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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회계사 시험 늪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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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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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로비에 개선안 만신창이… 학점취득 내세워 교수 입지 강화 노려

사진/ 누구를 위한 공인회계사 시험제도 개선안인가. 회계사 학원 수강생들은 거꾸로 가는 시험제도 개선안에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박승화 기자)
“경영학과나 회계학과 출신으로만 공인회계사를 선발해야 한다. 그래야 건전한 인간성과 기본 소양,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의아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인간성’까지 들먹이면서 관련학과 출신으로 회계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무리하게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최근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시험제도개선위원회(위원장 김행선)가 경영학·회계학 등 관련분야 36학점을 취득한 사람에 한해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들고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2만∼3만명의 공인회계사 시험준비생들과 관련학과 학생들이 들썩이고 있다. 물론 이는 해당 학점 취득을 조건으로 내세운 것일 뿐 반드시 전공자로만 응시자격을 제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점취득제 도입을 주도하고 있는 회계학 교수들은 학점 수를 더 늘리고 구체적인 과목까지 지정하자는 주장이어서 사실상 관련학과 전공자들에게만 시험자격을 주자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전공 회계사는 질적 수준 떨어진다?


11월22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시험제도개선위원회 주최 ‘공인회계사 시험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공청회’에서도 토론의 중심은 응시자격을 제한하는 학점취득제였다. 학점취득제는 대학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에서 회계학 및 세법 15학점, 경영학 12학점, 경제학 6학점, 상법 3학점 등 모두 36학점을 취득한 사람에게만 회계사 시험자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정기영 한국회계학회 회장을 포함해 국내의 내로라 하는 회계·세무 분야 교수들이 대거 참석해 저마다 학점취득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본 소양을 갖추려면 ‘정상적인’ 학교교육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성교육이 포함되는 학교교육에 충실해야 한다”는 등 갖가지 대학교육 예찬론이 쏟아져나왔다.

이유는 공인회계사의 소양을 강화하고 시험 때문에 엉망이 된 대학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 물론 다른 입장도 있다. 서진석 상장회사협의회 부회장은 “자격시험에 진입 장벽을 쌓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양승우 안진회계법인 대표와 황인태 금융감독원 전문심의위원은 신중하고 점진적인 도입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은 방청석을 가득 채운 회계학 교수들의 잇단 찬성 발언에 흔적없이 묻혀버렸다. 교수들은 시험제도개선위원회의 학점취득제 도입안을 더욱 강화하라고 요구했으며, 일부 교수들은 아예 자기와 관련된 과목의 증설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인회계사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업계 안팎의 반응은 차갑다. 비전공 출신 회계사들의 소양이 부족하다거나 질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회에 개선안 마련을 의뢰했던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회계학 교수들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반영한 개선안”이라며 “학점취득제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시험준비생들은 더욱 비판적이다. 공인회계사회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들은 대부분 “시험제도개선위원회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강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한 시험준비생은 “학생들이 취업대란으로 회계사 등 자격시험에 눈을 돌리고 있는 마당에 응시자격을 제한하겠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수험생들이 피부로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출제자에 따라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출제경향과 수험생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험방식이다. 가장 좋은 사례가 시간에 쫓기는 1차시험이다. 수험생들은 1차시험이 실상 ‘짧은 시간 안에 쉬운 문제만 골라내 푸는 기술’을 측정하는 시험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학점취득제 실효성 의문… 전문화 흐름 외면

사진/ 회계사 시험제도 바꿔 밥그릇 챙겨라? 지난 11월 22일 열린 공인회계사 시험제도 개선방안데 대한 공청회모습.(박승화 기자)
학점취득제는 나아가 대학교육을 지금보다 더 황폐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개선안에 찬성하는 회계학 교수들은 “시험에 몰두하는 학생들을 학교교육의 장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학점취득제가 필요하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안진회계법인의 양희찬 회계사는 “지금은 경제학과 경영학 등이 1차시험에 포함돼 있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이를 학점취득제로 대신할 경우 그나마 하던 공부도 중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F학점만 면하면 되기 때문에 학과 수강생은 늘어나겠지만 공부는 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대부분의 시험준비생들은 이에 동의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개선안이 공인회계사의 전문화를 요구하는 최근의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선 회계사들은 경영학과나 회계학과 출신이 아닌 비전공자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할 경우 자기 전공 분야에서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건축학과 출신인 경우 건설업계 회계감사나 컨설팅에서 경영학과 출신보다 더 전문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형 회계법인의 경우 갈수록 업무가 세분화되면서 전문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실정이다. 양희찬 회계사도 “내 자신이 회계학과를 나왔지만 학점취득제에 반대한다”며 “경영·회계가 아닌 다른 분야 전공 회계사들은 오히려 회계사 업무의 전문성을 강화할 수 있는 소중한 인적 자원”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과연 누구를 위한 회계사 시험제도 개선안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회계학 교수들이 학점취득제를 그토록 옹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일선 회계사들은 학점취득제가 해당 과목 교수들의 이해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올해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김정수(30)씨는 “시험제도 개선안이 학생과 수험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계학 교수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마련됐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학점취득제를 시행하면 관련 과목의 수강학생이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해당 교수의 위상이 강화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특히 대학 편제가 학부제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회계학과가 경영학부에 통합되는 추세여서 독자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회계학 교수들이 시험제도 개편을 통해 입지 강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한 수습 공인회계사는 “교수들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시험제도 개선안을 평가절하했다. 실제로 학점취득제는 시험제도개선위원회 안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학계쪽 인사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관철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 변화 외면하고 거꾸로 간다

회계학 시험과목을 무리하게 늘린 점도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다. 1차와 2차시험 과목 수는 현행과 같은 11과목으로 차이가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4과목이었던 회계학을 6과목으로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특히 재무회계를 둘로 나눈 점은 무리한 과목 늘리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회계학 교수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경영학의 한 분야인 재무관리를 ‘재무제표 분석 및 재무관리’로 바꿔 경영학 교수와 회계학 교수가 공동 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최근의 추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특히 회계법인에서는 전통적인 회계감사보다 컨설팅 업무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경영학 분야의 지식이 더 필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 회계법인의 공인회계사는 “이번에 제시된 방안은 개선이라기보다는 개악이라고 봐야 한다”며 “시험제도가 사회 변화와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공인회계사회도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학계의 로비에 밀려 그대로 가다가는 시험제도가 현재보다 오히려 후퇴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회는 이에 따라 자신이 구성한 시험제도개선위원회의 안과는 별도로 새로운 개선안을 마련해 제안하는 고육지책까지 검토하고 있다. 공인회계사회 유태오 국장은 “공인회계사 시험은 수험생 수만명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라며 “교수들의 이해관계에 밀려 시험제도가 좌지우지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 추이
연도 1차 2차
96년 840 356
97년 959 453
98년 1224 511
99년 1376 505
2000년 1331 555
2001년 1706 1014

(자료 : 금융감독원 , 단위 : 명)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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