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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가 비웃는 ‘할인 상품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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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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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깡 등으로 음성적 유통… 발행 제한 풀려 자금동원 수단으로 활용

사진/ 제값 주고 상품권 구입하면 바보? 상품권이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구둣방.(박승화 기자)
‘각종 상품권 사고 팝니다.’ 커다란 나무판자 광고판이 세로로 길게 내걸린 서울 명동 구둣방. 구두를 닦는 동안 흥정을 해보았다. “OO백화점 상품권은 얼마나 합니까?” “10만원짜리요? 9만5천원에 해드립니다.” “다른 상품권은 어떤가요. 구두상품권이라든가, 주유권 같은….” “주유상품권은 3%밖에 할인 안 됩니다. 구두권이 좀 싸서 25∼30%가량 할인되고요. 많이 사시려고?” 두평이나 될까 싶은 구둣방 선반 위에는 상품권을 담은 봉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학생 아들 둘을 두고 있다는 구둣방 주인은 “요즘 경기가 안 좋은지 장사가 시원찮다”면서 “구두 닦는 일보다 상품권 판매가 주수입원”이라고 귀띔했다.

갖가지 상품권, 구둣방에서 사무실로

백화점, 정유사, 제화회사 등에서 발행한 갖가지 상품권이 할인된 상태에서 재판매되는 통로로 구둣방이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판매점도 속속 떠오르고 있다. 서울 반포동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근처 요지에 자리잡은 대형 건물의 1층.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정면으로 보이는 화이트보드가 눈길을 잡아끈다. ‘1월31일 현재’라고 쓴 날짜 밑에 신세계, 현대, 롯데 등 세 군데 백화점 이름과 매입, 매출값이 가로 세로로 나란히 적혀 있다. 매입은 9만1700∼9만2700원, 매출은 9만2700∼9만3700원 수준이다. 시세판 아래에는 깔끔한 사무실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귤빛 소파가 놓여 있고 유리판 아래 갖가지 상품권 견본을 진열해놓은 탁자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왼쪽으로 사무용 책상을 지나 고속버스 매표소 같은 창구가 나타나고 창구 위로는 백화점상품권, 구두상품권, 문화·도서상품권, 농협상품권 따위의 할인율이 빽빽이 적혀 있다. 주유권은 1.5∼4%, 문화·도서상품권은 6%, 농협상품권은 3%, 구두상품권은 25∼34% 등이다.


상품권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점포는 명동, 강남, 신촌 등 백화점 밀집지역에 주로 자리잡고 있으며 명동지역에만 20∼30군데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전문판매점은 상품권을 소매하는 동시에 백화점 근방의 구둣방, 가판대 등에 물량을 공급하는 도매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근래 들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인터넷상의 상품권거래소(사이트)도 주요한 유통경로로 꼽힌다.

이처럼 다양한 경로를 거치면서 상품권 값은 시시각각 변한다. 롯데, 현대, 신세계 등 3개 백화점의 10만원 상품권을 기준으로 할 때 인터넷 거래소에선 7∼8%, 전문판매점에선 6∼7%, 구둣방·가판대에선 5%가량 할인된 값에 팔리고 있다. 물론 사들일 때는 이보다 1∼5%포인트가량 높은 할인율이 적용된다. 큰길 하나 건너 백화점 매장에선 10만원에 팔리는 상품권이 5∼8% 싸게 팔리는 것은 왜일까? 또 이들 상품권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곳으로 흘러들었을까.

상품권이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이유로 흔히 발행회사쪽의 떠안기기 행태가 꼽힌다. 백화점을 비롯한 상품권 발행회사가 하청업체에 납품대금 일부로 현금 대신 상품권을 지급한 게 사채시장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억원어치 물건을 백화점에 납품한 중소업체가 5천만원을 상품권으로 받았다고 하자. 현금이 필요한 납품업체는 10%가량 할인한 4500만원만 받고 5천만원어치 상품권을 사채업자에게 넘기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품권은 전문매장이나 구둣방, 인터넷 쇼핑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최종 소비자 손으로 넘어간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정이 어려운 지방의 중소백화점은 몰라도 대형백화점에선 그런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납품값 대신 상품권을 떠안기는 일은 불공정거래 행위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는 설명이다.

형편이 어려워진 일부 회사가 자금융통 목적으로 상품권을 사채시장에 내놓기도 한다. 개인 신용카드로는 50만∼100만원가량의 상품권만 구입할 수 있는 반면, 법인카드로는 억대의 상품권을 구입할 수 있어 급한 자금을 조달하는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다. 더욱이 백화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천만∼5천만원의 상품권을 대량으로 구입하면 2∼5%씩 할인해준다. 법인카드의 사용한도가 남아 있다면 사채시장에서 돈을 꾸는 것보다 훨씬 적은 부담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셈이다.

