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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용카드가 사람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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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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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식 발행으로 신용불량자 양산… 개인파산 잇달아 사회문제로 비화 조짐

사진/ 신용카드 업체들은 무차별적인 카드 발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고 있다. 한 고객이 카드사의 길거리 회원 모집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박승화 기자)
경남 마산 동부경찰서 형사계에 근무하는 전아무개 형사가 역전파출소로부터 20대 여자의 변사사건 보고를 받은 건 지난 1월23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가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ㅊ전문대 2학년 강아무개(25)씨로 확인된 여자의 시신은 이미 검시가 끝나고 냉동실에 안치돼 싸늘하게 굳은 상태였다. 담당 의사로부터 제초제의 일종인 파라독신을 마셨기 때문이란 사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신을 지키고 있는 강씨의 언니(29)를 따로 불러 참고인 진술을 받은 결과 신용카드가 화근이었다. 담당 경찰관의 정황 설명을 통해 강씨의 진술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카드 빚에 몰린 한 여대생의 음독자살

“몇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새벽에 동생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약물을 마셨는데 몸이 아프다’고 하더군요. 양덕동(마산시)에서 동생 혼자 따로 자취를 하고 있거든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급하게 달려갔더니 동생이 쓰러져 있고 옆에는 농약이 든 컵과 토한 음식물 찌꺼기가 있었습니다.” 강씨는 자신이 간호사로 근무하는 인근 병원으로 동생을 급히 옮겼지만 오전 8시께 끝내 숨지고 말았다. “동생이 카드 빚을 갚지 못해 고민을 해온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도 빚을 대신 갚아준 일이 있었고…. 그러고도 1천만원이 넘는 빚이 남아 있었나 보더라고요.” 1천여만원의 카드 빚을 못 갚아 빚독촉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신용카드 빚문제는 한 젊은이의 음독자살이라는 끔찍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 이번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언젠가 땅 위로 분출될 마그마처럼 사회문제로 터져나오기를 기다리며 부글부글 에너지를 키워가고 있다. 어떤 면에선 이미 상당부분 현실문제로 떠올라 있기도 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현재 신용카드 회원 4754만명 가운데 신용불량자는 104만1천명(2.2%)에 이르고 있다. 이는 은행연합회에 등록된 전체 신용불량자 279만4천명의 37.2% 수준이다. 지난해 7월 신용카드 회원 중 신용불량자가 62만5천명이었던 데 견주어 4개월 만에 무려 66.5%나 늘어난 것이다. 전체 개인파산 신청자 중 신용카드와 관련된 비중도 2000년 40% 수준에서 지난해 70% 수준으로 높아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을 정도로 신용카드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카드업계쪽은 모범답안을 마련해두고 있다. ‘카드를 발급받은 개인이 절제있게 쓰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한 카드회사 관계자는 “카드 빚 때문에 자살에까지 이른 일은 안타깝지만 카드회사에 문제를 덮어씌우는 건 곤란하다”며 “돈을 빌려썼다가 못 갚아 어려움을 겪는 건 카드사뿐 아니라 은행을 비롯한 다른 금융기관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신용카드는 금융선진국으로 가는 매개체이며 이 때문에 정부에서도 카드사용을 적극 권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은행에서 돈을 못 꾸는 이들이 찾아오는 데가 카드사를 비롯한 2금융권인데 여기를 막으면 결국 갈 곳은 사채시장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카드에서 비롯되는 병리현상은 기본적으로 개인 고객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설명인데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지난해 10월 말 현재 국내에서 발급된 신용카드 수는 8118만장에 이르고 있다. 15살 이상 경제활동인구 1인당 3.6매씩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있는 셈인데 적정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수준이다. 이런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길거리 모집으로 대표되는 마구잡이식 영업 행태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카드회사들은 계약직 모집인을 대거 동원, 카드 1매당 1만5천원 안팎씩의 수당을 지급하면서까지 카드발급 수를 급격히 불려가고 있다.

