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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부가 투기꾼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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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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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 부양책이 투기 부추겨… 서민 울리는 부동산 띄우기는 이제 그만

사진/ 정부의 대책없는 건설경기 살리기는 서울 강남지역의 투기열풍을 몰고 왔고 부동산 투기꾼들의 배만 불렸다.(박승화 기자)
호기롭게 뽑아든 칼을 보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칼끝이 무뎌 도무지 위력을 느낄 수 없거나 칼을 뽑은 검객의 의지가 의심스럽거나. 때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는 수도 있다. 정부 합동대책반 구성, 투기우려 및 투기과열 지역 지정, 부동산 중개업소 지도·단속 강화도 모자라 세무조사까지. 서울 강남지역 투기열풍에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나선 듯하지만 여기에 듬직한 신뢰를 느끼는 이들이 많지 않다. 서민주택 건설물량을 확대한다는 약방에 감초 같은 약속도 정부의 신뢰지수를 높이는 데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정부의 뻔한 대책을 누가 두려워하랴

특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단골메뉴는 반사적으로 식상함을 불러일으킨다. 팔짱끼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냐고 이해심을 발휘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간의 정부 행적을 되밟아보노라면 이 또한 뜻같지 않다. 정부가 언제는 투기를 조장하더니 이제와서 투기꾼을 잡겠다고 나선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한 발자취를 곳곳에 어지러이 남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를 포함한 역대 정권의 주택정책 목표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주택 공급을 확대한다는 양적 목표와 투기억제 및 서민주거 안정이 그것이다. 양적 확대에 주력하는 목표에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는 것을 빼고는 누가 봐도 시비를 걸기 어려운, 더없이 훌륭한 목표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런 번듯한 목표가 현실에서 얼마나 달성되고 있느냐 하는 점인데 이 대목에서 정부의 처지는 참으로 궁색해진다. 숨막히는 통계 숫자를 나열할 필요도 없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투기바람과 전·월세난에서 이는 간명하게 설명된다.

외환위기가 터진 뒤에는 그나마 명분으로라도 지켜져오던 목표조차 헌신짝처럼 팽개쳐졌다. 외환위기 와중에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면서 투기를 부추길 가능성이 짙은 ‘건설경기 살리기’에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대형 건설업체가 무너질 경우 하청업체의 연쇄도산이 이어지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할 수 있다는 걱정은 이같은 정책에 든든하게 힘을 실어주는 명분 좋은 지렛대였다. 서민주거 안정이란 목표는 한참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이어지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기조는 고용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으로 이해해야 할까?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송태경 위원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가 도산하고 고용 사정이 심각해진 건 건설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며 “투기를 조장할 수 있는 건설업 살리기가 과연 바람직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송 위원은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면 건설업종 역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줄일 것은 줄이는 구조조정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가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현대건설 같은 대형 업체들이 줄줄이 망가진 데서 볼 수 있듯 건설업 살리기라는 목표조차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이르면 도대체 누굴 위한 정책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김대중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정권 출범 때부터 토지자본(토지소유자)의 이해를 대변할 것으로 예견됐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정권 출범 초기인 98년 4월24일 공개된 고위공직자재산 자료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은 1인당 평균 8553평의 부동산을 보유한 땅부자들이었다. 더욱이 부동산 정책의 중심축이었던 자민련쪽 인사들은 하나같이 대토지 소유자였다. 이정무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은 24억여원에 이르는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규성씨는 충남 논산군에 35만㎡, 전북 완주에 7853㎡ 등 넓은 임야와 충남 논산군의 논밭 및 서울에 대형 연립주택을 보유한 부동산 알부자로 기록돼 있다. ‘건설경기 부양→부동산 개발→토지자본 이득’이란 연쇄고리에서 땅없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은 일찌감치 물건너갔다는 해석을 끌어낸다면 너무 지나친 단순화일까? 그렇다면 대다수 사회 구성원에게는 유익하나 토지소유자에게는 불리한 토지초과이득세, 택지소유상한제, 비업무용토지 제도 같은 투기억제 장치가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잇따라 흐물흐물 없어진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토지소유자들을 위한 건설경기 부양이었나

