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 4년 임기 마치고 명예로운 퇴진…소신에 따른 일처리에도 공과 평가는 엇갈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3월 말로 21대 총재의 4년 임기를 마친다. 한은 52년사에서는 총재가 임기를 무사히 끝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임기를 꽉 채운 역대 총재는 김유택(1952∼56), 김세련(1963∼67), 김성환(1970∼78, 연임), 김건(1988∼92) 총재 등 4명뿐이다. 1990년대 들어 조순, 김명호, 이경식 총재가 취임했지만 각각 재임 1∼3년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전 총재의 4년임기 만료는 김대중 정부 출범 뒤 각 부처 장관들이 숱하게 갈린 사실과도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에게 단지 임기를 채운 것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있는 점은 재경부에 맞서 나름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한은의 위상을 상당히 높여놓았다는 사실이다. 한은을 ‘재경부의 남대문출장소’로, 금융통화위원회를 ‘금융통과위원회’로 비아냥대는 소리는 전 총재 취임 뒤부터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10년 만의 명예 퇴진… 한은 위상에 기여
386세대인 기자가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1982년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대학 신입생 필독서였던 <한국경제 전개과정>(돌베개 펴냄, 1981)이란 책에서였다. 이 책에 수록된 ‘수출·외자주도 개발의 발전론적 평가’라는 논문이 바로 전철환 충남대 교수의 글이다. 여기엔 안병직, 김윤환, 박현채 등 진보적 성향의 학자의 논문들이 두루 실려 독점자본, 종속형 경제구조 등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 무렵 전 총재는 <사회정의와 경제의 논리>(한길사 펴냄), <산업과 제국>(공역, E. 홉스봄, 한벗 펴냄) 등 군사정권 입장에서 보면 제목부터 ‘불온한’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이 때문에 ‘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요즘도 전 총재는 그때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표정이 굳어진다. 새삼 80년대 초 이야기부터 꺼낸 것은 그의 이력을 알아야 그의 지적 배경도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전 총재는 전주고, 서울대 상대를 나와 13년간 공무원(경제기획원, 교통부 등) 생활을 한 뒤 76년부터 22년간 충남대 교수를 지냈다. 그런 이력이 말해주듯 총재가 돼서 지금까지 관심과 애정을 쏟는 대상은 신용협동조합, 시민단체, 소장학자들이다. 그의 생각의 뿌리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대학 시절 글로만 접했던 전철환 교수는 1998년 한은 총재로 변신했다. 정권교체만큼이나 예상 밖의 인선이기도 했다. 전 총재는 1983년부터 6년간 금통위원을 지냈고 1988년 한은법 파동 때 유일하게 한은 편에 선 소신파였다. 그러나 10년 뒤 바뀐 정권에서 총재로 임명될 때 정부나 금융계는 물론 한은에서도 반신반의할 만큼 기억에 새로운 인물이었다. 임기 마지막 1년간 곁에서 지켜본 전 총재는 학자적인 양심과 소신만큼은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보성향의 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자한 이웃어른의 풍모다. 이런 점은 그를 만난 사람들에겐 심지가 굳으면서도 서민적이고 소탈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비친다. 그는 학창 시절 태권도와 농구를 했다. 본인 말로는 농구할 때 물주전자만 날랐다지만 요즘도 농구협회의 초청을 받을 정도다. 겉인상으론 학자보다는 오히려 무골(武骨)에 가깝다. 한때 별명도 ‘이노키’(박치기왕 김일의 라이벌이었던 일본의 프로레슬러)였다. 전 총재가 얼마나 서민적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는 총재가 된 뒤에도 손수 프라이드를 운전한다. 평일 출퇴근은 한은에서 배정한 에쿠스와 운전기사에 의존하지만 퇴근 뒤 할인점 쇼핑 등 외출 때는 영락없이 프라이드를 탄다. 180cm에 가까운 거구인 전 총재가 10여년째 프라이드만 고집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작지만 견고하고 기름 덜 먹고 주차하기 편한데 좋은 차를 갖고 다니면 왠지 (사고나거나 긁힐까봐) 불안하다.” 총재 재임 중 두 아들의 혼사를 임직원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원망(?)을 듣기도 했다. 예식도 전직 교수로 할인받을 수 있는 서울 교육문화회관으로 잡아 싸게 치렀다고 자랑할 만큼 천성이 호사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즐기는 술도 찹쌀로 빚은 민속주(한산 소곡주)이고 값비싼 포도주나 양주는 총재가 돼서 귀한 손님들을 만날 때 처음 먹어봤다고 한다. 요즘 들어선 손자 자랑이 새로운 레퍼토리. 첫돌이 갓 지난 손자를 봐주다가 상처를 입은 적도 있다. “손주 놈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 이놈이 무슨 짓을 하든 귀엽습니다. 아들 키울 때는 안 그랬는데. (특유의 너털웃음으로)허허허….” 이쯤 되면 첫 손주를 본 여느 할아버지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전 총재는 이런 사람이다. 물론 이래서 투박하고 ‘컨트리풍’(촌스럽다)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은 총재로서 지난 4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한은이나 금융시장에선 대체로 긍정적이고 무난했다는 평가다. 임기 초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성실함과 시장에 대한 이해, 소탈한 성격 등으로 한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 했다는 것이다. 반면 정부 관료들은 역대 총재와 견줘 ‘평년작’이라며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금융권 ‘고평가’ 정부 ‘평년작’
1998년 정부와 정면으로 맞선 것은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그는 재경부의 외환은행 출자 및 국채 인수 요구를 ‘원칙대로’를 주장하며 끝내 버텨냈다. 그해는 한은 독립을 명문화한 개정 한은법이 시행되면서 양쪽이 미묘한 힘겨루기를 하던 시기였다.
