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 비관론에 엔화 약세 가속화… 국내기업들 가격경쟁력 떨어져 수출 타격
‘엔화 약세’가 새해 국내경제에 찬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지난해 12월28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131.21엔으로, 일단 내림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시장은 엔화 약세를 이미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엔-달러 환율이 127엔대를 넘어선 것은 지난 98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엔화 약세에 덩달아 원-달러 환율도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엔화와 원화의 약세 동조화 현상이다. 국내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엔화가치 급락의 영향으로 12월27일 달러당 1331.0원까지 치솟았다.
엔화 약세에 따라 원화도 동반 하락
그동안 원화는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강세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11월 말 이후 엔화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원화도 한꺼번에 하락하고 있다. 엔화 약세가 곧바로 달러 매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외투자자들이 엔 약세에 따른 아시아권 통화가치의 동반 하락에 대비해 환리스크 방어 차원에서 달러 매수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아시아통화를 엔화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있다. 한미은행 외환딜러 유현정씨는 “엔화가 연중 고점인 126엔대를 깨면서 시장에서 엔 약세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며 “엔 약세가 달러 매수를 강하게 끌어당기자 국내 외환시장에서도 달러 매수 심리가 퍼지고 있고, 엔화 약세에 따른 원화 약세가 ‘학습효과’처럼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나라 수출품목 중 일본과 국제시장에서 경합하는 품목이 많은 만큼 국내 실물부문의 피해가 예상되고 이것이 원화 약세로 미리 시장에 반영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높은 만큼 환율로 인한 수출 타격은 당장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엔화 약세가 국내 경기회복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또 원화 약세에 따라 가만히 앉아서 손실을 입게 된 외국자금이 국내시장에서 이탈하면 주식시장도 출렁거리게 된다. 엔화 약세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에서 오고 있다. 지난해 2·3분기에 일본경제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4분기는 물론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은행 이응백 외환시장팀장은 “일본이 제대로 구조조정을 못한 탓에 경기회복이 늦어지고 있다”며 “일본 경기회복에 대한 비관론이 엔화 약세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당국의 엔저 유도
이처럼 일본경제의 앞날에 대한 불신감에서 비롯된 게 엔화 약세지만 더 큰 요인은 다른 데 있다. 일본 당국이 ‘의도적으로’ 엔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통해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재정 확대나 제로금리로 내수를 부추겨 경기를 띄우려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당국은 환율 수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계산이다. “현 수준의 엔-달러 환율은 괜찮다”는 일본 재무성 재무관 구로타 하루히코의 발언은 이런 맥락과 같이한다. 이같은 일본 당국의 엔화 약세 유도는 당장 외환시장에서 추가적인 엔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엔화가 더욱 하락할 것이라는 심리가 시장에 팽배해지면서 고삐 풀린 듯 엔화가치가 추락하는 것이다. 일본 통화당국이 조만간 외환시장에 개입할 것이라는 말만 ‘시사’해도 시장의 흐름을 되돌려놓을 수 있지만 ‘정책적으로’ 엔화 약세를 유도하고 있는 마당인 만큼 그럴 가능성은 당분간 없다.