사진/ 정부는 부동산 시장 부양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지난 1월8일 관계부처 차관들이 주택시장 안정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였다.(한겨레 서정민 기자)
건설경기 부양에 목표를 맞춘 부동산 정책은 이후 담당 부처 장관이 바뀌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정권이 깨지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줄기차게 관철된다. 그린벨트를 풀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조처가 잇따르게 되는데 수많은 정책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건설경기 살리기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투기열풍의 에너지가 차곡차곡 축적됐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부는 지난 98년 8월 및 99년 2월 두 차례에 걸친 법령 개정을 통해 아파트 분양권 매매를 전격 허용하고 청약 관련 규제들을 풀었다. 이때 역시 명분은 주택경기 활성화였다. 외환위기 뒤 형편이 어려워진 분양권 당첨자들이 중도금을 내지 못함에 따라 건설업체들이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게 그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일면 수긍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는 2001년 저금리 기조가 본격화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주요한 수단이 됐다. 이미 지난해 초부터 전세가격이 급등하고 전세가 월세로 바뀌는 등 부동산 시장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에도 정부당국의 안이함 때문에 상황 변화에 따른 적절한 후속대책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분양권 매매나 실(實)수요와 무관한 청약은 예로부터 부동산 투기의 상징이었다. 실수요와 관계없이 청약을 하고 분양권을 사고팔아 매매차익을 얻을 수 있는 풍토에선 거품이 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긴 거품은 부동산 및 전셋값 폭등, 투기 조장, 실수요자의 부동산 매입 기회 차단으로 이어진다는 교과서적 구도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실태에서 그대로 예증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 93년부터 분양권 매매를 금지하고 재당첨 제한기간(2년)을 뒀던 것인데 건설경기 회복이란 명분을 내세워 이를 덜컥 풀어버린 것이다. 범죄행위였던 분양권 전매가 합법적인 투자수단으로 둔갑한 뒤 투기 열풍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지난 1월8일 실시된 서울지역 동시분양 접수 결과 2105가구 모집에 9만1358명이 몰려들어 무려 43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난 92년 동시분양이 시작된 뒤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른바 ‘떴다방’이 활개를 치며 가수요를 잔뜩 부풀려놓은 결과다. 떴다방이 건설업체들의 은밀한 지원까지 받아가며 실수요자들을 울리고 있는 일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돼버렸다.

범죄행위가 합법적 투자수단으로 둔갑

사진/ 부동산 가격 급등세는 꺾였지만…. 정부의 세무조사 방침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을 닫은 서울 강남의 부동산 중개업소.(박승화 기자)
중앙대 하성규 교수(도시 및 지역계획학)는 “분양권 매매가 허용된 뒤 분당·일산 같은 지역에서 분양권을 전매(되팔기)하는 과정에서 무려 5천만∼1억원의 차익(불로소득)을 남긴 사실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지금도 투기적 목적으로 분양권을 샀다가 30∼40%의 차익을 남기는 일이 많은데 이는 결국 고스란히 실수요자의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분양권 매매 허용 조처를 재고할 때”라고 말했다.

서민층은 아랑곳없다는 듯 건설경기 회복에만 초점을 맞춘 부동산 정책은 분양권 매매 허용에만 그치지 않았다.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외국인에 대한 부동산 시장 대폭 개방, 주택임대 사업자 범위 확대와 양도소득세 비과세 또는 감면 조처, 주택소유자에 대한 전세반환자금 대출 등 하나같이 토지소유자 또는 건설업자쪽에 시각이 맞춰져 있는 것들투성이다. 영세상인 보호를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된 것 정도가 생색을 낼 만한 부동산 정책인데, 이 또한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의 줄기찬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경우이고 그나마 중간에서 적지않게 변질됐다.

