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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적자금에 꼬리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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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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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부실 책임자 은닉재산 환수하는 예금보험공사 조사 요원들의 명암

사진/ 공적자금 추적자들은 괴로워! 부실 책임자들의 보유·은닉재산을 추적하는 예금보험공사 조사부 사무실 모습.(김종수 기자)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사무실이 있는 건물 동쪽으로 방향을 틀자 대형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원통형의 기다란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지만 문은 약간 움찔거릴 뿐 좀처럼 열릴 것 같지 않게 견고하다. 문 오른쪽 벽에는 초인종이 두개 나란히 놓여 있다. ‘외부인은 벨을 눌러주세요’라는 경고문과 함께. 유리문 너머로 사무실 풍경이 얼핏 보인다. 어른 키에 닿을 듯 높다란 칸막이를 양쪽 어깨삼아 정면으로 죽 뻗어 있는 통로가 가르마처럼 방을 둘로 나누고 있다.

서울 중구 다동 33번지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 13층. 예보 조사2부와 조사3부가 들어서 있는 이곳 풍경은 여느 사무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칸막이가 조금 높다는 점을 빼고는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의 일터 모습 그대로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이고 자리에 앉은 직원들의 일처리도 조용조용해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하다.

공적자금 유용설 불거져 곤혹 치러


그렇지만 이런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예보 13층의 내부 공기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감당하기 힘든 심적 부담에 짓눌려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월29일 감사원이 ‘공적자금 운용·감독 실태’를 내놓은 뒤부터 짐은 한층 무거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공적자금’을 둘러싼 비난여론이 높던 터에 부실 책임자들이 7조원대의 재산을 보유·은닉하고 있다는 감사원 발표는 기세좋은 불길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격이 됐다. 공적자금 투입 및 회수에 1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예보(그중에서도 부실 책임자의 재산을 찾아내 회수해야 하는 조사2·3부)로선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서 단순 보유재산까지 고의적인 은닉재산인 양 부풀려 전달한 데 대해 감사원까지 나서 해명에 열을 올렸지만 여론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뒤였다.

전날 내린 비 탓에 수은주가 뚝 떨어진 12월13일 사무실에서 만난 예보 관계자는 “제가 말할 입장에 있지도 않고… 아직 감사원에서 정식 통보가 온 것도 아니어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감사원에서 부실 책임자가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고 발표한 게 마치 공적자금을 빼돌린 것처럼 오도됐다”며 “은닉재산이라고 밝혀져도 이미 근저당이 설정돼 있는 게 많을 테고 이럴 경우 회수의 실익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예보 관계자의 이런 실토는 엄살일까? 감사원에서 대외에 익명으로 발표한 몇몇 사례를 보면 부실 책임자의 보유·은닉재산을 환수하는 과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감사원이 밝힌 보유·은닉 사례 중 비교적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ㄷ은행 전 은행장 허아무개와 ㅇ종금 전 이사 최아무개는 각각 1억3500원, 1억300만원 상당의 골프 회원권을 소유하고 있다. 감사원이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ㄷ은행과 ㅇ종금은 외환위기 직후 유동성 위기를 겪다 퇴출됐으며, 예금자 보호를 위해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임원으로서 회사의 연대보증인으로 올라 있을 게 뻔한 허씨와 최씨는 부실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할 처지다.