그렇다면 엔 약세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국제상품시장에서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제조업계는 엔 약세를 우려하고 있지만 테러에 대한 보복전쟁으로 일본의 군사적 협조가 필요한 미국 정부로서는 경제적인 문제에 관대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 정치적 요인 때문에 엔화 약세를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98년 엔화가 148엔으로 치솟았을 때 위안화 평가절하로 맞대응하겠다고 나서면서 제동을 걸었던 중국도 지금은 조용한 편이다. 사실 고도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엔화 약세에 따라 중국으로 외국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뒤에서 웃고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국제금융환경이 ‘적과 동지’를 구분해 대응하기가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대체로 엔화가 달러당 135엔대에 이르면 미국쪽의 우려 표명 등 ‘적절한 조처’가 취해질 것으로 점치고 있다. 심리적 저항선이 135엔대라는 얘기다. 한미은행 외환딜러 유현정씨는 “앞으로 엔-달러 환율은 135엔 정도, 원-달러 환율은 1350∼1360원을 기록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엔화 약세에 따라 자국 수출이 감소하면 아시아 각국이 너나 할 것 없이 통화가치를 절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이 노리는 수출증가도 한계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국제상품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상품이 많다는 점에서 엔화 약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가장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수출품목은 세탁기, VTR,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컴퓨터, 자동차 등이다. 자동차는 이미 엔화 약세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에 따르면 북미시장에서 일본은 엔화 약세에 따른 가격경쟁력 강화로 11월부터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했다. 차를 파는 딜러들에게 판매 1대당 마진을 더 준다든가 소비자에게 찻값을 깎아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환율에 따른 이익을 판매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산업연구소 공정호 연구원은 “1월1일 출범한 유로화가 강세를 보일 경우 엔화 약세를 바탕으로 일본차가 유럽에서도 강한 판매 드라이브를 걸면서 먼저 치고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엔 약세-원 강세’에 대비해야
문제는 엔화 약세와 원화 약세의 ‘속도’다. 엔화가치가 떨어진 만큼 원화가치도 떨어진다면 국제상품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하는 데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동조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엔화보다 원화의 약세 속도가 느리다. 무역협회 신승관 조사역은 “지금 추세는 엔화 환율이 1% 오르면 원화는 0.3% 정도 오르고 있는 형국”이라며 “엔화 약세가 훨씬 빨리 진행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무역협회는 일본 제품과의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는 적정 원-엔 환율 수준을 100엔당 1073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엔 환율은 12월28일 1007.6원으로 떨어져 1년 전 1101.5원 때와 견줘 9.1%나 올랐다. 바꿔말하면 엔화가치가 10% 가까이 절하된 것으로, 무역협회는 이럴 경우 우리나라 수출이 27억달러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동조 약세가 깨지고 원화가 상승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엔화 환율은 올해 135∼140엔대에서 멈춘 뒤 일본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오래도록 머무르겠지만 우리쪽은 경기회복이 가시화될 경우 원화가 강세를 띨 공산이 큰 것이다. ‘엔 약세-원 강세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시나리오는 일본과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는 우리 수출기업에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추락하는 일본경제의 끝은 어디인가. 일본이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한다는 분석도 있다.(교토연합)
특히 우리나라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높은 만큼 환율로 인한 수출 타격은 당장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엔화 약세가 국내 경기회복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또 원화 약세에 따라 가만히 앉아서 손실을 입게 된 외국자금이 국내시장에서 이탈하면 주식시장도 출렁거리게 된다. 엔화 약세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에서 오고 있다. 지난해 2·3분기에 일본경제는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4분기는 물론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은행 이응백 외환시장팀장은 “일본이 제대로 구조조정을 못한 탓에 경기회복이 늦어지고 있다”며 “일본 경기회복에 대한 비관론이 엔화 약세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당국의 엔저 유도


사진/ 엔화 약세로 우리나라 수출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국산 자동차는 엔화 약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여있다.(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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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조성종 한국은행 도쿄사무소장 엔화 약세에 대한 일본의 분위기는. =최근 우리나라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이 “환율을 가지고 수출촉진을 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은 더 확실한 구조조정으로 경제회복을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전하고 있다. ‘일본이 저 혼자만 생각하고 국제 외환시장의 동요를 외면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 외환위기 직전 엔화 환율이 140엔까지 갈 정도로 엔화 약세정책을 취했는데, 그래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쟁력이 약화됐고 이것이 주변국의 국제수지 악화와 외환보유고 부족사태를 불러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동안 일본이 구조조정을 제대로 안 했는가. =일본경제는 이제 막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만 32조엔, 신용금고 등이 40조엔의 불량채권을 갖고 있다. 뒤지면 부실채권이 더 나올 거라고 한다. 그동안 재정을 풀어 경기부양을 꾀했지만 돈을 퍼붓기만 했지 실제 구조개혁이 안 됐다. 그래서 정부부채만 더 쌓였다. 도저히 못 견디다가 이제서야 구조조정을 시작하는 단계다. 엔화 약세를 둘러싸고 일본 정부와 은행이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 정부는 은행에 외국채권 매입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채권 매입에 따라 엔화가 풀리면 통화공급이 늘어 경기회복이 온다는 논리다. 이렇게 되면 엔화 약세가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자금운용 차원에서 외국채권을 사는 건 몰라도 통화공급 목적으로 외국채권을 사는 건 은행법 위반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 논란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엔화가 더 가파르게 약세를 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약세가 꺾일 수도 있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