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돈이 들어가는 각종 복지 사업을 벌이는 대신 보험회사가 관련된 보험상품을 개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보험사는 돈을 벌고 국민은 돈을 써야 하는 구조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다. 한 보험회사의 광고 장면.메리츠화재 TV 광고 갈무리
정부 역할의 구멍이 보험사의 틈새시장이 되는 사례는 흔하다. 2012년에는 높은 치과 진료비를 겨냥한 치아보험이 열풍을 일으켰고, 지난해부터는 50대 중반 은퇴자가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시기인 65살까지 소득 보장을 해주는 가교연금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들어선 우울증 등 정신·행동 장애까지 보장해주는 보험도 처음 등장했다. 민간보험이 원래 공공보험의 보완재이긴 하지만, 고령화 시대에 대한 불안을 먹고 민간보험이 계속 확대되면서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국민이 오히려 보험료 지출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가계 살림은 더 팍팍해지고, 소비가 줄어든 영향으로 경제도 더 어려워진다. 정부 권유로 나온 ‘4대악 보험’ 이젠 정부가 대놓고 민간보험을 골치 아픈 정책의 ‘만능 해결사’로 활용하기도 한다. 현대해상은 정부의 권유로 3월에 ‘4대 악 피해 보상보험’을 내놓기로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4대 악으로 지목한 성폭력·학교폭력·가정폭력·불량식품으로 피해를 본 국민이 보상받을 수 있게 하는 보험이다. 사망보험금 최대 8천만원, 상해·정신 장애 치료에 대한 최대 진단금은 100만원이다. 4대 악에 취약하지만 실손의료보험이나 상해보험에 가입하기 어려운 기초생활보호대상, 차상위계층 등 가정의 19살 미만 자녀가 우선 가입 대상이다. 월 보험료 1만~2만원은 지방자치단체나 학교가 대신 내준다. 현대해상 관계자는 “정부가 다른 보험사에도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만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일단 취약계층이 단체 가입하게 하고, 일반 개인에 대한 판매 여부는 향후 결정할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취약계층 보호를 민간보험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남윤인순 의원(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고 이에 대한 보상은 가해자나 국가가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폭력 피해자가 가입한 보험으로 피해를 보상한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보험업계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유도하는 보험상품은 위험이 높아 수익이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인은 나이가 많고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 보험사의 손해율(보험료-보험금)이 높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험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 없다. 정부가 안전장치를 마련해주는 덕분이다. 안전할증비율(위험률 산출을 위한 통계자료가 부족해 손해율 변동성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위험률에 일정힌 비율을 부가하는 것)을 30%에서 50%로 높일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윤용찬 ‘보험금숨은그림찾기 교육센터’ 센터장의 비판이다. “보험사는 고위험 보험은 ‘손해율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지금도 대부분의 보험사는 손해율이 올라가는 요인을 수시로 보험료에 반영하고 있다. 노후보장보험을 보면 정부가 노인복지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국민에게 비싼 보험료를 지워놓고 생색을 내는 것이다.” 보험사에 새로운 시장 열어주려는 의도 실제 정부는 고령층 특화보험을 노후 보장 수단 확대로 포장하고 있지만 보험사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기 위한 의도가 더 크다. 올해 금융위 업무계획에서 고령층 특화보험 출시 계획은 여러 정책 목표 중 ‘미래 유망금융서비스 육성’에, 앞서 지난해 11월 금융위가 내놓은 ‘금융업 경쟁력 강화 방안’에선 ‘100세 시대 신금융수요 창출’에 들어가 있다. 민간보험 확대가 정부엔 복지 비용은 줄이고 보험사 먹거리는 늘려줄 수 있는 묘안인 것이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부도 보험사도 걱정을 덜어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계는 혼자 걱정을 감당하는 값으로 한 달 평균 40만원을 민간보험에 쏟아붓고 있다(정의당 추계). 얼마를 더 써야 우리는 걱정을 이겨낼 수 있을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