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업계 가격경쟁력 악화로 불안 감돌아… 장기적으론 경제 활성화로 기회 예감
‘단기적으로 위기, 장기적으로는 기회.’ 유로화 공식 통용을 바라보는 우리 수출업계의 시각은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그러나 위기와 기회를 전망하기 전에 유로화 체제는 이미 시작됐다. 수출업계에서는 당장 컴퓨터 키보드를 유로화 심벌이 포함된 자판으로 교체하고 상품 카탈로그에 마르크나 프랑 등으로 표시된 가격을 유로화로 바꿔야 한다. 유로 회원국의 각 통화를 유로화로 전환하는 비율을 내장한 유로화 소프트웨어를 갖추는 것도 유로화 대응체제 구축에서 빼놓을 수 없다. 대우인터내셔널 김준호 외환팀장은 “프랑크푸르트와 밀라노에 있는 현지법인에서 모든 계약을 유로화로 하고 있고, 유로 회원국 개별통화로 돼 있는 옛 계약서도 유로화로 수정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3년간 실체없는 ‘장부상의 통화’로 존재해온 유로화가 올해 초부터 독일, 프랑스 등 유럽 12개국에서 단일통화로 공식 통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수출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13.6%. 미국(21.8%)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 98년부터는 해마다 70억달러대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현지법인들 분주… 소전·동전계산기 업체 특수
유로화 공식 통용으로 가장 바빠진 곳은 아무래도 유럽 현지에 나가 있는 법인들이다. 유럽에 현지법인을 차려 생산, 판매거점으로 활용해온 LG전자는 지난해 5월 유로 단일통화에 맞춘 수출입금융시스템인 통합금융센터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유럽 내 8개 법인의 자금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공동관리하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유럽 역내의 여러 법인이 각각 다른 화폐로 돈을 관리하다가 유로화 통용에 따라 하나로 합쳤다”며 “받거나 내줘야 할 이자 등을 한곳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금융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수출기업의 희비는 확연하게 엇갈린다. 기회를 잡은 곳은 유로화 통용으로 특수를 맞은 주화용 소전과 동전계산기 수출업체쪽이다. 주화용 소전 생산업체인 풍산은 이미 지난 98년부터 유럽에 유로 소전을 수출하고 있다. 소전은 도안이나 액면가가 새겨지지 않은 원형 상태의 동전이다. 풍산은 2003년까지 유로권에서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소전 35만t 중 2만2천t(약 1억달러)을 이미 공급했다. 유로화 소전은 ‘노르딕 골드’라는 황금빛이 도는 합금으로, 동전은 유로 화폐당국이 이 소전에 도안과 액면가 등을 새겨 찍어낸다. 풍산쪽은 “지난해 가장 물량이 많았는데 지금도 생산라인에서 계속 만들어 납품하고 있다”며 “동전이 모자란다는 얘기가 현지에서 들리고 있어 추가 수요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풍산은 내년까지 전체 유로 소전의 15%를 납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전계산기 생산업체인 제일주화에도 유럽쪽에서 오퍼가 들어오고 있다. 계산기(KC20) 샘플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보냈는데 테스트를 거쳐 독일 슈퍼연합회에서 100대를 주문해온 것이다. 제일주화 이강칠 전무는 “유로화 전용 주화계산기(대당 60만원대)는 물론 동전을 포장하는 기능까지 갖춘 포장기(대당 400만원대)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본다”며 “현지 은행과 슈퍼마켓으로부터 주문이 밀려들 것”으로 예상했다. 제일주화는 국내 은행권에서도 유로화 통용에 따른 동전계산기 주문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자저울 업체도 유로화 통용에 따라 매출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전자저울 생산업체인 카스는 유로화 통용으로 지난해 유럽지역 수출이 40% 정도 늘었다.
