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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직장인은 ‘경력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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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01-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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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시장 변화로 전직 열풍에 휩싸여… 몸값 베팅하며 도전의 기회로 삼기도

사진/ 전직을 꿈꾸는 직장인이 급증하고 있다. 헤드헌팅 업체에는 이직 상담을 받으려는 직장인이 끊이지 않는다.(박승화 기자)
“제 입사동기가 30여명이었는데 3분의 1이 이미 회사를 떠났습니다. 다른 회사로 가고 유학도 떠나고 개인사업을 하겠다며 떠나기도 했죠.” 직장 경력 8년차인 대기업의 고참대리 김아무개씨. 최근 210명이 명예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탓인지 한숨섞어 말했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명퇴를 신청했기 때문일까? 널찍한 사무실의 분위기는 다소 처져 있었다. “제 동기도 이번에 3명이 나갔는데 한 사람은 경영학석사학위(MBA)를 따겠다고 하더군요. 옛날 입사할 때는 동기들이 같이 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언제든 내보낼 수 있고 본인도 언제든 떠날 수 있고, 그런 게 요즘 아닙니까?”

잘 나가던 직장인도 이력서 작성

평생직장이나 종신고용 개념이 깨진 지 오래인 지금 고용시장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헤드헌팅 업체다. 인력을 알선 및 중개하는 국내 헤드헌팅 업체는 100여곳에 이른다. 외국계 회사에 국한됐던 헤드헌팅이 대기업, 중소기업, 벤처 가릴 것 없이 퍼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헤드헌팅 업체인 유니코써어치(www.unicosearch.com)의 이정옥씨는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등 이른바 ‘잘 나가던’ 직장인들도 헤드헌팅 업체에 이력서를 내밀고 있다”며 “전직이 보편화돼 한 직장에서 5∼6년 지나면 전직을 생각하는 것이 요즘 직장인들의 풍경”이라고 말했다.


유니코써어치에 따르면 전직하려고 이력서를 등록한 회원 4만여명 중 35살 미만의 직장인이 73%, 20~30대를 합친 직장인은 89%를 차지했다. 경력으로는 대부분 5∼15년차로,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벌써부터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자신의 경력과 몸값을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반영하듯 대기업 사원인 김 대리는 “벌써 과장급쯤 되면 연봉 부담도 있고 해서 다른 회사로 옮기기 어렵지만 대리급은 어디서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력이라서 전직 기회도 많은 게 아니냐”고 했다.

이는 기업들이 상시 구조조정체제에 돌입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헤드헌팅 업체에 회원으로 등록한 이유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유니코써어치가 최근 조사한 회원등록 이유를 보면, 이직을 의뢰하기 위해(30%), 이직을 위한 정보수집을 위해(20%), 커리어 컨설팅을 받으려고(13%), 평소 경력관리 차원에서(12%)순으로 나타났다. 당장의 이직이나 고용불안 못지않게 미리 ‘준비하겠다’는 부류도 많은 것이다.

헤드헌팅 업계에 따르면, 이렇듯 사전에 이직을 준비하는 쪽은 핵심인력이 아닌 이른바 사이드워커(side-worker)가 뚜렷하다. 회사에서 자기 자리가 어정쩡하고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일해 온 사이드워커일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유니코써어치의 이정옥씨는 “헤드헌팅 업체를 찾는 직장인을 인터뷰해보면 연봉보다는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한 불만이 더 많다”며 “나름의 전문분야를 갖추지 못한 직장인일수록 다른 회사로 옮겨 원하는 직무를 찾는 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헤드헌팅 업체에 구인을 의뢰하는 기업마다 전문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드워커는 헤드헌팅 업체마다 가장 ‘골치아픈 부류’다. 아무리 기다려도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프로포즈가 없으면 조급한 마음에 “어찌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이들은 십중팔구 자기만의 전문분야가 없기 십상이다.

또다른 헤드헌팅 업체인 에이엔에스(www.acenetwork.com)에는 최근 같은 회사 직원 둘이 오전, 오후에 한나절 간격으로 이직상담을 위해 찾아왔다. 명예퇴직을 실시한다는 소문이 회사 안에 파다하게 돌자 미리 헤드헌팅 업체를 찾은 것이다. 에이엔에스의 정해탁 대표는 “어떤 기업의 팀장이 대리급 직원들을 데리고 와 한꺼번에 이력서를 내밀면서 옮길 만한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상담하러왔다가 아는 동료를 만나는 일도 생긴다. 정해탁 대표는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고나서 저녁에 퇴근하자마자 구인의뢰 기업을 찾아가 면접하는 직장인도 많다고 덧붙였다.

