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사람책 도서관을 표방하는 소셜벤처인 ‘위즈돔’의 한상엽 대표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서울시 청년일자리 허브’ 사무실 책장을 배경으로 서 있다.
빈부 격차와 양극화. 한상엽 대표가 소셜벤처를 통해 풀고 싶은 열쇳말이다. 한 대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첫 번째 찾은 답은 ‘돈’이었다. 그런데 깊이 파고들며 공부할수록 아니란 걸 깨달았다. 돈보다 사회적 자본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집안, 좋은 대학이란 유리한 고지를 획득한 사람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기회가 많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거다. 반면 주변에 지혜를 나눠줄 사람이 없으면 맨땅에 삽질해야 한다. 누구한테 ‘나 좀 만나달라’고 하는 것조차 엄청난 탐색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한 대표는 경남 김해, 전남 보성의 ‘깡촌’과 광주 등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다. 재수학원을 제외하고는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다. 빈부 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튼 계기일지 모른다. 대신에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그에겐 ‘사람’이 있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진로를 고민할 때 친구가 건넨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을 읽으며 영감을 얻었고, 넥스터스 시절에 만났던 이재웅 소셜벤처 인큐베이터 ‘소풍’ 대표(‘다음’ 창업자)는 좋은 스승이 돼줬다. 해외 유학을 고민하는 그에게 “사회적 기업가가 본인의 정체성이라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무조건 가야 한다”며 일침을 가한 것도, 위즈돔에 1·2차 펀딩을 통해 8천만원을 투자해준 것도 이재웅 대표였다. 눈 마주치는 소통이 결정적 차이 ‘위즈돔’이라는 이름도 이 대표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처음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사업계획서에 써넣었던 이름은 ‘무림경매소’였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의 식사처럼, ‘무림 고수’들과의 만남을 경매 방식으로 주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매’라는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두 번째로 ‘라이프러리’(라이프+라이브러리)라고 이름 지었는데, 다른 업체에 도메인을 선점당했다. 그때 이 대표가 지혜를 나누고 지혜가 모여 있는 아카이브라는 의미의 ‘위즈돔’을 제안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새롭진 않다. 테드(TED) 등 강연 열풍이 불어온 뒤 2011~2012년 국내에도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CBS), <강연 100℃>(KBS) 등 고정 방송 프로그램이 자리잡았다. 위즈돔이 첫 서비스를 시작한 시점도 2012년 3월로 비슷하다. 하지만 단지 유행을 좇아간 건 아니었다. 보통 7~10명 단위로 이뤄지는 위즈돔의 만남 자리에선 “한 달에 얼마 버세요?” 따위의 솔직하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질문이 오간다.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는 소통이 고갱이다. 강연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지혜와 경험을 공유해서 ‘기회의 양극화를 줄이자’는 문제의식도 강하다. 다행히 창업 1년여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초반에 사이트를 구축하면서 쇼핑몰 솔루션을 갖다 쓰는 등 개발비용을 아낀 덕분이다. 위즈돔의 수익 구조는 참여 신청자가 참가비를 내면 30%를 수수료로 떼어내는 방식이다. 지난 2년5개월간 위즈돔을 이용한 참여자만 2만1천여 명, 위즈돔을 통한 만남이 2877건에 이른다. 한 대표는 “아직 수익 구조가 안정적이지 않다. 4명이던 직원이 11명으로 늘었는데, 월급을 140만원씩밖에 못 준다. 한 달 벌어서 한 달 월급 주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동안 한 대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화두는 돈이 아니었다.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생겼다. 위즈돔 이용자의 60~70%는 직장인이다. 여가생활로 이용하거나,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인맥을 쌓으려는 직장인의 수요가 많다. 그런데도 위즈돔의 설립 취지와 달리, 만남은 일회성에 머물렀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동료와 선배, 스승의 관계가 형성되진 않았다. 더구나 좋은 만남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 좋은 대학 출신이었다. 한 대표는 “위즈돔이 양극화를 해소하고 계층이동성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길 바랐는데, 오히려 구조가 더 견고해지는 것 아닌가 고민된다”고 털어놨다. 9월1일부터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는 건 그래서다. 한 대표는 “또 다른 실험”이라고 표현했다. 전·현직 최고경영자(CEO) 한 사람당 대학생, 20~30대 직장인 8명을 한 ‘그룹’으로 묶어 6개월 동안 최소 월 1회 이상 만나는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CEO들의 경영능력과 경험이 젊은 세대로 전수되길 기대하는 서비스다. 지역으로도 보폭을 넓히는 중이다. 서울에 집중된 사회적·문화적 자본을 배분하는 과정이다. 부산과 대전, 대구에 있는 정부기관, 지역 문화모임 등과 협력해 지역에서도 정기적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청소년들이 만나보고 싶은 사람책을 선택하면 직접 학교로 찾아가는 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서울시와 ‘사회적 경제 토크콘서트’ 열어 서울시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 토크콘서트’도 하나의 실험이다. 도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에너지·주거·결혼·교육평등 등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체인지 메이커’들이 일반인과 만날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행사는 격주로 목요일 저녁마다 열린다. 9월4일 ‘지역을 바꾸는 도시의 로빈후드들’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토크콘서트에서는 박동관 성북신나협동조합 이사, 박학룡 동네목수 대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창의성도 다양한 경험과 여유에서 나온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해서 학자금을 대느라 바빴던 친구들이 소셜벤처에 많이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체인지 메이커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도 ‘기회의 양극화’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 만큼 소셜벤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위즈돔은 매력적이다. 수많은 체인지 메이커들을 접촉할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지혜를 나누면 삶이 바뀐다. 꿈을 꾸게 된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