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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기업이 미래를 구원하리라?!

안정적인 공기업 입사를 바라는 청년들 최근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 복지 등 사회안전망 부실한데다 대기업 고용도 불안해지는 상황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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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04 07:32 수정 : 2015-09-0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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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들이 정부가 주최한 공공기관 채용정보 박람회에서 상담을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영선(24·가명)씨는 강의실에 들어서자 ‘훅’ 호흡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다. 군데군데 앉은 자리엔 자신과 비슷한 또래도 보였고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경력 시험 봐야 할 나이로 보이는데 신입 공채에 와 있네.’ 이씨는 인상을 찌푸리고 앉았다. 앉아 있는 사람의 수는 자신이 밀어내야 할 경쟁자 수다. 이씨가 걸어온 7월의 볕은 따가웠다. 한 공기업의 신입 공채 시험이 열린 7월의 어느 주말,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은 더위에 아랑곳없이 응시자들로 가득 찼다.

공기업 다니다 사기업 가는 사람 거의 없어

공기업 취업을 여전히 준비하고 있는 이씨는 8월 27일 “공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대학생들도 공기업에 들어가길 바라지만, 일반 기업을 다니다가 다시 공사 시험을 보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공사에 있다가 사기업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취업준비생들의 공사·공단 등을 향한 취업 선호가 대기업들을 제치고 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8월24일 낸 ‘대학생이 가장 취업하고 싶어 하는 기업’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10위권 기업에 공단·공기업이 4곳이나 포함됐다. 10개 기업 가운데 4곳을 공기업이 차지한 것은 잡코리아가 2004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취업 선호 순위를 보면 국민연금공단이 5위였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6위로 뒤를 이었다. 현대자동차(7위)보다 순위가 높았다. 그동안 꾸준히 10위권에 들어간 한국전력공사는 9위였고, 한국철도공사(10위)도 처음으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물론 인기가 있는 대기업은 여전했다. 올해도 1위는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조사를 시작한 2004년부터 한 번도 1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2위는 CJ제일제당이 차지했다. 3위와 4위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이 나란히 위치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손아무개(24)씨는 “삼성은 연봉이 세고, CJ 같은 경우는 문화나 영화 쪽 일이라 관심을 가지는 친구가 많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해외 일이 많아 보여서 취업준비생들이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취업 선호 조사는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잡코리아 관계자는 “국민연금공단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매출액 100대 기업이라 항상 설문조사 대상이었지만, 그동안은 순위에 들지 못했다가 올해 처음으로 10위권 안에 들 만큼 선호도가 높아진 게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들 기업은 지난해 조사에서는 5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그동안 대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대기업이었던 포스코(17위)·SK텔레콤(12위)·KB국민은행·LG전자(15위) 등은 올해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다른 공기업들도 순위가 높아졌다. 한국토지주택공사(13위)와 한국수자원공사(14위)의 인기는 다른 대기업 못지않았다. 한국도로공사는 23위, 한국수력원자력은 24위였다.

공기업 선호도가 높아진 것은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민연금공단을 택한 대학생들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면, ‘안정적으로 오래 일할 것 같아서’(20.9%)가 가장 많았다. ‘회사의 비전 및 성장 가능성’(5.8%)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4.7%)를 꼽은 이는 각각 10%도 되지 않았다. 다른 공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문에 응한 대학생들은 공기업을 선택한 이유로 ‘안정적으로 일할 것 같아서’를 가장 많이 들었다.

공기업 선택 이유 ‘안정적일 것 같아서’

공기업에서 인턴을 했고 현재 사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이아무개(24·여)씨는 요즘 공기업 시험을 다시 볼까 고민하고 있다. 이씨는 공기업이 “훨~씬” 낫다고 강조했다. “공기업에는 40~50대 여성 직원도 많이 있었는데, 사기업에 와보니 여성 인력이 거의 없다. 출산과 육아 뒤에 내 경력이 단절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공기업 시험을 다시 볼까 생각하고 있다.”

최아무개(25·남)씨도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이유를 안정성이라고 했다. 최씨는 아버지를 예로 들었다. “아버지는 공기업에 아직 다니시는데, 사기업에 다녔던 친구분들은 퇴직하고 사업을 하네 마네 하고 있다. 아버지도 ‘돈을 덜 받더라도 공기업이 좋다’고 추천하셨다.”

이씨와 최씨의 말에서 보듯, 일반 기업에 들어가면 얼마 뒤 경력 단절과 조기 퇴직을 당하는 게 아닌가라는 불안감을 취업준비생들은 가지고 있다. 대기업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명예퇴직이 일상화됐고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을 이들은 안다. 최씨도 “공기업의 근속연수가 사기업에 비해 긴 것을 감안했다”고 했다. 최씨는 공기업 연봉까지 오르고 있어서 공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는 징조라고 이야기한다.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이 도전보다 안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공기업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이상 안정적 운영이 가능하다. 다른 공기업이나 사기업과의 경쟁도 심하지 않다. 직원이 잘하건 못하건 망할 일이 없는 구조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젊은이들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의욕을 가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기업에 들어가 대표가 되겠다거나 기업을 키워보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이가 예전만큼 없다고 혀를 찬다. 창업을 준비하는 ‘기업가 정신’을 가지라고도 권한다. 중소기업에 더 많은 기회가 있는데 가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취업준비생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이씨는 “대학생들이 중소기업을 일부러 멀리하는 게 아니다. 일은 똑같은데 복지나 처우가 훨씬 박한 것을 보고 중소기업에 안 들어가는 것이다. 작은 기업에 들어갔다가 금방 그만두는 친구를 많이 봤다”고 했다. 입사 뒤 10~20년 동안 월급을 받고 살아야 하는 회사원 입장에서 연봉 수준은 중요하다. 월급 말고 자신의 삶을 지지해줄 연금 등 사회복지제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월급 격차가 그대로 삶의 격차가 되는 사회에서 중소기업에 비전이 있다는 이야기는 노후를 건 도박을 해보라는 이야기와 같다.

게다가 ‘뒤떨어진’ 일부 기업의 문화 역시 취업준비생들이 입사원서를 쓰는 걸 머뭇거리게 만든다. 취업준비생 김아무개(25)씨는 취업선호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다. 김씨는 인턴을 하며 사무실 분위기를 눈으로 확인한 뒤 기업에 취직하는 대신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사람이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고 부품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주먹다짐도 일어나고 직원들 사이에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일자리 정책? “서류 통과나 더 하겠네…”

공기업 취업을 선호하는 것은 청년들의 선택이다. 이들은 도전보다 생존과 안정이 더 중요한 시대라고 판단했다. 정부가 공기업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청년 일자리를 몇 개 더 늘리거나, 대기업에 청년 인턴을 대규모로 뽑으라 하는 것에 대해 취업준비생들은 “서류 통과를 몇 군데 더 하겠네”라고 반응했다. 창업이나 중소기업 취업에 도전해도 기본적인 삶을 지켜줄 사회복지 등 안전판이 없고, 대기업의 근속연수가 계속 짧아지는 등 고용이 불안정해진다면 공기업 취업 선호도는 내년에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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