥스영화관. 경영진의 실적보고와 총회꾼으로 보이는 몇몇 참석자들의 장단 맞추기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주총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외국인투자가인 엘리어트펀드가 우선주의 보통주 전환 관련 조항을 정관에서 삭제하려던 경영진의 방침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엘리어트펀드의 사이먼 왁슬리는 대리인 최영익 변호사와 함께 참석해 “정관 개정안이 우선주 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만큼 주총 안건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있자 경영진과 다른 참석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어트쪽에 집중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우선주 주주가 무슨 권리로 그런 요구를 하느냐.” “당신들은 주총장에 들어올 수 없으니 나가라.” “우선주 주주는 발언할 권한이 없다. 변호사가 그것도 모르냐.”

일사천리 주총에 제동건 외국인투자가


올해 시민단체가 참석하지 않은 탓에 주주총회장의 분위기는 회사쪽의 일방적인 페이스였다. 의결권 없는 우선주 주주인 외국인 투자가의 외침은 그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종용 부회장이 논의를 종결하려는 순간 한 30대 주주가 일어섰다. 현대투신운용의 펀드매니저였다. 그는 보통주와 우선주를 모두 보유한 주주의 자격으로 우선주 관련 정관 개정을 보류하자는 수정 동의안을 내놨다. 윤 부회장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어 또다른 외국인 주주의 재청으로 수정 동의안은 정식 안건으로 채택됐다.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 했던 경영진이 일격을 맞은 셈이다.

물론 삼성전자는 정관 개정안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관들이 보여준 모습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주총장에서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던 기관들이 이젠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주총장에서도 확인됐다. 같은 날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풍빌딩에서 열린 고려아연 주주총회장에서는 한국투신운용 관계자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지난해 3개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지급보증이 급증했는데, 잠재적 우발채무인 지급보증 해소 방안을 밝히라”는 요구였다. 고려아연의 현지법인 지급보증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1억9700만달러며, 이 가운데 5천여만달러가 지난 한햇동안 불어난 금액이다. 기관투자가의 질책에 회사쪽은 “더이상 추가 지급보증을 하지 않겠으며 기존의 보증액도 점진적으로 해소해가겠다”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본사에서 열린 효성 주총에서도 기관의 움직임은 주요 관심사였다. 일사천리로 30여분 만에 주총을 끝내려는 순간 한국투자신탁운용 관계자가 발언을 신청했고, 그 순간 임원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투쪽은 “최근 주가가 많이 올랐음에도 내재가치에 비해 여전히 저평가돼 있다”며 “이는 IR팀의 부재에 따른 것”이라며 회사를 질책했다. 이어 과다한 차입금 규모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지적했다.

사진/ "이젠 기관 투자가들이 소액주주를 대변하련다." 지난 2월 28일 열린 삼성전자 주총에서는 외국인 투자자가 우선주 문제를 제기했다. (이정용 기자)
비록 기관투자가의 목소리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삼성전자·고려아연·효성 등의 사례는 기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민단체나 소액주주와 달리 증시에 즉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보유 지분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기관들의 변화된 모습은 긍정적이다. 특히 한국투신운용·대한투신운용·현대투신운용 등 투신업계의 빅3가 적극적인 태도로 주총에 임하고 있다. 이들은 주주총회가 시작되기 한달 전인 지난 2월 투자 비중이 크고 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회사들을 10여개씩 선정해 질의서를 보내는 등 준비작업을 해왔다. 주로 거래나 회계의 투명성, 과다한 부채, 저평가된 주가 등의 문제점을 묻는 질문들이다.

한국투신운용은 특히 고객의 이익을 위해 확실하게 의결권을 행사하라는 조영제 사장의 지시에 따라 내부적으로 문제가 되는 8개 회사를 선정하는 등 발빠른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왔다. 현대투신운용은 발행주식의 0.5%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주총 준비 작업을 벌여왔다. 대한투신운용 역시 지난 2월 15개 기업에 질의서를 보내 사전점검을 했다.

이처럼 3대 투신이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은 자신들에게 돈을 맡긴 고객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투신의 속성상 고객들의 신뢰를 잃으면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주 이익에 반하는 경영진의 행동을 방관할 경우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데 따른 소송이 제기될 수도 있다. 대투운용의 김재호 주식투자전략팀장은 “주총에서 경영진을 견제하는 것은 원래 시민단체가 아닌 기관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며 “기관이 제구실을 하게 되면 시민단체들이 나설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형식적 행동’ 지적도… 간접투자 활성화

물론 기관들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들의 역할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기업 경영진을 견제하는 데 있어서는 아직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경영진에 대한 비판도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보다는 기록에 남기기 위한 형식적인 행동인 경우도 있다. 투신업계 관계자는 “기업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도 이를 제기했다가 주가가 떨어지면 투자했던 기관에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쉽게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기관투자가들이 장기적으로 소액주주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기적인 증시 육성을 위해서는 미국처럼 간접투자의 활성화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관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3월8일부터 다시 이어질 대기업들의 주총에서 기관들이 제 역할을 얼마나 해낼지 관심이 모아진다.

삼성전자 우선주는 영원한 찬밥?

삼성전자가 2월28일 주주총회에서 우선주 관련 정관 개정안을 통과시켰음에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엘리어트펀드가 주주총회 결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고 우선주 종류주주총회(우선주 주주만 참석하는 주주총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엘리어트펀드의 대리인인 최영익 변호사는 “우선주 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사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며 “소송을 통해 법원에서 정관 개정의 적법성 여부를 따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우선주 문제는 법정 공방으로 비화하게 됐다.

현대투신운용·한국투신운용 등 기관투자가들 역시 엘리어트와 비슷한 입장이다. 삼성전자 우선주의 3.17%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투신운용의 성금성 이사는 “주총 이전에 삼성전자에 정관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며 “우선주 종류주주총회가 열리면 적극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선주 논란의 출발은 삼성전자가 주주총회를 앞두고 ‘우선주는 발행 10년 뒤 보통주로 전환한다’는 정관 8조5항을 삭제하는 의안으로 올리면서 시작됐다. 엘리어트펀드는 “우선주 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처사”라며 반발했고, 삼성전자는 “현재 유통중인 우선주는 정관이 개정된 97년 2월 이전에 발행됐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며 정관 개정안을 주총에서 통과시켰다.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이전에 발행된 우선주가 97년 2월 정관 개정으로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가’다. 정관을 변경하면 보통 부칙에 대상이 되는 우선주의 범위를 규정해야 하는데 당시 이를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는 신주인수권에 관련된 문제다. 현재는 향후 무상증자 등으로 우선주 주주들이 신주를 받게 될 때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우선주를 받지만 정관이 변경되면 전환되지 않는 우선주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선주에 포함돼 있는 잠재적인 보통주 인수권을 박탈한다는 주장이다. 삼성전자도 이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반론을 펴지 못하고 있다.

엘리어트펀드가 두 가지 모두를 문제삼는 반면 기관들은 두 번째 사안을 핵심으로 꼽고 있다. 우선주의 신주인수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종류주주총회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금성 이사는 “현재 주가에는 증자 때 보통주로 전환 가능한 우선주를 신주로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반영돼있다”며 “정관 개정이 우선주 주가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분명히 종류주주총회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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