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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을 업은 ‘경제 훈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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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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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에 점거당했던 미국상공회의소의 실체… '통상압력 진원지' 오명 벗기 위해 몸부림

사무실 입구로 다가서자 경찰 서넛이 우루루 몰려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 약속이 잡혔음을 거듭 얘기해도 경찰들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겨우 경비선을 통과하자 이번엔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선다. 철문이 열리고 유리문을 넘어서고야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외국기업 이익단체로 미국 이익에 충실

사진/ 슈퍼파워 외국기업 연합회. 부시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한총련에 점거당했던 사무실이 말끔하게 정리돼 있다. (김종수 기자)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45층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코리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방한을 하루 앞둔 지난 2월18일 한총련 소속 학생 30여명으로부터 기습 점거당했던 뉴스의 현장이다. 바깥의 삼엄한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사무실 안은 온전히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연갈색 주조의 사무실 집기는 모두 제자리에 놓였고 직원들의 얼굴에서도 불안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파손됐던 대형 유리창도 말끔히 복구돼 여기가 일대 소동이 벌어졌던 농성장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바닥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검붉은 얼룩점, 사무실 집기 귀퉁이마다 미세하게 나 있는 상처들만이 며칠 전의 북새통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이요? 큰 위협은 받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유리창을 깨기는 했지만 캐비닛 위의 화분이나 액자는 얌전히 내려놓았더군요. 사무실 집기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한 목적으로만 끌어냈던 것 같습니다.” 이젠 여유를 되찾은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태미 오버비 소장은 기자를 맞으며 엷게 웃었다.

오버비 소장의 웃음과 달리 주한미국상공회의소에 대한 한국인들의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듯하다. 한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이익단체라는 차원을 넘어서 미국쪽의 통상압력 전초기지라는 게 개략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때로는 초강대국 미국의 위세를 업고 내정간섭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비난도 따라다닌다. 이는 미국상공회의소의 실체와 얼마나 일치하는 것일까?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역사는 195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설립 당시 이 단체는 한·미 두 나라 사이의 투자 및 무역 증진을 목표로 내걸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적어도 설립 목적으로만 보자면 단순히 미국 기업의 이익단체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원사 가운데는 삼성전자 같은 한국 업체나 유럽계 기업도 500여개가량 섞여 있어 이 단체가 내건 설립 목적을 헛말이라고만 돌기기 어렵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겉모습은 미국 기업의 이익단체라기보다 한국에서 활동중인 ‘여러 나라 기업들의 연합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이 대목에 이르면 미국의 이익을 앞장서 대변한다는 이 단체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왜곡돼 있다는 해석이 나올 법한데 실제론 어떨까? AMCHAM 코리아의 행적을 되밟아볼 때 이 단체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돌리기는 어렵다.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올라가면 정책 특혜를 노린 로비활동, 정보 수집을 통한 통상압력, 내정간섭에 가까운 상거래 관습 트집잡기 등 갖가지 어두운 기억과 만나게 된다. 미국의 통상압력이 특히 거셌던 80년대에는 경제부처 실무 간부들을 세미나 형식으로 온천 등에 초청해 ‘대접’(?)을 해가면서 로비를 벌인 일은 널리 알려진 행적이다. 조선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지난 85년에 한 차례 대학생들이 사무실을 점거하는 사태를 빚은 것도 국민 감정을 거스르는 이같은 행태에서 비롯된 바 큰 것으로 풀이된다. AMCHAM의 나쁜 이미지는 예전의 구체적인 행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당부분 근거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오버비 소장조차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말한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90년 11월 기록을 뒤져보면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미국 통상압력의 진원지라는 평가가 나올 만한 흔적을 곳곳에 남겨놓고 있다. 워커힐 호텔에서 경제부처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소매점업의 전면 개방, 과소비 억제 운동 중단 등 당시로선 도무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풀어놓음으로써 정부쪽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다. 그즈음 배기량 3천cc 이상인 수입자동차에 대한 자동차세를 대폭 인상하려다 이를 다시 낮추기로 한 것도 AMCHAM의 반발에 밀려 물러선 조처였다는 게 정설로 남아 있다. 회원사의 이익을 꾀하는 경제단체가 제 나름의 의견을 내는 것까지 매도할 수는 없지만 한 나라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외환위기 뒤 금융·기업 구조조정 와중에서 AMCHAM 코리아 회장이 청와대를 무시로 드나드는가 하면 경제부처 장관들을 만나는 장면이 자주 노출된 탓에 이런 반감은 최근까지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막강 영향력 행사… 이미지 변식 꽤해

물론 근래 들어선 여러 가지 이미지 변신을 꾀하며 변모하고 있다. 언론 접촉에도 비교적 적극적이며 비영리 자선기관인 ‘미래의 동반자 재단’을 설립, 실업자 구제에도 발벗고 나서고 있다. 지난 98년 8월부터 회장을 맡고 있는 제프리 존스 변호사(50·김&장법률사무소)로 인해 이미지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있다. 존스 회장은 한국 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뿐 아니라 한국 여성과 결혼, 우리나라 사정에 대단히 밝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이처럼 겉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실제 구실에서도 예전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하이닉스반도체를 비롯한 부실 기업 처리를 비롯한 현안을 두고 미국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김승운 국제본부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개방화가 크게 진전되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된 지금에는 외국계 기업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며 “한국에 진출한 자본은 국적과 상관없이 한국 기업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외국 기업이나 외국계 경제단체에 대해 마냥 부정적인 눈길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맞지도 않다는 설명이다.

이런 시각에도 불구하고 AMCHAM 코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제프리 존스 회장의 말 한마디가 언론에 크게 부각되고 이슈로 등장할 때마다 이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반발섞인 반응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 단체가 2002년에 이른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22일 현재 이 단체의 회원은 2130명. 여기에는 미국 기업뿐 아니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법인, 개인이 모두 포함돼 있다. 회원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핵심을 이루는 것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일반회원(CM)으로 모두 514개에 이른다. 한국에 진출한 미국계 기업은 모두 들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회원 숫자가 많다는 사실보다 휠씬 더 눈길을 집중시키는 점은 운영 방식이다. 회원사의 이익을 꾀한다는 명분 외에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국내의 경제단체와 달리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움직임은 대단히 활발하다. 각 회원사는 항공 및 국방, 건설, 자본시장, 인터넷 등 32개 분과위원회로 재편돼 한국의 기업 환경에 대한 면밀한 스크린(점검) 작업을 벌인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물은 여러 형태로 선을 보이는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매년 3∼4월에 발표되는 ‘연례무역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긴밀한 연락망을 통해 미국 정부 및 의회로 보고되고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에 반영돼 한국 정부에 대한 통상압력의 형태로 돌아온다. AMCHAM 코리아도 자신들이 미국 정부와 긴밀히 연계돼 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토머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가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미대사관 상무부의 최고 책임자가 이사진에 포함돼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연례보고서 작성해 미국 정책에 이바지

사진/ 미국상공회의소는 국내 경제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1999년 10월 이 단체 간담회에서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이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장철규 기자)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연례보고서가 미무역대표부의 무역장벽보고서에 반영되는 비율은 70∼80%에 이른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도 미국상공회의소 조직이 퍼져 있지만 한국에서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도 없다”며 “이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그만큼 종속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 조선, 철강, 자동차 등 네 분야 가운데 조선을 뺀 나머지 세 파트가 모두 미국 시장에 목을 매고 있는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현실에선 AMCHAM 코리아가 미국의 힘을 바탕에 깔고 단순한 경제단체 이상의 힘을 쓰는 슈퍼파워 기관이란 시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듯하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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