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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반도체 맞수 ‘위험한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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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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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마이크론 제휴로 시장 들썩… 지분 맞교환에 ‘하이닉스 삼키기’ 지적도

사진/ 적대관계에서 공생관계로? 하이닉스반도체 박종섭 사장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의 제휴 방침을 발표하고 있다.(한겨레 서경신 기자)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하이닉스반도체의 최대 적수였다. 삼성전자에 이어 D램 반도체 시장에서 나란히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업체는 그동안 단순한 경쟁관계를 넘어 노골적인 적대관계를 이뤄왔다. 하이닉스에 대한 채권단의 지원에 대해 마이크론은 국제 규범을 벗어나는 특혜라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하이닉스 죽이기에 앞장서왔다.

D램 시장서 서로 이해관계 맞아

그런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의 ‘동지’가 되겠다며 손길을 뻗쳐왔다. 두 회사는 지난 12월3일 공동발표를 통해 전략적 제휴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협력 방안에 대해 협의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티브 애플턴 마이크론 회장과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은 이날 발표문을 통해 “두 회사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전략적 대안을 검토중”이라며 “양사간 협의는 가능한 모든 방안들을 다양하게 검토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곧이어 이튿날 밤 마이크론의 빌 스토버 부사장을 팀장으로 하는 10여명의 협상팀이 방한해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메리츠증권 최석포 연구위원조차 “두 회사가 이렇게 전격적으로 제휴를 발표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어제까지 적이었던 두 회사가 오늘은 동지가 되겠다며 분홍빛 염문을 뿌리고 있는 속사정은 그다지 복잡해 보이지 않는다. D램 시장에서 공급량을 조절해 값을 올리지 않고선 두 회사 모두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D램 업계는 공급과잉으로 모든 업체가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부터, 마이크론은 올해 2분기(2000년 12월∼2001년 2월)부터 적자로 전환됐고 적자 폭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내년 D램 시장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동원경제연구소 김성인 연구원은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시장점유율이 지난해부터 계속 하락하고 고정거래선 비중도 낮아져 시장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런 처지에서 국면 전환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두 회사가 전략적 제휴를 이뤄낸다면 시장점유율이 44%에 이를 정도로 영향력(가격결정력)이 높아지고 이를 지렛대삼아 D램 값을 올릴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석포 연구위원도 “지금 같은 D램 가격체제 아래에선 두 회사 모두 공멸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힘을 합쳐 시장구도를 바꾸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 위원은 “하이닉스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채권단의 지원 반대 로비, 반덤핑 제소 등)를 걸던 마이크론이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의 시장 상황에서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업계 지각변동 초읽기, 점유율 40%

사진/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전략적 제휴로 반독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가 신형 D램을 선보이고 있다.(한겨레)
두 회사 사이의 제휴 추진은 세계 반도체업계의 지각변동을 몰고올 것이란 관측을 낳고 있다. D램 반도체시장에서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회사가 합병까지 이를 경우 이 회사는 단번에 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서고 이는 시장의 질서(수급 흐름)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것이란 전망이다.

대우증권 전병서 연구위원은 “지난 30년간 수요자(PC업체 등) 중심으로 움직여온 D램 시장의 수급 질서를 공급자 우선으로 뒤바꿔놓는 것이며 D램 업계의 지각을 변동시키는 초대형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98년 마이크론이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인수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D램 시장 선발업체의 시장점유율은 11%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선발업체의 점유율은 20%를 훨씬 넘어섰다.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제휴가 성사될 경우 시장점유율은 물론 40%를 웃돈다. 전 위원은 “전략적 제휴를 맺는 두 회사와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을 합치면 이들의 시장점유율이 70%에 달한다”며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물량 조절을 통해 D램 값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된다”고 설명했다.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제휴 발표에 따른 영향은 이미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두 회사의 제휴 추진은 세계 반도체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즉각 미국 및 국내 증시를 뜨겁게 달궜다. 발표 이튿날인 12월4일 반도체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퍼지며 미국 필라델피아 증시의 반도체 지수가 폭등했고, 이에 힘입어 나스닥지수도 2000을 넘어섰다. 삼성전자도 외국인의 집중적인 매수세에 힘입어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30만원을 내다보고 있다. 제휴 당사자인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주가도 강세를 띠어 제휴에 따른 기대감을 반영했다.

D램 반도체 공급가 인상 움직임도 주목되는 현상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는 16개월 만에 PC업체를 비롯한 대형 고정거래선에 대한 반도체 공급가를 10∼20%씩 인상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급락세를 이어왔던 반도체 현물가격이 지난 11월 초부터 상승세를 보이면서 더이상 가격하락은 힘들다는 인식이 퍼진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와중에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제휴 발표가 반도체 공급자쪽의 협상력을 크게 높여줘 가격 인상의 지렛대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세계 반도체시장을 들뜨게 하고 D램 업계 재편에 대한 기대감을 낳고 있는 두 회사의 제휴가 정작 하이닉스반도체에는 득이 될지, 독이 될지 불투명한 실정이다.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이란 기대 반대편에서는 “마이크론과 삼성전자만 재미를 볼 것”이란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반도체를 죽이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는 꽤 심각한 관측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시너지 효과 불투명… 하이닉스 죽이기?

