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이라 쓰고 ‘영리병원’이라 읽는다

8월12일 ‘보건의료 투자활성화 대책’ 정부 발표…
병원이 음료 제조할 수 있고 8개 경제자유구역에 외국병원 설립 가능

1025
등록 : 2014-08-19 14:34 수정 :

크게 작게

정부가 ‘보건의료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한 다음날인 8월13일 보건의료노조·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100여 개 노동·시민단체가 모인 ‘의료민영화·영리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명진 기자
피부가 우윳빛처럼 뽀얘지는 수술이 있다기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시설은 호텔처럼 좋다. 아니, 사실은 호텔이다. 내가 누워 있는 병실 벽을 맞대고 같은 층에 의료관광호텔(메디텔)이 있으니까. 중국과 동남아에서 온 환자들이 넘쳐난다. 병원에는 스파(SPA) 시설도 있다. 피부에 좋은 ‘물 치료’를 해준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면서 얼마 전에 새로 개발했다는 건강기능식품과 음료를 추천해줬다. ‘피부미인음료’라니 솔깃하다. 물론 병원비는 좀 비싸다. 게다가 물 치료비와 건강기능음료비는 별도다. 그래도 ‘닭치고’ 예약부터 하고 봐야 한다. 대기 환자가 엄청나다!

메디텔·병원, 출입구만 다르게 나란히

가상 소설이 아니다. 이미 지난해 말 정부는 의료법인이 호텔·스파 등 부대사업을 운영하는 영리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제주도에는 암반수를 이용해 탈모방지, 피부미용 등의 치료를 받는 호텔을 운영하는 병원이 생겼다. 지난 8월12일 정부가 발표한 ‘보건의료분야 투자활성화 대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보건의료노조, 보건의료단체 등은 “전면적인 의료민영화”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체 이번에 정부는 어디까지 의료 관련 규제를 풀어준 걸까.

우선 중소·중견 의료법인들이 영리 자회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각종 장벽을 허물어줬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메디텔과 병원을 별도 건물에 설치해야 했는데 앞으로는 별도의 출입구만 있으면 같은 층에 입주가 허용된다. 또 메디텔 안에 의원급 의료기관을 입주할 수 있게 해줬다. 메디텔 내 진료 과목을 확대한다는 이유에서다. 한미정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은 “종합병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메디텔에 의원이 들어가면, 1차 동네의원→3차 종합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서비스 전달체계가 붕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리 자회사가 건강기능식품·음료 연구·개발 사업까지 할 수 있게 부대사업 범위도 확대됐다. 홍삼음료·오메가3 등을 병원이 만들 수 있게 된 셈이다. 정부는 지난 6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하면서는 “환자에게 진료와 연계한 강매 위험이 있다”며 건강기능식품 판매업을 제외한 바 있다. “‘판매’가 아닌 ‘연구·개발’만 허용했다”(보건복지부 8월13일 해명 자료)지만, 의사 입장에서 자회사가 개발한 건강기능식품을 추천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김정범 보건의료단체연합 공동대표(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이번 대책은 특혜를 받기 위해 준비돼 있는 몇몇 의료법인들에 사실상 특혜를 주겠다는 것이다. 모든 병·의료기관에 온갖 영리 자회사를 만들도록 해줬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정부는 이같은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정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ㅅ의료법인은 내년 3월 인천시에 80억원 규모의 메디텔 착공을 앞두고 외부 투자를 유치 중이고 제주도 ㅎ의료법인은 내년에 건강기능음료 자회사를 만들 계획이다.


9월에 승인 결정되는 ‘싼얼병원’

국내 ‘영리병원 1호’ 설립도 성큼 다가왔다. 중국 자본이 제주도에 세우려는 피부·성형 병원인 ‘싼얼병원’이 그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르면 9월에 승인 여부를 확정짓겠다고 밝혔다. 최종 승인권을 가진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내국인 영리병원에는 반대하지만 외국인 영리병원에는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어 병원 설립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싼얼병원은 지난해 2월 병원 설립을 신청했지만, 응급의료체계 미비, 불법 줄기세포 시술 우려 등이 지적돼 사업계획 승인이 보류된 바 있다. 싼얼병원을 세우려는 중국 자본은 중국에서 줄기세포 시술을 하는 병원을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싼얼병원은 병상 48개를 운영하는 소형병원으로, 응급상황 발생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게 된다.

정부는 ‘영리병원’에 대해서는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정확한 명칭도 영리병원이 아니라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이다. 이 병원은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만 지을 수 있다. 애초엔 존스홉킨스병원 등 유명한 외국병원을 유치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었지만, 외국자본의 투자가 여의치 않자 국내 자본 투자는 물론 국내 의료진, 국내 환자 진료까지 차례대로 허용 범위를 넓혀줬다. 그러더니 이번엔 경제자유구역에 외국병원을 짓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외국 의사 10% 이상 고용, 병원장 및 진료의사결정기구의 50% 이상 외국인 고용)를 제주도 수준(외국 의사 종사 가능)으로 낮추겠다고 나선 것이다. 현재 전국에는 인천, 부산, 전남 광양, 대구 등 8개의 경제자유구역이 지정돼 있다.

변혜진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실장은 “이름만 ‘외국병원’이지 사실상 내국인 영리병원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또 경제자유구역 규제 완화는 8개 권역이라 사실상 전국적 영리병원 허용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투자개방형 외국병원 설립을 의료민영화와 연결짓는 건 상당한 논리 비약”(8월12일 KBS <뉴스라인>)이라고 선을 그었다.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은 외국인이 진료받는 걸 목표로 설립되는데다, 국민의 98%가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는 상황에서 내국인들이 굳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병원에서 치료받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반면 보건의료단체 쪽에선 외국병원이 부자들에게 비싼 치료비를 받는 ‘명품’ 병원 모델로 자리잡아 영리병원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다.

정부는 또 하반기에 ‘국제의료특별법’(가칭)을 제정해서 국내 보험사가 외국인 환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이다. 싱가포르·타이처럼 의료관광을 활성화해, 2017년에 외국인 환자 50만 명(지난해 21만 명)을 불러들이겠다는 것이다. 이상윤 ‘건강과 대안’ 상임연구위원은 “지난해 외국인 입원 환자가 2만여 명에 불과했는데 50만 명이라는 목표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해외 환자 유치 정책은 국내 의료상업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의심이 든다. 민간 보험사가 환자 유치를 할 수 있게 되면 메디텔·의료기관을 거느린 ‘의산복합체’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간 1천 명(서울 3천 명) 이상의 환자 유치 실적을 올린 보험사는 메디텔을 설립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연간 1천 명 환자 유치하면 보험사 메디텔 설립

박근혜 정부가 최경환 경제부총리 취임 이후 의료민영화에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의료민영화·영리화 저지와 의료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민주노총·보건의료단체연합 등 100여 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8월 말에 ‘국민대토론회’를 여는 한편, 보건의료노조와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3차 파업에 들어간다. 병원의 영리 자회사 허용과 부대사업 확대 등을 뼈대로 하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는 8개월여 만에 200만 명 가까이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돈보다 생명’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졌기 때문인지, 7월22일 하루 동안 무려 60만여 명이 서명에 참가하기도 했다. 8월19일, 범국민운동본부는 200만 명의 이름이 담긴 서명지를 들고 직접 청와대로 간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