한은 관계자의 증언. “당시 정부는 구조조정을 지지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압박해오는데 한은은 고립무원이어서 고충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 총재가 ‘법에 금한 것은 안 좋으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원칙을 강조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재경부 요구대로 됐다면 한은은 민간은행에 출자하고 돈을 찍어서라도 국채를 샀어야 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어서 정부만 탓할 일도 아니다.
전 총재와 마찰을 빚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 두 사람은 고등고시 12회 동기로 막역한 사이여서 더 아이러니다. 이런 충돌로 한때 소원해져 이들과 절친했던 이경재 전 기업은행장이 둘 사이를 중재하느라 고생했다.
정부쪽의 평가는 이와 크게 다르다. 재경부의 한 인사는 “뛰어놀 마당(독립성 보장)을 줬는데 그 정도면 크게 잘했다고 할 게 없다”며 “구조조정이 시급할 때 혼자 더러운 것 안 묻히려고 빠졌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혹평했다. 한은 주변인사도 “역대 총재들이 외풍에 휩쓸리고 간섭받았던 덕에 전 총재가 실제 이상으로 고평가되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취임 초부터 전 총재는 ‘4평짜리 연구실’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총재 임기를 마치면 충남대에 부인(국문과 교수)과 함께 모은 장서 1만권을 기증하고 책 읽을 연구실이나 하나 얻는 게 소원이라는 것. 바로 여기에서 전 총재의 강점이 나온다는 게 한은에서 보는 시각이다. ‘다음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어 할 일과 할 말을 맘껏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10년 만에 한은 임직원들은 명예로운 총재 이·취임식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오형규/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ohk@hankyung.com

사진/ 명예로운 퇴진을 앞두고 있는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 그는 한국은행의 위상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86세대인 기자가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1982년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대학 신입생 필독서였던 <한국경제 전개과정>(돌베개 펴냄, 1981)이란 책에서였다. 이 책에 수록된 ‘수출·외자주도 개발의 발전론적 평가’라는 논문이 바로 전철환 충남대 교수의 글이다. 여기엔 안병직, 김윤환, 박현채 등 진보적 성향의 학자의 논문들이 두루 실려 독점자본, 종속형 경제구조 등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 무렵 전 총재는 <사회정의와 경제의 논리>(한길사 펴냄), <산업과 제국>(공역, E. 홉스봄, 한벗 펴냄) 등 군사정권 입장에서 보면 제목부터 ‘불온한’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이 때문에 ‘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요즘도 전 총재는 그때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표정이 굳어진다. 새삼 80년대 초 이야기부터 꺼낸 것은 그의 이력을 알아야 그의 지적 배경도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전 총재는 전주고, 서울대 상대를 나와 13년간 공무원(경제기획원, 교통부 등) 생활을 한 뒤 76년부터 22년간 충남대 교수를 지냈다. 그런 이력이 말해주듯 총재가 돼서 지금까지 관심과 애정을 쏟는 대상은 신용협동조합, 시민단체, 소장학자들이다. 그의 생각의 뿌리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대학 시절 글로만 접했던 전철환 교수는 1998년 한은 총재로 변신했다. 정권교체만큼이나 예상 밖의 인선이기도 했다. 전 총재는 1983년부터 6년간 금통위원을 지냈고 1988년 한은법 파동 때 유일하게 한은 편에 선 소신파였다. 그러나 10년 뒤 바뀐 정권에서 총재로 임명될 때 정부나 금융계는 물론 한은에서도 반신반의할 만큼 기억에 새로운 인물이었다. 임기 마지막 1년간 곁에서 지켜본 전 총재는 학자적인 양심과 소신만큼은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보성향의 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자한 이웃어른의 풍모다. 