이렇듯 특수를 맞은 업체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수출기업들은 유로화 통용을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로화 통용으로 수출입에 따른 가격체계, 유통구조, 수출시장이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변화의 도화선은 제품가격이다. 국내 수출업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대목도 유로화가 가져올 수출상품의 가격인하 요인이다. 현재 유로지역에서는 제품에 따라 회원국별로 최고 40%의 가격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통화장벽이 무너지고 단일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가격투명성이 높아지면 장기적으로 가격이 내려갈 공산이 크다. 단일 화폐로 지역별 제품가격이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연구위원은 “당분간은 일물일가(一物一價)로 통일되지 않고 5∼10% 범위에서 가격 차이가 유지되겠지만 장기적으로 제품값이 떨어져 국내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 약화와 수출 채산성 악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유로화 통용은 유로권 안에서의 역내무역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거래비용 절감으로 원가경쟁력이 높아지고 환 위험까지 제거된 유럽기업들이 수출입보다는 역내 거래비중을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유럽시장 블록화로, 단일 통화가 또다른 시장장벽을 만드는 셈이다. 김득갑 연구위원은 “그동안 환리스크나 거래비용 부담 등으로 수출에 무관심한 채 국가별 내수시장에만 안주해왔던 유럽의 중소기업들이 이제 유로지역 전체를 내수시장으로 삼고 시장진출 확대를 꾀할 것”이라며 “이에 따라 국내 수출기업은 더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여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제품 가격차 해소·역내무역 강화 등 부담
우리나라의 유럽지역 수출품목은 금액기준으로 선박이 1위며, 그뒤를 자동차, 컴퓨터,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등이 뒤따른다. 자동차는 지난해 11월까지 143만대를 해외에 수출했는데 이중 38만3천대를 유럽에 팔았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유기홍 팀장은 “유로화 환율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수출의 명암이 엇갈리게 됐다”며 “앞으로 진행될 유로지역에서의 제품값 인하에 대비해 자동차업계마다 가격 전략을 전면적으로 다시 짜야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업계는 유럽에서 15∼50%까지 큰 가격차를 보이고 있는 소형차의 경우 당장 가격인하 압력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가격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유로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된 것이다.
유럽이 최대 수출지역인 선박업계도 환리스크를 우려하고 있다. 선박 수출의 경우 그동안 유럽쪽에서도 달러 베이스로 대금결제를 해왔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대우조선 외환업무팀 서재탁 부장은 “앞으로 유로화 결제를 요구해올 것으로 본다”며 “선물환 시장을 통해 환리스크에 대처하는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유로화 통용이 수출업체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얘기다. 대우인터내셔널 김준호 외환팀장은 “단일통화로 가격 비교가 쉬워지면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금방 쓰러지고 자연스럽게 인수·합병(M&A)과 구조조정이 활발해질 것”이라며 “이를 통해 유로지역의 경제가 활성화하고 규모가 커진다면 수출업체에는 교역 기회가 그만큼 넓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전망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유로화로 수출업체에 먹구름이 드리웠건만….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럽중앙은행 앞에서 지난 1월1일 0시에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한겨레 함석진 기자)

사진/ 반갑다, 유로화! 유로화 소전을 공급하는 풍산의 유로 덩전 생산모습.

사진/ 걱정된다, 유로화! 유럽이 최대 수출지역인 선박업게는 환리스크에 대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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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채무국이자 무역적자국은 어디일까?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폭은 해마다 늘어 국내총생산(GDP)의 4.5%에 이른다. 다른 나라가 이 정도였다면 벌써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외환위기는커녕 미국은 얼마 전까지 신경제 호황을 누려왔다. 그 비밀은 기축통화 노릇을 하는 달러에 있다. 모든 나라는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하면 빌려와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파산이다. 그러나 미국은 달러가 모자라면 찍어내면 그만이다. 현재 미국 바깥으로 나가 있는 달러는 대략 4천억달러.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찍어낸 달러의 70%에 이른다. 심각한 경상수지 적자를 자본수지 흑자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미 재무성 국채를 사려는 외국자본이 미국으로 끊임없이 흘러들면서 자본수지 흑자를 내고, 이에 따라 미국은 이자율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다시 민간소비와 기업투자 증가를 가져온다. 미국의 적자를 외국자본이 지연시켜주는 셈이다. 이는 기축통화로 달러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누리는 혜택이다. 달러가 위험하면 전세계가 시장개입에 나서 달러가치 안정을 도모하는 건 물론이다. 유로화가 공식 통용되면서 유로화가 달러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인가? 경제전문가들은 유럽이 유로권 역내무역까지 합쳐 전세계 무역의 35%를 차지하는 만큼 각국의 외환 보유고나 결제통화 비중에서 달러의 위상을 크게 잠식할 것으로 점친다. 그러나 달러의 전횡을 견제하는 강력한 견제수단이 될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유로화는 아직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갓 태어난 통화라서 안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상반기 국제 채권발행 통화 중 36%를 유로화가 차지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유로화가 ‘강한 통화’로서 점차 달러에 도전할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