하청업체에 떠넘겨 사채시장 등에 유입

사진/ 정식 사업자 등록을 거친 전문판매점이 생겨나 성업중이다.(박승화 기자)
상품권 발행·판매 대행업체인 한국상품권컨설팅(주)의 유양열 이사는 “법인카드로 구매한 상품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하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상품권 물량이 얼마나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한 루트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현금이 아쉬운 개인들이 선물로 받은 상품권을 구둣방이나 전문매장에 팔아치우거나 발행회사가 직원들에게 상품권 판매물량을 떠안김에 따라 음성적인 시장으로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경로를 통한 유통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 들어선 신용카드를 고리로 한 이른 바 ‘카드깡’(카드할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게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온-오프라인 통합상품권을 발행·판매하고 있는 (주)아이티켓의 김태연 사장은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상품권은 대부분 카드깡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중앙일간지나 경제지, 갖가지 생활정보지에 ‘신용카드 대출 환영, 싼%’ 하는 식의 광고문도 이와 관련이 깊다는 설명이다.

급하게 100만원을 꿔야 할 처지에 있는 개인의 예를 들어보자. 백화점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신용카드로 50만∼100만원어치는 쉽게 살 수 있다. 할부조건으로 100만원어치 상품권을 구입해 사채시장 등에서 10∼15%를 떼고 85만∼90만원을 조달할 수 있다. 할부로 구입했으므로 다달이 수십만원씩 갚아나가는 방식으로 급한 불을 끄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채업자가 적극 개입해 거래를 알선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채시장 이자율이 높게는 100%를 웃돌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선이자이긴 하나 10∼15% 할인율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이 자격요건을 따지지 않은 채 카드 발급을 남발하는 분위기여서 상품권을 매개로 한 카드깡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같은 상품권 매매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지난 99년 2월 상품권법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상품권을 할인해 재판매하는 행위가 금지돼 있었다. 그렇지만 법 폐지로 이에 대한 제한이 없어졌다. 따라서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과정에서 탈세가 이뤄지는 문제를 빼면 상품권을 할인해 팔거나 사는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음침한 구둣방에서 사채업자와 연계돼 몰래 영업을 하던 데서 대로변 가판대나 커다란 전문매장에서 당당하게 영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은 이런 환경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김태연 사장은 “일본에선 상품권만을 모아놓고 전문으로 파는 매장을 금권(金券)숍이라고 부르는데, 무려 2천개가 성업중이며 프랜차이즈 형태를 띤 대형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국내에서도 일부 전문판매점이 대형화할 움직임이 있다”며 “상품권 시장이 해마다 20%씩 성장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새로운 형태의 상품권 전문판매점이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상품권 시장은 지난해 기준으로 대략 4조5천억원 수준이며 이 가운데 10%가량이 명동, 강남 등지에서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품권 발행에 대한 제한이 풀린 뒤 갖가지 상품권이 등장해 그 종류가 무려 250종에 이르고 있으며, 거래가 활발한 것은 20종 안팎이다. 상품권 시장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고속성장세를 탈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음성적인 거래도 늘어날 전망이다.

할인정보 확인 필수… 위주 상품권 경계

사진/ 백화점에서 정가로 판매하는 상품권이 사채시장등을 거치면서 시시각각 값이 바뀐다. 한 백화점의 상품권 판매코너.(박승화 기자)
상품권을 둘러싼 환경변화에 따라 대거 생겨나 한때 40개 안팎에 달했던 온라인 상품권거래소는 최근 들어 대폭 정비돼 지금은 25개 정도에 머물고 있다. 아이티켓(iticket.co.kr)처럼 단순 중개에서 직접 제작·발행하는 쪽으로 영역을 바꾼 업체가 있는가 하면 수지를 못 맞춰 문을 닫은 곳도 있다. 상품권 판매 전문사이트로는 티켓타운(tickettown.co.kr), 상품권8949(8949ticket.co.kr), 가나안상품권(gana21.co.kr) 등이 있다. 이들 인터넷 사이트는 상품권 할인율 정보를 제공하며 특정 계좌로 돈을 부쳐주면 상품권을 등기로 우송하는 방식을 띠고 있다.

구둣방이나 전문매장, 사이트를 통해 상품권을 구입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들 법도 한데 간혹 위조상품권 사건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할인 매입에 따른 위험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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