은닉재산 찾아내도 환수는 당장 어려워

사진/ 누가 공적자금을 삼켰는가. 지난 11월29일 감사원이 발표한 '공적자금 운용·감독 실태'는 파문을 일으켰다.(한겨레 강창광 기자)
감사원에서 정식 통보되는 대로 이 사안은 예보 조사2부에 배정될 것이다. 조사1부는 금융기관 부실 관련자(임직원, 신원보증인, 대주주)를, 조사3부는 부실 채무기업 책임자(임직원, 대주주)를 ‘확정’하는 구실을 맡는 데 견줘 조사2부는 이를 바탕으로 부실 책임자의 은닉재산을 ‘조사’하게 된다. 친인척 등에게 고의로 재산을 빼돌리는 이른바 ‘사해행위’가 있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이를 확인해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예보 소속 조사 요원은 1부(부장 박시호) 50명, 2부(부장 최성국) 20명, 3부(부장 최명수) 50명 등 120명 안팎에 이른다. 대부분 은행원 출신이며 간혹 공무원에서 전직한 예도 있다. 이들은 부실 책임자의 보유·은닉재산을 쫓느라 하루하루 전쟁을 치른다. 현장에서 닦은 금융 노하우는 있으나 강제 조사권이 없어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애걸하다시피 조사를 벌여야 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 어떤 동사무소 직원은 “예보가 뭐 하는 데냐? 생명보험회사냐?”라고 물어오는 바람에 예보의 기능과 역할부터 일일이 설명하느라 종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지방 현장조사 때는 역시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동산 중개업소나 문중 사람들을 만나 소줏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눠야 그마나 작은 정보나마 캐낼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ㄷ은행 허씨와 ㅇ종금 최씨의 골프 회원권의 경우 이런 과정을 이미 거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회수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듯하다. 본인 명의로 남아 있는데다 두 사람과 해당 금융기관(ㄷ은행, ㅇ종금) 사이에 채권·채무관계가 확정적일 것이므로 곧바로 법원을 통해 자물쇠(가압류, 가처분 등 채권보전)를 채우면 된다. 이 과정에선 두 금융기관의 파산재단 관재인이 합류하게 된다. 채권보전에 걸리는 시일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다. 물론 채권보전 뒤에도 경매에 부쳐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절차가 완전히 끝나는 데는 이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부실 책임자 본인 이름으로 돼 있지 않은 경우 재산 환수는 좀 복잡해진다. ㅎ종금 전 대주주인 설아무개씨의 사례. 설씨는 98년 11월 본인 명의로 보유하고 있던 서울 중구 소재 대지(36억원 상당)를 처와 딸에게 증여하는 형식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감사원 감사에서 들통난 사례 가운데 상당수가 이처럼 명의가 이전된 것이다.

이런 사안은 지리한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우선 현장을 방문하고 현재 (부동산) 소유자들을 만나 면담조사를 벌여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예보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사 요원들이 우선 매수자를 만나 정당하게 매입한 것인지를 따져보게 됩니다. 매수자를 만나기만 하면 자금흐름을 통해 어느 정도 사실 관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ㅎ종금 설씨의 경우 특수관계인에게 증여한 것으로 정당한 거래라 볼 수 없는 게 분명해 환수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지만 매수자 본인이 만나기를 거부할 경우 예보가 강제할 방법이 없고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협조해줄 리 만무하기 때문에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할 게 뻔합니다. (환수 절차를 매듭짓는 데는) 최소한 1년6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봐야죠.”

예보 조사의 첫 단추이자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일은 부동산 취득에 따른 면담조사다. 이는 부실 책임자가 보유 부동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후 매매 과정이 몇 단계 이어지면서 희미해진 은닉재산의 꼬리를 되밟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부동산을 산 이를 ‘수익자’, 그뒤에 매입한 이를 ‘전득자’라고 하는데 전득자가 많을수록 흔적을 뒤지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예보 조사2부 조현철 팀장은 “임야나 잡종지는 금방금방 거래가 이뤄져 심지어 제4전득자까지 넘어간 사례도 있다”며 “이럴 경우 수익자 및 전득자에 대한 면담조사는 난항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관련자 발뺌 일쑤… 부처 협조도 부실

사진/ 부실 책임자에 대한 징벌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금보험공사 조사 요원들이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김종수 기자)
부동산 취득자에 대한 면담조사에 이어 권리 분석이 이어진다. 등기부 등본을 비롯한 각종 서류를 통해 대상 물건의 가치 및 채권 순위를 따지는 것이다. 물건의 가치가 1억원에 지나지 않는 반면, 소송 등을 거치는 데 2억원의 비용이 든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재산 환수에 따른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담보 가치가 2억원을 웃돈다 하더라도 다른 채권자들에 견줘 순위에서 밀릴 때도 마찬가지 선택이 이뤄지게 된다. 다행히 면담조사, 권리 분석이 원활히 진행되고 실익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곧바로 파산재단을 통해 환수 절차에 들어간다.