[%%IMAGE2%%]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전략적 제휴의 성공 여부와 제휴 형태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회사쪽 발표와 달리 시너지 효과는 극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두 회사가 만약 합병을 할 경우 D램 시장 점유율은 44% 수준에 이른다. 그렇지만 메이저 PC업체들은 이 합병회사로부터 44%의 D램을 다 구매하지 않고 일정 부분은 다른 구매처로 돌릴 가능성이 높다. D램 시장이 지금과 달리 공급부족 구도로 전환됐을 경우 합병회사의 가격결정력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 애널리스트는 “따라서 합병을 통한 시너지 효과는 ‘1+1=2’가 아니라 ‘1+1=1.5’로 시너지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고 관측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하이닉스와 협력하는 데 소극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물량 조절을 통해 D램 값이 회복되더라도 혜택은 주로 삼성전자가 볼 것이란 예상이 많다. 고정거래선 비중이 높고 판매수량도 가장 많기 때문이다. 또 마이크론도 D램 가격 상승효과만큼 득을 볼 것으로 보인다. 김성인 연구원은 “D램 공급 물량을 조절하더라도 다급한 처지에 빠져있는 하이닉스쪽의 물량을 줄이는 쪽으로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이 때문에 하이닉스로선 판매 수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익성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경영권 장악할 수도

사진/ 반도체업계 초대형 사건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하이닉스반도체 채권단 전체회의에 참석한 금융기관 관계자들.(한겨레 김진수 기자)
제휴 방식을 놓고는 갖가지 관측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지분교환 등 자본제휴쪽에 무게가 쏠려 있다. 감산 제휴를 비롯한 공동마케팅과 기술개발도 거론되고 있지만 핵심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합병은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큰데다 감자가 이뤄져야 하는 등 절차가 번잡해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지분 맞교환 또는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의 일정지분을 인수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두 회사의 지분을 맞바꾸는 제휴가 이뤄질 경우 이는 당장 국내 반도체산업의 이해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채권단이 보유중인 하이닉스 지분(약50%)과 마이크론 주식의 맞교환이 이뤄진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증권가의 분석이다. 최석포 연구위원은 “하이닉스 지분을 내주고 마이크론 지분을 갖게 된 채권단이 현금 회수를 위해 미국 주식시장에서 마이크론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마이크론에 대한 통제장치를 잃게 된다”며 “결국 하이닉스반도체의 지배권만 고스란히 마이크론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삼성전자에도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이닉스의 실질적인 경영주체로 떠오른 마이크론이 우수한 공정기술을 하이닉스 생산라인에 이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이 공정기술면에선 삼성전자보다 한수 위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게 업계 안팎의 중평이다.

마이크론과 제휴 발표를 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은 “(마이크론과의 악연을 의식한 듯) 과거 문제는 과거의 장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라며 “비즈니스에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거꾸로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또다시 돌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직은 모든 게 불투명한 가운데 양쪽의 협상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1∼2주 뒤면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흐릿한 관측을 뒤로 한 채….

D램 시장 빅3 시장점유율(수량 기준)
구분 2000년4분기 2001년1분기 2분기 3분기(추정) 4분기(추정)
삼성전자 17% 21% 18% 24% 26%
마이크론 22% 21% 21% 23% 23%
하이닉스 17% 19% 16% 21% 21%

자료 : 동원경제연구소


반도체 경기 회복 청신호?

반도체산업은 국내 생산 및 수출을 이끌고 있는 경제의 핵심산업이다. 반도체산업은 지난 한해 285억달러를 생산, 이 가운데 260억달러를 수출했다. 이는 국내 총수출의 15.1% 수준으로 지난 1991년 3.3%에서 크게 확대된 수준이다. 올해(1∼6월) 들어 정보기술(IT)산업의 경기 하강으로 그 비중이 떨어지긴 했으나 10.8%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 제조업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1991년 3.3%에서 1999년에 오면 7.9%로 높아진다. 고용 비중도 같은 기간 3.6%에서 5.8%로 증가했다.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국일 뿐이다. 특히 D램 분야에선 시장점유율이 38%(2000년 기준)에 이르러 단연 세계 1위 수준이다. 비메모리 분야까지 포함하면 국내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7.7%로 낮아져 미국, 일본에 이어 3위 수준으로 떨어진다.

세계적인 기업들의 반도체 매출 구성을 보면 비메모리 분야의 비중이 높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이와 반대다. 메모리:비메모리 비중이 삼성전자 83:17, 하이닉스는 95:5 수준이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비중이 월등히 높아 외국 경쟁사보다 D램 가격 하락에 따른 충격을 더 많이 받게 돼 있다. 국내 반도체산업은 1990년대 IT 중심의 미국경제 호황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에 따라 반도체산업의 경기가 전체 거시경제 지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반도체산업이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전체 산업생산이 위축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는 수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전체 수출의 증가폭 확대에 이바지했으나 최근에는 오히려 전체 수출의 감소 폭을 더욱 깊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8월 정점에 이른 뒤 빠르게 둔화돼 올해 1월 감소세로 돌아섰으며, 이후 감소폭이 확대되는 추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크론과 하이닉스가 제휴 카드를 들고 나옴에 따라 반도체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일고 있다. 두 회사의 제휴가 반도체업계의 생산 및 공급 물량 축소로 이어지고 D램 값 상승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렇지만 제휴의 내용이 아직 나오지 않은데다 설사 제휴가 이뤄지더라도 PC시장 전망이 불투명해 반도체 경기의 낙관을 예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분석이 많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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