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은 2010년 9월에 벌어진 ‘신한 사태’는 당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신상훈 신한금융 사장을 내치기 위해 꾸민 사건으로 판단했다. 지난해 1월, 신 전 사장(왼쪽)과 이 전 행장이 1심 선고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에 들어서고 있다.김명진
형사처벌 안 받는 라 전 회장, 이유는? 남산 3억원은 라 전 회장의 지시로 조성·전달됐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백순(전 행장)이 실제로는 라응찬(전 회장)으로부터 이러한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는데도 마치 라응찬의 지시가 있었던 것처럼 거짓말하며 비서실 직원에게 3억원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너무 이례적이다.” 또 이 전 행장이 거짓말을 하면서 현금 3억원을 마련해야 할 이유나 동기도 찾기 어렵다고 했다. 따라서 라 전 회장의 ‘모르쇠’ 진술을 재판부는 배척했다. 그래도 라 전 회장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범죄 혐의자도 검찰이 기소하지 않으면 법원이 처벌할 방법이 없다. 우리나라에선 기소권을 검찰이 독점하고 있어서다. 검찰 출신 변호사가 검찰 수사 단계에서 잘 팔리는 이유다. 라 전 회장은 2008년 12월 차명계좌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파헤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라 전 회장이 50억원을 건넨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변호사 비용 12억원을 쏟아부었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라응찬 회장의) 금융실명제법 위반은 과태료 사안으로 형사처벌 법규가 없다”고 밝혔다. 변호사 비용 일부는 이희건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료였다. ‘남산 3억원’과 관련해서도 검찰은 당시 은행장이던 신상훈 전 사장과 전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이백순 전 행장만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남산 3억원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이 전 행장이 당시 신한지주 부사장으로 재직할 때라 신한은행 법인 자금으로 3억원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남산 3억원을 지시·전달한 사람(라응찬·이백순)은 무죄로, 나중에 보고받은 사람(신상훈)은 유죄로 운명이 엇갈렸다. 대신 항소심은 신상훈 전 사장의 형량을 벌금형(2천만원)으로 낮췄다. 벌금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신 전 사장은 금융계 복귀가 가능해진다. 금융회사 임원 취업이 제한(결격 사유)되는 경우는 금융 관련 법령 위반은 벌금형 이상, 일반 형법은 금고형 이상이다. 신 전 사장은 형법상 횡령 혐의로 벌금형을 받아 금융회사 임원으로 취업하는 데 제한이 없다. 반면 이백순 전 행장은 금융 관련 위반 혐의로 금고형을 받아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면 재기의 기회를 잃는다. 재판부가 밝힌 양형 이유다. “이 사건은 라응찬(전 회장)과 이백순(전 행장)의 주도로 신한은행이 신상훈(전 사장)을 고소한 데서 비롯됐다. 이로 인해 신상훈은 신한지주 사장을 중도에 사임해야 하는 불이익을 입고 사회·경제적으로 미친 파장 역시 매우 컸다. 그런데 그 고소의 경위나 의도가 매우 석연치 않은 사정이 엿보일 뿐 아니라 고소 내용도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 신한 사태는 처음부터 신 전 사장을 내치려고 라 전 회장과 이 전 행장이 주도·기획했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한 셈이다. 신한금융, 반성 대신 보복성 인사 “신한금융이 반성의 뜻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금융계에서 일지만, 신한 쪽은 되레 ‘보복성 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8월 재판에서 신상훈 전 사장 쪽 증인으로 나와 증언한 신한은행 본부장 이아무개씨가 12월30일 해임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백순 전 행장 쪽에서 신한 사태를 이끈 인사들은 본부장 등으로 승진했다고 신 전 사장 쪽은 주장했다. 신한은행은 “이씨는 4년간 본부장으로 일해 임기가 만료된 것”이라며 “신 전 사장 쪽 인사도 본부장으로 승진해 보복성 인사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신상훈 전 사장 쪽은 반격의 시동을 걸고 있다. 신 전 사장과 함께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로 풀려난 이정원(58) 전 신한데이타시스템즈 사장이 지난해 12월29일 해임 처분으로 인해 지급받지 못한 임금을 돌려달라며 민사소송을 냈다. 2008년 당시 검찰이 이 사장을 배임으로 기소하자 회사는 그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이 사장이 거절하자 그를 해임했다. 이 전 사장은 <한겨레21>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당고소 유탄을 맞아 3년간 재판에 끌려다니며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신한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사과와 명예회복이 없으면 부당고소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도 추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