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상품 사업체 잡음으로 속타는 중소기업들… 비싼 로열티에도 판로 막혀 위기로 치달아
공장 문에 큼지막하게 내걸린 플래카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2002월드컵 코리아/저팬 공식 상품화권업체.’ 지난해 12월26일,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의 (주)루트. 자외선 차단용 모자를 생산하는, 직원 58명인 중소기업이다. 공장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업대 위에 각종 모자 몇개가 놓여 있고, 모자마다 찍힌 월드컵 공식로고가 선명했다. 이미 생산이 거의 끝난 때문인지 공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 회사가 월드컵 특수를 노리고 제작한 자외선 차단 모자가 10여 가지입니다. 대형 할인점을 통해 모자를 내다팔고 있지만 아직 월드컵 공식판매점에는 물건을 대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공장에서 만난 루트의 김대수 본부장은 판로부터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텅 빈 작업대와 달리 공장 지하 1층 창고에는 이미 생산한 모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월드컵 붐이 본격적으로 일면 출시할 요량으로 신상품도 기획해둔 지 오래지만 판로 확보부터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상품화권자 제품도 판로 확보 못해
이번 월드컵 기간중 중소기업이 뛰어들어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월드컵 상품 시장규모는 5천여억원. 이 시장의 한복판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의해 선정된 국내 월드컵 공식상품 사업체인 CPP코리아(이하 CPP)가 있다. 월드컵 특수를 노리고 있는 중소기업체는 크게 △CPP로부터 납품주문을 받아 월드컵 상품을 생산하는 중소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업체(50여개) △CPP로부터 월드컵 로고 사용권한(라이선스)을 받아 독자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라이선시업체(60여개) △중소기업청이 주관하는 월드컵중소유망기업(320여개)으로 나뉜다. (주)루트는 라이선시업체 중 하나다. CPP는 FIFA와 라이선시업체 사이에서 월드컵 로고 사용권을 파는 채널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가 라이선시업체처럼 월드컵 로고를 붙여 상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의류, 가방, 모자 등 30여 품목, 500여 종류의 월드컵 상품을 주문생산 형태로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역 광장과 지하철역 구내 등에 설치된 월드컵 공식상품 매장은 CPP로부터 위탁받아 지역 총판이 운영한다. 월드컵 상품 매출은 월드컵이 특별한 이벤트인 만큼 아무래도 공식상품 매장을 중심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루트가 이쪽에 상품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CPP의 독점적 운영’이 가로놓여 있다. “목이 좋은 주요 장소를 이미 지역 총판이 점거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고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가 끼어들기 힘들다”는 게 라이선시업체들의 하소연이다. 실제로 일부 공식매장에는 월드컵 로고가 없는 일반 상품까지 진열하고 있다. 루트의 김대수 본부장은 “공식매장을 운영하는 총판쪽과 결제조건을 타진하고 있지만 서로 결제조건이 맞지 않아 공식매장쪽으로 아직 판로를 뚫지 못한 상태”라며 “그래서 라이선시연합회 차원에서 독자적인 공동마케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월드컵 라이센시연합회는 루트를 비롯해 CPP에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라이선스를 산 중소업체(라이선시)들이 모인 단체다. 루트의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라이센시연합회 사무국에는 월드컵 공식로고가 붙은 쌀막걸리, 물통, 연필통, 수건, 양말 등 각종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28개 중소기업체가 생산한 월드컵 상품들이다. 라이센시연합회쪽은 “회원사가 다들 중소업체다보니 마케팅 능력이 약해 서로 뭉쳐야 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연합회를 차렸다”며 “비싼 로열티를 냈지만, 월드컵조직위는 우리한테 별 관심도 두지 않고 있고, 마냥 기다리다 재고만 쌓일 판”이라고 말했다. 사실 라이선시업체들은 로열티를 물고 월드컵 로고 사용권만 받으면 마케팅은 걱정할 게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라이선스를 받고나서 보니 CPP가 운영하는 공식매장으로의 유통이 어렵게 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이 꼬이자 라이선시업체마다 ‘월드컵 특수’에 의문을 품고 수익성을 다시 따져보고 있다. 이는 CPP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상품은 140여종이지만 정작 나온 상품은 42종에 불과하다는 게 그대로 보여준다. 월드컵마케팅이 뜻하지 않는 암초를 만난 셈인데, 이는 월드컵마케팅이 올림픽과 달리 CPP 등 순전히 ‘돈의 논리’를 따르는 민간업자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미처 몰랐던데서 비롯된다. 업계에서는 “비싼 로열티 내고 월드컵 장사를 제대로 못하면 망신이기 때문에 FIFA에 준 로열티를 서로 묻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업체마다 낸 로열티는 제각각이지만 수천만원에서 1억5천여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휘청대는 CPP에 운영권 입씨름까지
논란이 일자 매장을 운영하는 총판쪽은 CPP가 주문생산한 상품뿐만 아니라 라이선시업체들의 물건도 취급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양한 상품구색을 갖추는 게 좋다”고 하면서도 라이선시업체는 어디까지나 월드컵 상품의 ‘주변부’라고 주장한다. 서울·수도권지역 총판인 ‘지앤비월드’쪽은 “월드컵 상품화 사업의 주체는 CPP로부터 주문생산하는 OEM업체들이지 결코 라이선시사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라이선시업체와 총판쪽이 매장사용 조건을 놓고 줄다리기만 거듭하고 있는 데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이러다보니 라이센시연합회쪽에서 “총판이 커넥션을 맺고 CPP가 자체 공급하는 물건만 유통하려 한다”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판이다.