하성규 교수는 “주택은 일반상품과 달리 공급을 늘리는 데 따라 가격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게 아닌데도 정부는 공급물량 확대라는 양적인 목표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 교수는 “주택을 많이 짓는다는 목표에 누구도 반대할 명분은 없지만 문제는 어디에, 누굴 위해 짓느냐가 중요하다”며 “토지공사나 주택공사 같은 공공기관들은 일반 분양을 위해 땅을 개발하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을 위한 소형 영구임대 주택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쏟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5% 수준에 머물고 있는 공공주택의 비중을 15∼20% 정도로 끌어올리기만 해도 대책없이 날뛰는 주택시장에서 커다란 안전판 하나를 확보하게 될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물량 위주 방안은 해결책 아니다

이런 바람과는 달리 정부가 지난 1월8일에 내놓은 대책도 서울근교 그린벨트 해제, 아파트 10만 가구 공급, 민간자본의 임대주택 투자유도 등 땅 가진 자와 건설업자에 시각을 맞춘 물량 위주 방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동산 투기를 근본적으로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처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부동산 시장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분양권 전매와 분양가 자율화 등 부동산 가격 급등을 불러일으킨 주요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경기부양 차원의 부동산 띄우기를 시급히 중단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집값 동향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간
전국 0.8 1.2 1.9 1.6 0.5 0.4 0.8 9.9
서울 1.3 1.7 2.6 1.9 0.2 0.3 1.4 12.9
강남 1.8 2.2 3.3 2.0 0.3 0.7 2.1 17.5
강북 0.6 0.9 2.0 1.6 0.1 -0.2 0.4 7.7
수도권 1.3 1.8 2.9 2.1 0.4 0.3 1.0 13.9
       

전월·전년 말 대비, 단위:%
(자료 : 국민은행)

강남을 향한 ‘맹모삼천’

지난 70년대 중반 고교 평준화제도가 도입된 서울에서는 ‘학군 따라 강남간다’는 교육열이 집값을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했다. “8학군으로 이사가자”는 교육열이 부동산 열기로 이어져 집값을 밀어올린 것이다. 요즘의 강남 아파트값 폭등에 여러 가지 이유가 얽혀 있지만 이런 ‘맹모삼천’도 한몫 거들고 있다.

이는 지난해 3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강남지역 초등학생 전입자 수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강남교육청이 지난 1월10일 강남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출한 학생을 빼고 순수하게 늘어난 전입생 수를 조사한 결과 대곡초등학교는 재학생이 1439명으로 지난 한해 271명이나 늘었다. 또 대치초등학교는 253명, 대현초등학교는 129명이 증가했다. 아파트값 폭등을 주도한 대치동에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린 셈이다. 전입생이 가장 많이 늘어난 대곡, 대치, 대현초등학교는 모두 대치동 은마, 선경아파트 주변에 있는 학교다. 특히 강남교육청 관내 초등학교(50개) 전체로 보면 전입생이 1년 새 1088명이 늘었는데, 대치동쪽 3개 초등학교가 이 가운데 650명을 차지했다.

반면 포이초등학교는 37명이 오히려 줄어드는 등 같은 강남이라도 일원동, 포이동쪽은 전입생이 줄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고학년 전입생이 늘었다는 점이다. 대곡초등학교의 경우 늘어난 전입생 271명 중 4학년이 46명, 5학년 57명, 6학년 72명으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서울시교육청은 이에 대해 “한 집안에 형제가 있을 경우 학부모가 강남으로 집을 옮기면서 중·고등학생 형을 따라 초등학생도 함께 따라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는 어떨까.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인문계 고교생의 강남 전학률을 조사한 결과, 지난해 초부터 11월까지 지방에서 강남지역 학교로 전학한 고교생은 677명으로 2000년에 비해 38.4%가 증가했다. 또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강남으로 새로 온 고교생도 611명으로 2000년에 비해 30.6%가 늘었다. 이는 경기도 내 분당, 일산 등 일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 올해부터 평준화되면서 이 지역 학부모들이 강남으로 이주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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