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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안방고객 ‘주문 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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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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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의 초고속 성장… 최저가격·반품보장으로 유통영토 확장

사진/ 홈쇼핑이 소비자들의 구매패턴 변화의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한 홈쇼핑 채널에서 모피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 귀퉁이에 달린 시계는 판매마감을 알리는 ‘0:00’을 향해 자꾸만 흘러간다. “자, 몇벌 안 남았습니다.” 화면 한쪽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최저가격보장’, ‘횡재가격’, ‘오늘만 찬스’라는 자막이 어지러울 정도다. 경품도 풍성하게 내걸려 있다. ‘무스탕 값이 저렇게 쌀 수 있나?’ 의문이 들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채널은 늘어나도 ‘매출 대폭발’

밤 9시30분께, 저녁 늦게 퇴근한 맞벌이 주부 김영희(36)씨의 눈길은 아까부터 텔레비전 화면에 표시된 ‘080’ 주문 전화번호에 붙박혀 있었다. 9시 뉴스를 보다가 틀게 된, 지상파방송 사이에 끼어든 유선방송 홈쇼핑 채널이었다. 물건을 파는 방송이려니, 하고 건너뛰던 그였지만 이날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중에서 30만원 가까운 무스탕 코트가 15만8천원의 파격적인 가격에 선보이고 있었다. 씀씀이가 헤프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지만 “30일 안에 반품하면 전액 환불해준다”는 말에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은 곳은 서울역 앞 대우센터빌딩 3층에 자리잡은 CJ39쇼핑의 콜센터. ‘114 전화번호 안내’인가 싶을 정도로 750여명의 상담원이 빼곡이 들어찬 콜센터에는 전국 각지에서 상품 주문전화가 쉴새없이 걸려온다. ‘매출 대폭발’로 표현되는 텔레비전 홈쇼핑의 대호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텔레비전 홈쇼핑의 두축을 이뤄온 LG홈쇼핑과 CJ39쇼핑이 밝힌 홈쇼핑 고객(구매주문을 냈던 고객 기준)은 각각 400만∼500만명. 한국통신판매협회는 홈쇼핑 시장 매출액이 지난해 1조3460억원에서 올해 2조2300억원으로 껑충 뛸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LG홈쇼핑은 첫 전파를 내보낸 지난 95년 13억원이던 매출액이 올해는 1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최근 한국농수산TV, 우리홈쇼핑, 현대홈쇼핑이 홈쇼핑 시장에 가세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는데다, 어디서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수백개에 이르는 ‘유사홈쇼핑’(케이블방송 중간중간의 광고시간을 따내 인포머셜광고를 내보는 것)의 난립도 홈쇼핑 열풍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듯 방송 시작 6년 만에 100배 가까이 성장하고 있는 홈쇼핑 채널의 호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홈쇼핑의 ‘성장 엔진’을 엿보게 해주는 분야가 여성 의류다. 홈쇼핑에서 요즘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게 여성 속옷 등 의류인데, 사실 여성 의류는 대표적인 오프라인 상품이다. 의류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입어보면서 고르는 상품인데도 홈쇼핑에서 날개돋친 듯 팔리는 건 왜일까? LG경제연구원 김재문 책임연구원은 “온라인쇼핑이 어느새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방쇼핑’으로 바뀐 소비자들의 구매패턴이 홈쇼핑의 급성장을 견인하는 엔진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제품 다량구매로 저가격 실현

사진/ 홈쇼핑의 호황을 즐기는 사람들. 전화국을 방불케 하는 홈쇼핑의 콜센터(위). 아래는 홈쇼핑 상품을 배달하는 모습.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접 만져보고 사려는 소비자들의 욕구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홈쇼핑 성장의 이유를 따질 때 그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가격 메리트다. 홈쇼핑 업체들은 대체로 오프라인 매장에 비해 20∼50%까지 값이 싸다. ‘무점포 유통’이라는 유통혁명에다 중간 유통단계를 생략해 유통마진을 없앴고, 대량구매에 따른 바잉파워(buying power)까지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홈쇼핑 업체는 오프라인처럼 여러 종류와 모델을 갖추지 않고 잘 팔릴 수 있는 한 가지 제품만 골라서 대량으로 구매한다. 이를 배경삼아 오프라인보다 훨씬 싼값에 물건을 떼오는 것이다.