이런 점은 그를 만난 사람들에겐 심지가 굳으면서도 서민적이고 소탈한 인간적인 매력으로 비친다. 그는 학창 시절 태권도와 농구를 했다. 본인 말로는 농구할 때 물주전자만 날랐다지만 요즘도 농구협회의 초청을 받을 정도다. 겉인상으론 학자보다는 오히려 무골(武骨)에 가깝다. 한때 별명도 ‘이노키’(박치기왕 김일의 라이벌이었던 일본의 프로레슬러)였다. 전 총재가 얼마나 서민적인지 보여주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는 총재가 된 뒤에도 손수 프라이드를 운전한다. 평일 출퇴근은 한은에서 배정한 에쿠스와 운전기사에 의존하지만 퇴근 뒤 할인점 쇼핑 등 외출 때는 영락없이 프라이드를 탄다. 180cm에 가까운 거구인 전 총재가 10여년째 프라이드만 고집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작지만 견고하고 기름 덜 먹고 주차하기 편한데 좋은 차를 갖고 다니면 왠지 (사고나거나 긁힐까봐) 불안하다.” 총재 재임 중 두 아들의 혼사를 임직원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원망(?)을 듣기도 했다. 예식도 전직 교수로 할인받을 수 있는 서울 교육문화회관으로 잡아 싸게 치렀다고 자랑할 만큼 천성이 호사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즐기는 술도 찹쌀로 빚은 민속주(한산 소곡주)이고 값비싼 포도주나 양주는 총재가 돼서 귀한 손님들을 만날 때 처음 먹어봤다고 한다. 요즘 들어선 손자 자랑이 새로운 레퍼토리. 첫돌이 갓 지난 손자를 봐주다가 상처를 입은 적도 있다. “손주 놈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 이놈이 무슨 짓을 하든 귀엽습니다. 아들 키울 때는 안 그랬는데. (특유의 너털웃음으로)허허허….” 이쯤 되면 첫 손주를 본 여느 할아버지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전 총재는 이런 사람이다. 물론 이래서 투박하고 ‘컨트리풍’(촌스럽다)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은 총재로서 지난 4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한은이나 금융시장에선 대체로 긍정적이고 무난했다는 평가다. 임기 초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성실함과 시장에 대한 이해, 소탈한 성격 등으로 한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 했다는 것이다. 반면 정부 관료들은 역대 총재와 견줘 ‘평년작’이라며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금융권 ‘고평가’ 정부 ‘평년작’

사진/ 진보적 성향의 학자에서 중앙은행 총재로 자리를 옮겼던 전철환 총재. 사진은 금융 통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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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총재의 임기와 함께 새 총재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전 총재의 유임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정부의 단임 원칙에 비춰 교체 가능성이 한결 높아보인다. 5년 단임 정권에서 8년짜리 연임 총재를 두길 기대하긴 어렵다는 이유 때문. 전 총재도 요즘은 마음을 비운 듯 “지방대 교수 출신으로 총재를 맡은 것도 영광인데 4년 임기를 마친 것은 더 큰 영광”이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한은 안팎에선 새 총재감으로 대략 5∼6명이 거론되고 있다. 임명권자(대통령)의 의중에 대해 섣불리 예단할 수 없지만 인물평은 설왕설래한다. 외부인사로 박승 공적자금관리위원장(중앙대 교수)이 먼저 거론되고 박영철 고려대 교수도 일간지에 한은의 역할을 강조한 기고문을 낸 이후 후보군에 포함됐다. 금융시장과 정책에 영향력이 큰 김병주 서강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은 출신 중에선 류시열 은행연합회장과 김시담 전 금통위원이 한은맨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한은 내에선 10년간 외부인사들만 총재로 임명돼 이젠 내부 인사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번에 임명되는 총재는 차기 정권과의 관계정립이 애매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중앙은행 총재를 갈아치우는 후진성이 거듭된다면 국가 신인도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
오형규/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oh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