이런 일련의 추적 과정에서 예보가 겪는 또 하나의 난점은 정부 각 부처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금자보호법 규정에 따라 국세청, 건설교통부, 행정자치부 등 각 부처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예보의 정보(본적, 재산 상태 등) 제공 요청에 응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특별한 사유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어서 거부당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부실 책임자 및 그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관계자들 사이의 베일 속 거래를 낱낱이 밝혀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다행이라면 범정부 차원의 ‘공적자금조사협의회’가 꾸려졌다는 점이다. 예보를 비롯해 재경부, 금감위·금감원, 국세청, 한국은행 등이 참여하고 있는 협의회는 12월5일 첫 모임을 갖고 감사원 특감 결과 드러난 부실 기업주의 은닉재산에 대해 내년 상반기까지 채권보전 조처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이와 함께 검찰에 설치된 ‘공적자금비리 특별수사본부’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검찰, 경찰, 금감원 직원 50명으로 짜여진 ‘공적자금 비리 합동단속반’과 ‘유관기관 실무대책반’을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정부 부처간의 손발이 맞지 않아 예보의 조사가 난항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도 경제정의는 세워야 한다

예보 김천수 이사는 “각 부처 및 기관 사이에 정보를 공유하고 협조하는 체제가 꾸려져 부실 기업주의 은닉재산 조사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김 이사는 “최근 들어 법원이 파산재단 관재인으로 (변호사가 아닌) 예보를 지정하고 있는 추세도 희망을 갖게 한다”며 “조만간 파산재단 20개에 대한 업무종결 선고가 내려질 예정인 등 이미 일정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공적자금조사협의회의 지원에 힘입어 예보의 조사가 원활히 진행된다 하더라도 실제 회수실적이 기대에 부응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또 감사원이 적시한 보유·은닉재산 등을 몽땅 환수해도 투입된 전체 공적자금에 견주면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부실 책임자에 대한 ‘징벌’을 통해 ‘경제정의’를 세우는 일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회수 실적에 대한 의문이 들더라도 예보의 철저한 조사와 추적이 이뤄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실 금융기관 파산관재인 선임 현황
총파산
재단수
예금보험공사 관재인 변호사
단독 등
단독 공동
(예보·변호사)
소계
법인(예보) 직원
294 138 27 118 283 11

(12월14일 현재, 단위 : 개)


사라진 113조원은 누가 메울까

감사원 특감 결과 공적자금 투입규모는 10월 말 현재 150조6천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회수한 것은 4분의 1 수준인 37조7천억원가량이다.

투입된 공적자금 가운데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채권 발행으로 조달한 86조7천억원은 해당 기관의 부채이지만 '정부 보증채'여서 상환이 어려울 경우 정부가 떠안아야 한다. 이들 채권은 내년중 5조6천억원을 시작으로 2003년 21조9천억원, 2004년 17조7천억원, 1005년 17조9천억원, 2006년 16조6천억원순으로 만기가 돌아온다.

만기 채권뿐 아니라 두 공사가 채권이자 지급 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 재정에서 빌린 37조원 역시 내년 4조원을 시작으로 2003~2006년 사이에 해마다 5조6천억~6조5천억원씩 갚아야 한다.

정부와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이런 상환계획을 맞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내년에 만기가 돌아오는 공적자금 원금 4조5천억원에 대해 최장 20년까지 차환(빚내서 빚갚는)을 통해 위기를 넘길 방침이다. 이에 대해 야당쪽에선 차환 발행이 다음 정부로 짐을 넘기는 것이라며 국채로 발행해 갚도록 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투입된 공적자금을 앞으로 얼마나 더 회수할 수 있을지도 논란으로 남아 있지만, 큰 기대는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예보가 부실 금융기관의 대주주, 경영진, 보증인을 상대로 재산 추적에 나서 지난 10월 말까지 3263명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게 9153억원, 가얍류한 재산은 1조63억원. 투입된 공적자금의 거대한 덩치에 견주면 그야말로 새발의 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적자금은 외환위기로 붕괴 직접에 놓인 금융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비용'이었다. 공적자금이 국민의 예금을 보호하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덜어내 금융시장을 어느 정도 정상화하는 데 한몫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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