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태미 오버비 소장, 한국 기업인 무비자 미국 입국 추진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태미 오버비(42) 소장은 올해로 15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비상근인 제프리 존스 회장에 맡겨져 있는 대외 업무를 뺀 나머지 실무는 모두 오버비 소장의 소관으로 돼 있다.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다가 지난 1995년 AMCHA 코리아 소장에 올랐다. 주말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지독한 오토바이광이라고.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의 사무실에는 오토바이를 탄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오버비 소장은 싱글(미혼)이라며 “한국인 남자를 사귀고 싶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더욱 좋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부정적 이미지는 한국적 상황의 결과
지난번 일(2월18일 농성사태)로 한국,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겠다.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시위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이곳을 기습한 학생들은 대단히 인상적인 기억을 남겼다. 사무실에 있던 화분이나 액자를 (팔을 내젓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확 걷어치울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화분이나 액자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내려놓고 바리케이드 치는 데 필요한 것들만 끌어갔더라. 사무실 직원들에 대한 위협이 없었던 것도 다행이었다.(이 대목에서 오버비 소장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걱정한 듯 ‘그렇다고 불법적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일부 학생들의 행동에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동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덧붙였다.) 과거의 행적으로 봤을 때 AMCHA 코리아의 부정적인 이미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아닌가.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전의 그런 행적은 당시 한국의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과거 한국은 투명성이 떨어져 외국 기업이 사업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물론 우리의 노력도 부족했다. 언론과 접촉하는 일을 극도로 기피했고 한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등한시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도 다같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회원사들도 한국 경제 발전에 일조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국적은 다르지만 한배를 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AMCHAM 아닌가.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요 사항에 대해 미국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하이닉스반도체 처리를 두고 논란이 일었을 때 우리는 한국 정부 편에 섰다. 미국 정부는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지원(bail-out)을 문제삼고 나섰지만 AMCHA 코리아는 한국 경제의 특수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산업은행의 지원이 이뤄졌다. 아직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기업인들의 무비자 미국 입국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외국자본 유치 위해 정보수집 한국에 관한 정보수집의 첨단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 또한 종종 비판거리로 떠오르는데. 한국 경제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며 이를 미국에 보고하는 일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점에선 맞는 말이지만 이는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 환경을 설명하고 주로 외자(외국자본) 유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에서다.(인터뷰가 끝날 때쯤 잠깐 자리를 떴던 오버비 소장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괜찮냐’며 안부전화를 해왔다”며 조금 상기돼 있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주한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있던 어머니가 꼭 한번 와 보라고 해서 관광객으로 왔다가 역동적인 한국 경제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회사와 인연이 닿아 한 1∼2년 정도만 근무하려 했는데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시위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이곳을 기습한 학생들은 대단히 인상적인 기억을 남겼다. 사무실에 있던 화분이나 액자를 (팔을 내젓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확 걷어치울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화분이나 액자는 한쪽 구석에 얌전히 내려놓고 바리케이드 치는 데 필요한 것들만 끌어갔더라. 사무실 직원들에 대한 위협이 없었던 것도 다행이었다.(이 대목에서 오버비 소장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걱정한 듯 ‘그렇다고 불법적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일부 학생들의 행동에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동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덧붙였다.) 과거의 행적으로 봤을 때 AMCHA 코리아의 부정적인 이미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 아닌가.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전의 그런 행적은 당시 한국의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과거 한국은 투명성이 떨어져 외국 기업이 사업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물론 우리의 노력도 부족했다. 언론과 접촉하는 일을 극도로 기피했고 한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등한시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으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들도 다같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 때문에 회원사들도 한국 경제 발전에 일조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국적은 다르지만 한배를 탄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결국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AMCHAM 아닌가.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요 사항에 대해 미국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하이닉스반도체 처리를 두고 논란이 일었을 때 우리는 한국 정부 편에 섰다. 미국 정부는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지원(bail-out)을 문제삼고 나섰지만 AMCHA 코리아는 한국 경제의 특수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산업은행의 지원이 이뤄졌다. 아직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기업인들의 무비자 미국 입국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외국자본 유치 위해 정보수집 한국에 관한 정보수집의 첨단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 또한 종종 비판거리로 떠오르는데. 한국 경제 전반의 상황을 파악하며 이를 미국에 보고하는 일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점에선 맞는 말이지만 이는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업 환경을 설명하고 주로 외자(외국자본) 유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에서다.(인터뷰가 끝날 때쯤 잠깐 자리를 떴던 오버비 소장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괜찮냐’며 안부전화를 해왔다”며 조금 상기돼 있었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주한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있던 어머니가 꼭 한번 와 보라고 해서 관광객으로 왔다가 역동적인 한국 경제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회사와 인연이 닿아 한 1∼2년 정도만 근무하려 했는데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