ㅅ카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길거리 모집을 두고 비난이 많은 건 알고 있다”면서도 “은행계 카드사와 달리 전문 카드사로서는 점포 수가 적어 계약직 모집인을 통한 거리 영업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길거리 모집 과정에서 무자격자가 대거 카드를 발급받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길거리 모집을 통해 고객을 끌어온다고 해서 다 발급해주는 게 아닙니다. 유치, 심사, 발급 등 3단계를 거쳐 발급을 해주는데 모집해온 것 가운데 발급되는 비율이 30%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설사 카드를 발급받았다 하더라도 필요하지 않은 이들은 쓰지 않고 폐기처분하면 그만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며 카드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원칙적으로 고객 개인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진/ 신용카드 남발 문제가 위험수위에 올랐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3.6매의 카드를 보유하고 있다.(박승화, 이정용 기자)

무차별 발행도 이윤을 남기는 장사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법하다. 모집수당 1만5천원, 제조원가 2500원 등을 합하면 카드 1매 발급에 얼추 2만원 가까운 돈이 드는데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까? 길거리에서 모집해온 것 가운데 30% 정도만 발급으로 이어진다는 업계쪽 설명에 이런 의문은 더욱 깊어진다. 더욱이 모집 과정에서 휴대폰 단말기나 우산 같은 갖가지 선물 공세까지 펴고 있는 현실 아닌가?

금융감독원 여전감독팀의 신용철 팀장은 “꼭 필요해서 발급받은 게 아니더라도 주머니에 카드가 있으면 언젠가는 쓰게 된다”며 “신용카드사들도 이런 점을 간파하고 수당, 선물 같은 부담을 지고라도 카드 발급을 늘리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신 팀장은 “카드회사가 결제금액의 2.5%를 수수료로 챙기는 데다 현금서비스에 대해 연 20%의 이자를 받는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모집 과정에서 뿌리는 수당이나 선물은 새발의 피”라고 말했다. 카드를 통한 거래가 한번만 이뤄지면 모집수당을 비롯한 부대비용은 금방 빠진다는 것이다. 길거리 모집이 발급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30%에 불과하다는 업계쪽 주장과 달리 금감원 확인 결과 이 비율이 70∼80%에 이르고 있다는 현실도 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고객 개인이 카드를 쓰지 않으면 될 것이니 카드사들만 나무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신 팀장은 이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가족간 유대가 강해 자녀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부모가 대신 져주는 풍토가 일반적이며 카드회사들도 이런 형편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대학생이나 10대 청소년들이 대부분 변제 능력이 없음에도 문제가 됐을 때 부모가 갚아줄 것이란 예상 아래 카드회사쪽에서 자격이 모자라는 이들에게 과감하게 카드를 내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행 여신전문업 감독규정에 따르면 신용카드 발급 자격은 ‘18살 이상 일정한 소득이 있는 자’로만 돼 있어 관리가 대단히 허술한 실정이다. 신 팀장은 “카드회사들은 과거 경험상 질기게 독촉하면 반드시 받아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카드 발급 전에 심사를 엄격히 하는 ‘질적인 영업’보다는 일단 카드를 많이 발급하고 보자는 ‘양적인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8천만장을 웃도는 발급카드 가운데 3분의 1이 휴면카드일 정도로 신용카드는 이미 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또 카드 사용금액 가운데 현금서비스 및 대출 비중이 60% 수준이라는 점에서도 신용카드 본래의 기능에서 한참 동떨어진 이상증세를 엿볼 수 있다. 감독당국은 그동안 줄곧 미성년자에 대한 신용카드 발급을 자제하도록 카드사에 요구해왔지만 20살 미만의 신용카드 회원이 지난해 7월부터 4개월 동안 19만3천명에서 32만4천명으로 무려 67.8%나 늘어나 전체 카드회원 증가율 29%를 훨씬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반영하듯 10대 신용불량자도 6194명에서 7456명으로 20.4%나 증가했다. 신용카드 문제가 상당부분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데다 앞으로 터져나올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래 기능 상실… 양적 확대 지양해야

금융감독 당국은 지난해 카드사들의 마구잡이 회원모집과 지나친 대출 비중을 줄이기 위해 길거리 모집을 금지하는 등 여러 방안을 추진해왔지만 카드업계의 로비와 규제개혁위원회의 제동에 걸려 무산되고 말았다. 감독규정에 본인임을 확인한 기록을 남기고 20살 미만에 대해서는 반드시 부모 동의를 얻도록 하는 정도를 추가한 게 그나마 성과였다. 카드 빚을 얻어썼다가 펑크를 내든 말든 개인 책임이라고 팔짱을 끼고 있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개인들이 카드 빚에 몰려 대거 신용불량자로 나가떨어질 경우 카드업계를 비롯한 금융권으로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점에서도 무분별한 확대 지향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상황이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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