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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분실 신용카드에 코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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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1-0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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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회원들 피해 입히는 애매한 규정… 카드·결제방법 등 개선하면 부정사용 막아

사진/ 신용카드 회원들이 카드를 분실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카드 결제방법이 단순해 피해가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씨네21 정진환 기자)
주부 박선영(가명·45)씨가 낭패를 당한 건 토요일인 지난 10월27일이었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친정인 충남 서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어린애처럼 마냥 들떠 있었다. 그렇지만 들뜬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시간쯤 달려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음료수로 목을 축이려고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아뿔싸! 손이 허전했다. 지갑이 온데간데없는 것이었다. 지갑에 든 현금도 문제이려니와 무엇보다 신용카드가 문제였다. 누가 주워서 마구 쓰기라도 한다면 어찌될지 앞이 캄캄했다. 더욱이 그 카드는 남편 이름으로 돼 있는 것인데, 남편으로부터 핀잔은 또 얼마나 들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박씨는 카드를 잃어버린 걸 알아차린 뒤 곧바로 카드사에 분실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뜻처럼 쉽지 않았다. 어느덧 휴식시간 10분이 다 지나고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찜찜했지만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 조마조마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켜가며 분실신고를 한 게 오후 5시20분이었다. 귀찮은 절차를 거쳐 신고를 끝낸 뒤 박씨는 또 한번 가슴이 쿵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잃어버린 카드를 통해 이미 300만원에 이르는 물품대금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업 현황 자료 : 금융감독원
구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6월
카드발급 수(천매) 42,299 38,993 57,881 68,374
가맹점 수(천점) 4,888 6,192 8,611 10,081
이용액(십억원) 63,557 95,084 237,252 199,280
당기순이익(억원) 361 3,475 9,379 10,178
*전업사 및 겸영은행을 합한 수치임(단, 당기순이익은 전업사 기준)

카드회사·고객의 다툼 끊이지 않아

신용카드 발급 및 사용이 늘어나면서 카드회사와 고객 사이에 다툼도 잦아지고 있다. 이는 대부분 분실 신용카드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분실카드를 주워 부정하게 사용한 데 따른 책임 소재를 놓고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조사결과 올해 1∼9월에 신용카드 관련 민원 상담은 78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2.5%나 늘어났다. 금감원 소비자보호센터의 강성범 분쟁조정1실장은 “신용카드 분쟁은 대부분 분실 카드로 인해 빚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신용카드를 잃어버려 낭패를 겪은 박씨의 사례는 어떻게 처리될까. 이를 따져보기 위해선 신용카드 회원의 의무조항을 살펴봐야 한다. 이는 신용카드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개인회원 약관’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고객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거꾸로 카드회사 입장에선 보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예외조항이 되는 셈이다.

회원이 지켜야 할 의무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신용카드에 반드시 ‘서명’을 한 뒤 사용하며, 분실했을 때는 ‘즉시’ 신고하고, 대여·양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런 잣대에 박씨의 사례를 적용시켜보면 대략 윤곽이 파악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박씨의 카드에서 빠져나간 300만원 가운데 200만원은 카드 분실 사실을 알아차린 오후 3시 이전에, 100만원은 오후 3시 이후에 결제됐다.

현재 규정에 따르면 분실 신고일 기준으로 과거 25일 이전에 벌어진 부정 사용에 대해서는 카드회사가 책임을 지도록 돼 있다. 따라서 박씨가 신고한 10월27일 오후 5시20분에서 25일을 거슬러올라간 10월2일 오후 5시20분 사이에 부정 사용으로 잘못 빠져나간 카드 대금은 박씨로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카드회원의 의무조항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분실 ‘즉시’ 신고를 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박씨는 잃어버린 걸 알아차린(인지) 즉시 신고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후 3시 이전의 200만원은 카드회사가 책임을 져주지만, 오후 3시 이후의 100만원은 속절없이 박씨가 물어낼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들고 금감원에 찾아가서 하소연을 해봐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들 법하다. 카드 분실 사실을 ‘인지’한 ‘시점’을 어떻게 따질 것인가? 인지 시점에 따라 보상 폭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는 대단히 애매하다. 신고자가 거짓말을 할 경우에 대비한 장치가 전혀 없다. 쉽게 말해 박씨가 5시20분에 분실신고를 하면서 ‘바로 직전에 잃어버렸다’고 할 경우 300만원 전액을 보상받을 수 있다. 이는 카드 고객에겐 대단히 유리한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직한’ 고객이 되레 피해를 보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또 하나 중대한 문제가 있다. 의무조항 가운데 대여·양도를 금지하고 있는 내용을 떠올려보자. 박씨가 갖고 있다가 잃어버린 신용카드는 남편의 카드다. 대여·양도 금지라는 의무조항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박씨는 한푼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박씨가 재빨리 남편에게 연락한 뒤 남편이 분실 신고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보상문제는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 전액 보상을 받게 된다. 물론 신용카드회사쪽의 정황증거 조사에서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런 애매한 규정으로 선량한 카드 회원이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약은 고객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는 데 머물지 않고, 불투명한 회색빛 규정 탓에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박씨의 경우는 하나의 작은 사례일 뿐 분실 카드에서 빚어진 분쟁에서 카드회사쪽이 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런 엉터리 같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금융당국도 물론 ‘회색빛’ 규정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을 알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최근 신용카드 수수료를 내리도록 유도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카드사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금감위는 카드사의 약관내용 가운데 부당하게 회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내용을 고치도록 하고 신용카드 부정사용으로 인한 책임을 원칙적으로 카드사가 지도록 할 방침이다. 현재 약관에는 분실·도난 등 사고가 생기면 카드사가 발뺌할 수 있는 회원의 ‘과실사유’가 포괄적으로 규정돼 악용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금감위는 카드 회원이 고의로 다른 사람에게 카드를 쓰게 하는 등 명시적인 경우에만 회원이 책임을 지도록 하고 중장기적으로는 회원이 일정 금액만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애매한 규정의 함정… 소비자 위주 해법을

사진/ 신용카드를 분실했을 때는 즉시 신고해야 한다. 신용카드사 직원들이 분실·도난신고를 받고 있다.
미국의 예를 보자. 이는 국내 금융당국이 벤치마킹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뒤 7일 만에 신고를 하면 부정사용에 대한 책임은 카드사가 지도록 돼 있다. 이때 고객은 50달러의 패널티(벌금)를 물게 된다. 복잡하고 세세한 과실 사유를 따지지 않는다. 규정이 단순 명쾌한 것이다.

물론, 미국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기는 어렵다. 카드회사들이 반발할 것이란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금융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성범 팀장은 “미국의 경우 한번 거짓말을 하면 기록에 남고 사후관리가 철저히 되는 등 신용질서가 정착돼 있어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며 “미국식이 좋다고 일방적으로 도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사실, 규정 개정 없이도 부정사용에 따른 문제점을 상당부분 개선할 수 있다. 카드에 얼굴 사진을 찍어넣거나, 서명(사인)을 새겨넣으면 제3자가 카드를 습득했더라도 쉽사리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대금결제가 이뤄지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조처만 이뤄지더라도 카드 분실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큰 폭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나 카드회사쪽에선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가맹점의 단말기 교체에 따른 비용 증가 및 매출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신용카드 회사들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소비자 입장에서 바람직한 분쟁처리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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