업무에 대한 불만, 고용 불안의 위기감

사진/ 당신의 몸값은 얼마입니까? 한 헤드언팅 업체 직원이 수북히 쌓인 이력서를 살펴보고 있다(위쪽/ 박승화 기자). 업체들은 직장인들의 편의를 위해 온라인 이력서도 받고 있다(아래).
늘어나는 기업 인수·합병(M&A)에 따른 직장인들의 괴로움도 요즘 헤드헌팅 업체에 비치는 풍경 중 하나다. 얼마 전 외국계 회사로 넘어간 ㅇ기업의 경우 새로운 환경에 견디지 못한 직원들이 한꺼번에 에이엔에스를 찾아왔다. 정해탁 대표는 “정리해고를 당한 것도, 인력을 자른다는 소문이 돌아서도 아니고 순수한 한국기업으로 옮기고 싶다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며 “회사가 외국자본에 넘어간 뒤 모든 일이 영어로 이뤄지면서 자신의 가치가 크게 깎이자 직장을 옮기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물론 직장인들이 ‘불안’만 싸들고 헤드헌팅 업체를 찾는 건 아니다. 불안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추구하는 직장인도 많다. 헤드헌팅 업체 포털사이트인 써치펌스(www.searchfirms.co.kr)의 이민기 이사는 “예전처럼 회사가 밥만 먹여주면 정년이 될 때까지 일하는 직장인은 이제 없지 않으냐”며 “우리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요즘 직장인의 상당수는 고용불안과 상관없이 이직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대규모 명퇴를 실시한 대기업인 ㅎ사쪽은 “회사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고 있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 명퇴를 신청해서 붙잡으려고 끝까지 설득하고 매달렸지만 ‘내 길을 가겠다’는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주는 고액 연봉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과감히 떨치고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중소기업으로 옮기는 일도 적지 않다. 에이엔에스에 따르면, 최근 굴지의 대기업 부장 및 과장급 6명이 이 업체를 통해 수원에 있는 종업원 200여명의 중소기업으로 갔다. 에이엔에스 정해탁 대표는 “부장급의 경우 7천여만원 받던 연봉이 되레 깎여서 중소기업으로 갔다”며 “‘작은 회사지만 비전이 있고 내가 할 역할이 크다’면서 중소기업쪽이 제시한 몸값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유니코써어치에도 최근, 대기업에서 부동산투자 관련 일을 하는 30대 초반의 직장인 이아무개씨가 찾아왔다. 유니코써어치쪽은 “회사에서 하는 업무가 자기 경력을 개발하면서 커가는 데 제한이 있다는 게 이씨의 불만이었다”며 “그래서 부동산컨설팅 전문기업으로 직장을 옮기려고 헤드헌팅 업체를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원의 중소기업에서 대기업 부장을 채용한 사례에서 보이듯 헤드헌팅 업체를 통한 인재 채용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헤드헌팅 업체는 직장을 옮긴 당사자에게는 전혀 수수료를 받지 않고 대신 채용을 의뢰한 기업으로부터 당사자의 첫해 연봉의 18∼33%가량을 받는다. 사람이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기업마다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쓸 만한 인재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이직하려면 무엇보다 전문분야를 자신의 ‘상품’으로 키워 헤드헌터의 표적이 돼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내놓을 수 있는 전문분야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유니코써어치의 이정옥씨는 “어느 정도 자신만의 고유한 전문분야 경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력서를 내놓은 뒤 6개월쯤 지나 한번 정도는 프로포즈가 가는 편”이라며 “하지만 여기저기 옮겨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도저도 아니라고 여겨 마땅히 추천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경력 없으면 상품 가치 떨어져

그러다보니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도 양극화된다. 괜찮은 커리어가 있으면 회원으로 등록한 지 1주일 만에 2∼3차례나 오퍼를 받는 반면 1∼2년이 지나도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없는 경우도 있다. 헤드헌팅 업계에서는 웬만큼 경력을 쌓았는데도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한두번 받지 못했다면 무능력하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한 헤드헌터는 “이직을 위해서는 자신과 상담하는 헤드헌터와 늘 관계를 유지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며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스카우트 대상이 될 만한 상사나 동료에 대한 정보를 주는 식으로 헤드헌터와 끈을 맺는 직장인도 있다”고 귀띔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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