중소기업 월드컵 특수가 물건너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는 ‘휘청거리는 CPP’도 한몫 거들고 있다. 지난해 말, CPP로부터 월드컵 상품을 주문받아 납품해온 중소의류업체들이 CPP와 총판으로부터 물품대금을 받지 못해 부도 지경까지 몰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일이 터지자 FIFA와 월드컵조직위는 영국인 사장이 맡고 있던 CPP 운영을 국내업체인 코오롱TNS에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여지껏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CPP가 OEM업체들에게 진 부채 해결을 둘러싸고 양쪽 사이에 입씨름만 되풀이하고 있다. 월드컵조직위 이경성 과장은 “그동안 CPP가 기존 납품업체와 맺었던 계약은 승계될 것”이라며 “월드컵을 코앞에 둔 만큼 CPP 내부 문제가 빨리 매듭돼야 할 텐데 CPP와 코오롱 사이에 조정이 잘 안 되고 있다”고 곤혹스러워했다.
CPP가 흔들리자 일본쪽으로 월드컵 특수를 돌리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나무로 만든 장식용 월드컵축구공 ‘아트볼’을 내놓은 동양아테크는 월드컵 공식매장에는 상품을 내놓기 어렵게 되자 일본쪽에 샘플 3천개를 보냈다. 먼지만 켜켜이 앉은 채 창고에 쌓인 축구공 4만여개의 판로를 일본쪽으로 튼 것이다. 동양아테크 전성호 본부장은 “국내에서는 팔려고 해도 내놓을 자리가 없다”며 “게다가 CPP가 흔들리고 있는 판이어서 라이선시들도 덩달아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CPP사태를 겪으면서, 월드컵 특수를 잡으려던 중소기업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라이센시연합회 윤희진 과장은 “결제조건도 문제지만, 월드컵 공식매장에 라이선시업체들이 물건을 납품했을 때 물품대금 결제를 믿을 수 있도록 안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납품했다가 물품대금을 못 받은 OEM업체 꼴이 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게 없는 ‘안개 속의 월드컵 특수’, 이것이 중소기업이 처한 형편인 셈이다.
라이선시업체뿐만 아니다. CPP가 휘청거리면서 당장 타격을 입고 있는 곳은 OEM업체다. OEM방식으로 CPP에 월드컵 모자를 납품하고 있는 (주)영안모자의 전종열 과장은 “지난해 8억원가량의 월드컵 매출을 예상했지만 실제 매출은 1억7천만원에 불과했다”며 “그나마 CPP 사태가 터진 뒤인 지난해 11월부터는 오더마저 끊긴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월드컵 마케팅 특수를 살리려면 이미 오더를 받아 생산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갑갑한 노릇이라고 한탄했다.
중소기업청에서 주관해온 월드컵 유망기업 지원사업도 벽에 부닥치긴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청은 월드컵 공식상품 사업체인 CPP를 제쳐놓고 따로 유망기업을 선정해왔다가 라이선스 없이는 월드컵 상품을 제대로 팔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이런 탓에 중소기업청이 선정한 월드컵 유망기업 320여개 중 라이선스를 받은 업체는 15개에 불과하다. CPP의 김영규 전무는 “최근에서야 중소기업청쪽에서 라이선스 협의가 들어왔다”며 “하지만 우리가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해 라이선스를 내주는 품목과 중소기업청 유망기업이 생산하는 품목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많다”며 곤혹스러워했다.
