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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주부가 월급을 받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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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3-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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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일터로 삼은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 법적지위·보상 등 위한 지표로 삼아야

김주부(가명·35)씨가 집안에서 빨래를 한다고 치자. 김씨가 자기 손으로 빨래를 하면 주류경제학은 이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닌 것으로 본다. 주부의 가사노동이 무보수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거래(상품으로 교환)되는 게 아니라는 이유로 생산 개념에서 빠지는 것이다. 생산개념에서 빠진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가사노동이 의미있는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김씨가 빨래를 세탁소에 맡기면 이 거래는 새롭게 생산된 서비스로 잡혀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된다. 빨래를 가정부한테 시킬 경우에도 하나의 생산활동에 들어간다. 물론 김씨가 집 바깥, 즉 ‘시장’에서 일을 해 품삯을 ‘벌어’오면 그의 노동은 그제야 ‘생산’으로 잡힌다.

주부 노동가치 판별 방법

사진/ 가정도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주부들의 설거지도 식사에 관련된 생산활동이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경제학원론에서 가계는 소비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가계의 기본적인 경제활동은 소비라는 것이 전통 경제학의 가르침이다. 꼼꼼히 가계부를 적고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가는 가정주부는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똑똑한 소비자일 뿐,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는 아니다. 이는 가사노동이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는 데서 비롯된다.


주부의 노동가치를 판별하는 방법들

발상을 전환해 집안에서 하는 식사준비와 빨래 등을 ‘생산’으로 확대해보자. 이때 가계는 단순한 소비공간을 넘어 ‘생산의 장소’가 된다. 가정도 서비스를 생산하는 ‘또다른 기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 개념이다. 가사노동의 가치는 밥짓는 행위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밥을 ‘생산’할 때 쌀과 주부의 노동력 그리고 밥솥이 투입되는데, 중간소비재인 쌀과 내구재인 밥솥을 사는 행위는 단순 소비가 아닌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투자’로 바뀐다.

그렇다면 주부가 가사노동으로 생산해내는 부가가치는 얼마나 될까? 가사노동의 가치의 크기를 재는 척도는 물론 노동시간이다. 노동으로 창출되는 가치는 노동시간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1999년 통계청의 ‘국민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남편이 있는 전업주부의 경우 6.69시간(20대 7.61시간, 30대 7.47시간, 40대 6.30시간)으로 나타났다.

이런 관점을 기초로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3가지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다. 우선 빨래 전문가를 고용했을 때 주는 보수를 따지는 식으로 빨래, 밥짓기, 청소 등 각 영역에서 유사한 해당 직종의 임금률로 계산(전문가대체법)할 수 있다. 또 주부가 하는 모든 집안일을 가정관리원이라는 한 사람한테 맡길 경우를 고려해 가사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주부대체비용법)도 있고, 주부가 가사노동을 함으로써 취업에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을 그만큼 희생하고 있다는 접근(기회비용법)으로 가치를 산출할 수도 있다. 가사노동 시간에 어떤 임금률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제각각 나타나는 건 물론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균관대 김준영 교수가 측정한 주부의 총가사노동 가치는 1999년에 60조∼78조원(GDP의 약 12.5∼16.3%)으로 나타났다. 국민경제성장에 주부의 가사노동이 기여하는 몫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연구에서 김 교수는 주부 1인당 연간 가사노동의 가치를 약 1360만원, 1인당 월노동가치는 113만원으로 평가했다. 나이별로 보면 30대 주부의 노동가치가 월 139만원으로 가장 높고, 20대 123만원, 40대 103만원, 50대 94만원, 60대 이상은 71만원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건 노동부가 발표한 2000년 취업여성의 월평균임금(95만4천원)이 20, 30, 40대 주부들의 한달 가사노동 가치보다 낮다는 점이다.

