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5월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세안+3’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앞두고 나란히 섰다. 정부와 한은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놓고 갈등 중이다(왼쪽 사진).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4월26일 열린 ‘구조조정 협의체’에 참석하러 들어가고 있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연합뉴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1. 구조조정, 왜 갑자기 문제가 됐나? 정부와 시중은행들은 해마다 기업신용위험을 평가해 부실 징후가 있는 기업을 걸러낸다. 그중에서 경영 정상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기업들은 기촉법, 통합도산법 등을 적용해 시장에서 퇴출한다. 회생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업과는 채권금융기관이 자율협약을 맺어 인력 감축, 자산 매각 등을 시도한다. 2009년 금호, 2012~2013년 동양과 웅진, STX 등이 이렇게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 작업)에 들어가거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았다. 지난해 10월부터 정부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관계부처와 국책은행이 참여하는 ‘구조조정 협의체’를 운영해왔다. 특히 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 등 5개 경기 민감 업종을 집중해 들여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제 와서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난리인 걸까? 발단은 “기업 구조조정을 더 미룰 수 없다. 직접 챙기겠다. 속도를 내겠다”(4월15일 미국 워싱턴 기자간담회)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여기에다가 “제대로 된 기업 구조조정에는 협조하겠다”(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지금은 미시적인 구조조정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며 야당 대표들이 ‘맞장구’치면서 구조조정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힘을 얻은 ‘구조조정 협의체’는 4월26일 구조조정의 3개 트랙(하단 그림 참조)을 발표했다. 대선 국면이 시작되는 올 12월 이전에 구조조정을 마무리짓겠다는 속내다. “이미 많은 기업이 기존 절차에 따라 실질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총선 이후 부총리가 구조조정을 직접 챙기겠다고 갑자기 나섰다. 무슨 법적 권한으로?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에 나서고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는 게 문제다. ‘구조조정’이라는 용어도 여야가 동상이몽으로 쓰고 있다.”(하준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 [%%IMAGE3%%] 2.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은 왜? 그런데 구조조정 논의가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이 벌어지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게 된 탓이다.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란 기준금리가 제로에 가까운 경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풀어 경기 부양을 끌어내는 통화정책을 말한다. 여기에 ‘한국판’이라는 단서가 달린 게 문제다. 강봉균 새누리당 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4·13 총선 공약으로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총선이 끝난 뒤 4월26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한국판 양적완화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된다는 입장”이라며 다시 논의에 불을 댕겼다. 대우조선·현대상선 등 구조조정 대상으로 언급되는 기업들에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물려 있는 자금만 20조원에 이른다. 국책은행이 부실 은행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으니, 부실을 메울 돈을 한국은행이 마련하자는 주장이다.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에 출자하거나, 채권과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돈을 풀어 발생하는 혜택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이 모두에게 미치지 않고, 일부 기업에만 미친다는 점에서 ‘양적완화’보다는 ‘특별대출’에 가깝다. 금융학회장을 지낸 윤석헌 숭실대 교수(금융학부)는 “국책은행 자금을 마련해주기 위한 한국판 양적완화는 적절치 않다. 한국은행 동원보다는 정부가 산업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게 합리적인 추진 방안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정부는 정확히 재원이 얼마나, 왜 필요한지부터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공적자금 투입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3. 조선·해운업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한국 조선업은 불과 7~8년 전만 해도 수주잔량 세계 1위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해상물동량이 줄어들고 선박 발주가 줄어들자 대형 조선업체들은 해양플랜트 건설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정부도 해양플랜트를 ‘신성장동력’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2014년 이후 유가가 반토막 가깝게 하락했다. 건설 경험이 많지도 않으면서 출혈경쟁을 하느라 저가 수주를 했던 해양플랜트 건조 일정이 늦어지면서 조선사의 발목을 잡았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3사의 영업손실만 2013년 이후 10조원이 넘는다. 그렇다고 경기에 민감한 조선 업종의 특수성만으로는 지금의 위기가 설명이 안 된다. 대우조선해양은 2000년 이후 산업은행이 대주주였다. 산업은행 관료들이 퇴직 뒤 대우조선해양 주요 임원 자리를 꿰차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와대와 가까운 인사들이 사외이사로 임명돼 ‘낙하산’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현재 대우조선의 최고재무책임자만 해도 전직 산업은행 임원이다. 산업은행은 10년 넘게 대우조선 매각에 실패하고 재무구조 개선을 끌어내지 못했다. 해운업 불황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물동량 감소로 해운업체들은 8년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2009년 해운산업 구조조정을 시행해 중소 해운사들을 퇴출시킨 바 있다. 대형 해운업체들은 직접 선박을 구입해 항로에 투입하는 대신 다른 선주들에게 선박을 빌리는 방식으로 몸집을 가볍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운임료가 점점 떨어지면서 비싼 용선료는 되레 부메랑이 됐다. 현정은, 최은영 회장의 미숙한 경영도 위기를 부채질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보유한 배 가운데 절반 이상이 용선이고, 두 업체는 매년 각각 1조~2조여원의 용선료를 지급하고 있다. 정부가 “용선료 인하 협상이 잘 안 되면 자율협약을 맺지 않겠다”고 못박은 까닭이다. 4.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기업 구조조정에 정답은 없다. 정부, 채권금융기관, 경영진, 노동자 등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가 많은데다, 서로의 이해가 극명하게 다른 탓이다. 전문가들의 해법도 엇갈린다. 모두가 만족하는 구조조정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구조조정 논의가 기형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논의의 중심축이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곁가지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피해가 고스란히 노동자에게만 전가되는 것도 문제다. 조선업 종사자는 18만여 명에 이른다. 정부는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정해 고용유지지원금 지급, 퇴직자 맞춤형 전직 지원서비스 등을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대규모 실업 사태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지만, 기업 부실에 책임 있는 정부나 국책은행 관계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을 책임진 산업은행은 정부 지분 100%의 국책은행이다. 경영진도 마찬가지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은 회사가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직전에 보유 주식 27억원어치를 모두 팔아치웠다.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다. 박상인 경실련 재벌개혁위원회 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그동안 이어져온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을 답습하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새로운 틀을 짤 필요가 있다.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구조조정 책임과 손실 부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국책은행에 추가 출자가 이뤄질 경우 국책은행 경영진과 은행 감독에 책임 있는 정부기관 담당자들에게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양호 신드롬’을 깨자는 뜻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