일본으로 우회도… 혼돈의 끝은 오려나
게다가 이미 라이선시업체들에게 내준 품목을 월드컵 유망기업에 중복해서 내줄 수도 없는 처지다. 라이선스를 받지 못한 대부분의 월드컵 유망기업은 헛물만 켤 공산이 크다. 월드컵유망기업협의회 이태영 회장은 “월드컵 붐도 일어나지 않은데다 업체들이 판로를 각자 알아서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애를 태웠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청은 “월드컵 개최도시에 자체 매장을 설치해 판로를 확보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27억원에 불과한 월드컵유망기업지원기금으로 수백억원이 드는 매장을 설치할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다. 월드컵조직위는 2월부터 월드컵 특수 붐이 본격적으로 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녹색의 그라운드 뒤편 월드컵마케팅 시장이 곧 달아오른다고 하지만 정작 “시장을 잡겠다”고 나선 업계 내부는 혼돈 속에 갈팡질팡하고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월드컵 마케팅은 '돈의 논리' 에 충실한 민간업자 중심으로 이뤄진다. CPP가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월드컵 공식상품매장.(이용호 기자)
이번 월드컵 기간중 중소기업이 뛰어들어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월드컵 상품 시장규모는 5천여억원. 이 시장의 한복판에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의해 선정된 국내 월드컵 공식상품 사업체인 CPP코리아(이하 CPP)가 있다. 월드컵 특수를 노리고 있는 중소기업체는 크게 △CPP로부터 납품주문을 받아 월드컵 상품을 생산하는 중소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업체(50여개) △CPP로부터 월드컵 로고 사용권한(라이선스)을 받아 독자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라이선시업체(60여개) △중소기업청이 주관하는 월드컵중소유망기업(320여개)으로 나뉜다. (주)루트는 라이선시업체 중 하나다. CPP는 FIFA와 라이선시업체 사이에서 월드컵 로고 사용권을 파는 채널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가 라이선시업체처럼 월드컵 로고를 붙여 상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의류, 가방, 모자 등 30여 품목, 500여 종류의 월드컵 상품을 주문생산 형태로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역 광장과 지하철역 구내 등에 설치된 월드컵 공식상품 매장은 CPP로부터 위탁받아 지역 총판이 운영한다. 월드컵 상품 매출은 월드컵이 특별한 이벤트인 만큼 아무래도 공식상품 매장을 중심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루트가 이쪽에 상품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CPP의 독점적 운영’이 가로놓여 있다. “목이 좋은 주요 장소를 이미 지역 총판이 점거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물건이 없어서 못 팔고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가 끼어들기 힘들다”는 게 라이선시업체들의 하소연이다. 실제로 일부 공식매장에는 월드컵 로고가 없는 일반 상품까지 진열하고 있다. 루트의 김대수 본부장은 “공식매장을 운영하는 총판쪽과 결제조건을 타진하고 있지만 서로 결제조건이 맞지 않아 공식매장쪽으로 아직 판로를 뚫지 못한 상태”라며 “그래서 라이선시연합회 차원에서 독자적인 공동마케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월드컵 라이센시연합회는 루트를 비롯해 CPP에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라이선스를 산 중소업체(라이선시)들이 모인 단체다. 루트의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라이센시연합회 사무국에는 월드컵 공식로고가 붙은 쌀막걸리, 물통, 연필통, 수건, 양말 등 각종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28개 중소기업체가 생산한 월드컵 상품들이다. 라이센시연합회쪽은 “회원사가 다들 중소업체다보니 마케팅 능력이 약해 서로 뭉쳐야 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연합회를 차렸다”며 “비싼 로열티를 냈지만, 월드컵조직위는 우리한테 별 관심도 두지 않고 있고, 마냥 기다리다 재고만 쌓일 판”이라고 말했다. 사실 라이선시업체들은 로열티를 물고 월드컵 로고 사용권만 받으면 마케팅은 걱정할 게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라이선스를 받고나서 보니 CPP가 운영하는 공식매장으로의 유통이 어렵게 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이 꼬이자 라이선시업체마다 ‘월드컵 특수’에 의문을 품고 수익성을 다시 따져보고 있다. 이는 CPP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상품은 140여종이지만 정작 나온 상품은 42종에 불과하다는 게 그대로 보여준다. 월드컵마케팅이 뜻하지 않는 암초를 만난 셈인데, 이는 월드컵마케팅이 올림픽과 달리 CPP 등 순전히 ‘돈의 논리’를 따르는 민간업자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미처 몰랐던데서 비롯된다. 업계에서는 “비싼 로열티 내고 월드컵 장사를 제대로 못하면 망신이기 때문에 FIFA에 준 로열티를 서로 묻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업체마다 낸 로열티는 제각각이지만 수천만원에서 1억5천여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휘청대는 CPP에 운영권 입씨름까지

사진/ 월드컵 툭수는 물거품이 되고 말 건가. 경기도 성남시에서 자외선 차단용 모자를 생산하는 (주)루트의 노동자들.

사진/ 월드컵 상품은 공식매장을 통해 판매가 이뤄질 전망이다. 하지만 지역총판을 통하지 않고 끼어들 자리는 거의 없다.(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