한편 이화여대 문숙재·윤소영 교수팀이 평가한 99년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는 57조∼102조원(GDP의 11.9∼21.4%)에 이른다. 이 연구에서 남편이 있는 전업주부의 한달 가사노동 가치는 84만∼153만원으로 나타났다. 김준영 교수의 연구결과와 비슷한 수준의 가사노동 가치가 산출된 셈이다. 그런데 여성노동자 임금률을 그대로 적용하면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임금격차가 가사노동에 그대로 반영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평균임금률(여성임금률+남성임금률/2)로 계산하면 남편이 있는 전업주부의 경우 한달 평균 가사노동 가치는 119만∼132만원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산출된 가사노동의 가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가사노동의 가치는 주부가 가사노동 대신 취업을 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주부의 법적지위와 보상 등을 결정하는 객관적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가정주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치자. 현재 손해배상의 경우 가사노동에 대한 고시가격은 일용직 도시노동자 임금이 적용되고 있다. 무직자에 준해서 전업주부의 노동능력 상실에 대한 배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성의 가사노동 가치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교통사고를 당한 주부가 받는 손해배상액은 도시노동자 임금을 적용할 때 월 73만원대다. 이는 김 교수의 연구에서 산출한 30대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 월 139만원의 53%에 불과하다. 이화여대 윤소영 교수는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를 단순히 일용노동자 임금으로 산정하고 있는 데서 보이듯, 주부 가사노동이 파출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식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혼할 때 재산분할에서도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민법은 부부가 혼인중에 형성한 재산에 대해 원칙적으로 50%씩 분할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대다수 판례는 재산의 최대 30% 정도만 전업주부가 재산 형성에 기여한 몫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가사노동 시간과 직업노동 시간을 합친 부부의 노동분담률을 보면 20∼30대의 경우 55(남편) 대 45(전업주부), 40∼50대는 59(남편) 대 41(주부)이다. 노동분담비율에 비해 주부의 재산형성 기여부분을 법원이 훨씬 낮게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가사노동 가치는 재산을 나눠가질 때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보험·이혼 등 푸대접… 국민연금 대책 필요

사진/ 국민연금도 가사노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사무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국민연금 역시 주부의 가사노동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전업주부를 남편이 든 연금의 피부양자로 볼 뿐 독자적인 생산자로 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남편과 게속 살지 않거나 남편이 사망할 경우 주부는 노후를 보장받기 어렵다. 그러나 가사노동 가치가 국민연금에 도입된다면 이혼 때만 아니라 혼인기간 중에도 재산형성에 기여한 만큼 남편의 연금을 분할해 탈 수 있다. 윤소영 교수는 “전 국민 연금시대가 다가오고 있지만 65살 이상 주부는 생활보호 장치가 없다”며 “남편이 내는 연금보험료의 일정부분을 주부가 내는 것으로 해석해서 부부가 연금을 나눠 타는 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부는 주부의 가사노동 가치에 대한 연구들을 당장 정책에 반영하기는 어렵지만 가사노동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 그만큼 주부의 지위와 권리도 향상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사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국제연합(UN)은 무보수로 이뤄지는 가정생산활동을 반영한 ‘가계생산계정’을 개발해 국민계정(국민소득, 국내총생산 등이 담긴 지표)에 포함할 것을 각국에 권장하고 있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국민총생산 활동에 포함시키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부는 이화여대 문숙재 교수팀에 ‘가사노동 위성계정 개발연구’를 맡겼고, 이 결과가 지난 3월1일 발표됐다. 연구결과 99년 우리나라 15살 이상 남녀가 가사노동으로 생산한 총부가가치는 143조∼169조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30∼35.4%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 연구는 식사준비를 위해 투입하는 시간 및 식사의 종류, 식사한 사람 숫자를 뽑아낸 뒤 이를 다시 화폐가치로 산정하는 식으로, 빨래·청소·정원가꾸기·아이돌보기 등 모든 가사노동 영역에 걸쳐 가치를 산정해 합친 것이다.

가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아늑하게 쉬는 공간이란 점에서 본 사회학적 접근이 주류를 이뤘다. 반면 이번 위성계정 연구는 가정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경제적 가치로 수치화한 것이다. 가정주부가 생산한 서비스는 가계소득뿐만 아니라 국내총생산으로 들어가 경제성장의 바탕이 된다는 게 위성계정의 출발이다. 여태껏 가계의 지출은 ‘소비’지출로만 잡혔지만 위성계정에서 볼 때 가정의 지출은 노동력 재생산을 돕기 위한 ‘투자’다. 예컨대 밥솥이 주부 가사노동과 결합되어 가계의 생산활동이 이뤄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가계의 소비는 생존적 소비이자 동시에 ‘생산적 소비’가 된다. 이런 식으로 가정 안으로 들어오는 투입요소를 모두 파악하면 가정이 생산해내는 총부가가치가 산출되는데, 비록 무보수이긴 하지만 주부의 노동이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역할은 이렇게 나타난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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