홈쇼핑 상품이 싼 편이긴 하지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보면 용산전자상가나 인터넷쇼핑몰 등과 비교할 때 반드시 더 싸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유통업계마다 상품군별로 가격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김재문 연구원은 “싼 가격을 추구하는 소비자에게 어디가 싸냐고 물으면 천차만별”이라며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몰, 오프라인 매장 중 어디의 물건이 더 싼지에 대한 교통정리가 아직 안 된 상태”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홈쇼핑 업체마다 내걸고 있는 게 최저가격보장이다. 딴 데서 더 싸게 살 수 있으면 그 차액의 2배를 보상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저가격보상을 요구하는 고객은 거의 없다”고 한 홈쇼핑 관계자는 털어놓는다. 믈론 홈쇼핑보다 싼값에 파는 데가 있으면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영수증을 제시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쉽게 반품할 수 있다는 점도 홈쇼핑 매출이 급증하는 주요 원인이다. 사실 고객한테 파고드는 홈쇼핑의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이 ‘수월한 반품’이다.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이 구매철회권을 2주로 정하고 있지만 홈쇼핑업체는 30일까지 반품을 허용하고 있다. LG홈쇼핑 신형범 홍보팀장은 “구입 뒤 30일 안에 전화 한통만 하면 이유를 묻지 않고 물건을 되가져온다”며 “소비자가 구매결정을 할 때는 일방적인 방송화면만 믿고 선택한 것이므로 반품 이유는 따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한달이 넘은 뒤에 되돌려보내는 물건이나 꼬리표를 떼낸 물건도 책임을 묻지 않고 반품을 받아줄 정도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구매할 생각없이 행사 참석용으로 잠깐 입을 장신구나 옷을 산 뒤 금방 되돌려보내는 고객도 흔하다. 홈쇼핑 업체가 취급하는 상품의 단가가 3만원 이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무료반품을 감안할 때 3만원대 이하는 팔아도 이익이 남지 않는 것이다.

쉬운 반품은 충동구매로 이어진다. 홈쇼핑에서 일어나는 구매의 상당부분은 충동구매다. 한 홈쇼핑 관계자는 “남편이 저녁에 퇴근해보면 집안에 새로운 박스가 하나 와 있고, 그래서 부부싸움 끝에 다음날 반품하는 일도 흔하다”며 “구매의 60%는 충동구매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홈쇼핑 업체들의 반품률은 20∼30%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홈쇼핑 업체의 자체 브랜드(PB: Private Brand)도 매출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홈쇼핑 업체들은 제조업체와 손잡고 식품에서 의류, 전자제품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체 브랜드 상품을 팔고 있다. 소비자들이 기존에 구매하던 제조업체 브랜드를 쉽게 버리고 대신 복잡한 유통과정을 없애 가격을 낮춘 홈쇼핑 브랜드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홈쇼핑 업체로서는 차별화된 제품을 선보일 수 있고 제조업체도 안정적인 판로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상품이 제조업체에서 유통업체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제조업체로서도 자신의 브랜드를 유지하면서 홈쇼핑에 싸게 공급할 경우 그 가격을 오프라인에서도 적용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자체 브랜드 개발… 파이가 커간다

흥미로운 건 현대홈쇼핑 등 3개 홈쇼핑 후발업체가 방송을 시작한 이후에도 LG홈쇼핑과 CJ39쇼핑의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통신판매협회 김윤태 사무국장은 “기존 시장을 나눠먹는 게 아니라 홈쇼핑 시장의 파이 자체가 스스로 커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홈쇼핑 업체마다 인터넷쇼핑몰과 카탈로그 판매를 병행하면서 매출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홈쇼핑이 기존 유통영역을 깎아먹는다기보다는 날로 확대되는 ‘새로운 영토’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쇼핑몰 ‘호황전야’?

홈쇼핑이 대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인터넷쇼핑몰은 아직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천여개에 이르는 인터넷쇼핑몰 가운데 흑자를 내고 있는 회사는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매출액만 보면 올해 전자상거래 시장은 1조81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두배가량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리다보니 매출은 늘지만 수익구조는 멍드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인터넷쇼핑몰이 전체 유통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도 0.9%에 불과하다. 그래서 온라인쇼핑몰마다 내거는 내년 목표는 ‘손익분기점 돌파’다. 인터넷쇼핑몰 업계 선두인 삼성몰 관계자는 “내년에 10억원 흑자를 가져가는 게 목표”라며 “그동안 시스템 투자비와 마케팅 비용에 수천억원대를 투자했는데, 내년은 인터넷쇼핑몰이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상품을 대량 판매할 수 있어야만 높은 구매력을 바탕으로 제조회사로부터 물건을 싸게 조달할 수 있는데 대다수 인터넷쇼핑몰은 아직 그런 구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터넷쇼핑몰마다 자체 사이트에서만 그 가격에 살 수 있는 이른바 ‘독자모델’ 확보에 승부를 걸고 있다. 예컨대 삼성몰(www.samsungmall.co.kr)이 시중가 80만원대의 29인치 완전평면TV(아이미디어)를 59만9천원에 독자모델로 팔고 있는가 하면 롯데닷컴(www.lotte.com)은 세계적인 컴퓨터 제조업체인 컴팩과 독점 물품공급 계약을 맺었다. 인터넷쇼핑몰마다 캐시카우(cash cow·돈줄)를 찾느라 한창인 것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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