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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부와 기업은 ‘찰떡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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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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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펼쳐… 정부가 터를 닦으면 기업은 경쟁력으로 화답

사진/ 정부가 작을수록 좋다? 북유럽지역이 정보통신 분야에서 최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기업자체의 혁신과 함께 정부차원의 육성책에서 비롯된다.
외환위기를 겪은 뒤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은 구시대의 유물로 폐기처분됐다. 자유방임, 완전경쟁만이 최선으로 추앙받았다. 정부의 기능은 작을수록 좋으며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방임의 논리가 득세했다.

유럽지역 나라들은 어떨까? 이들 나라의 경쟁력도 오로지 자유경쟁 시장에 맡긴 결과일까? 자국 산업·기업에 대한 보호 장치는 전혀 없는 걸까?

이와 관련해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상무는 “자유방임 시장은 강대국처럼 내수시장이 충분하고 시장내부에서 완전경쟁이 작동하는 나라에서나 가능한 모델”이라고 말했다. 한보사태를 예로 들어보자. 만일 미국에서 한보사태가 터졌다면 부도가 나든 매각이 되든 월스트리트에서 하루 아침에 결론이 내려지고 다음날에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선 거의 1년에 걸쳐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다 결국 외환위기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세계 최고·최강인 미국에서나 통하는 완전경쟁 시장 모델은 우리처럼 좁은 시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게 윤 상무의 설명이다.

강대국의 시스템도 작은 나라에서 부작용


유럽 국가들의 예도 자유방임에 맡기기보다는 국가 주도의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게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 국가 차원에서 주력산업을 선정하고 국가의 힘을 집중시키는 산업정책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은 정보통신 자동차 기계분야에 국력을 집중하고 있다. 스위스가 정밀기계 금융 화학분야에서, 핀란드가 정보통신에서 앞서가고 있는 것도 정부의 인프라(기반시설) 구축에 힘입은 바 큰 것으로 평가된다.

핀란드는 93년 정부 주도로 국가산업 전략을 수립, 정보통신산업을 미래 성장사업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으며 또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절반 이상을 정보통신산업에 쏟고 있다. 스웨덴이 해마다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을 교육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하고 있는 데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자국기업에 유리한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인 ‘차등주식 제도’를 두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는 의결권에 차등을 두어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자국민들이 의결권이 많은 주식을 보유토록 함으로써 해외자본들의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같은 불평등 조항은 해외투자자들의 불만을 불러와 외자유치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곤 하지만, 자국기업들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에 맡기고 있다.

스위스도 이런 제도를 두고 있다. 배당·증자·매매 등에서는 똑같은 권리가 부여되지만 의결권은 차등화된 보통주, 기명주, 주식증서 3종류의 주식발행이 가능하다. 기명주식의 경우 기업이 주주명부에 등재될 수 있는 자격요건을 제한하기 때문에 기업이 원하지 않는 주주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기업들은 주주등재의 요건으로 스위스 국적과 거주를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외국인의 주식 보유를 제한하고 있다. 스위스의 대표기업인 네슬레, 스위스유니온뱅크(UBS) 등이 대부분 성장과정에서 의결권이 부여된 주식을 보유하고 자금조달에선 기명주와 주식증서를 활용했다.

이들 나라의 제도를 국내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역공의 논리로 적용하는 것은 물론 곤란하다. 나라마다 처한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럽 소국들의 모델 또한 세계화의 거센 도전에 맞닥뜨려 일정부분 수정을 요구받고 있는 실정도 헤아려야 한다.

스위스 정부는 90년대 초반부터 의결권 없는 주식의 발행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던 이자율이 80년 후반의 경제버블과 긴축정책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된 것을 반영한 조처였다. 이 때문에 의결권 있는 주식과 의결권이 없는 주식 사이의 프리미엄 격차가 줄어들고 외국인의 주식보유한도폭이 커지면서 경영권을 위협받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핀란드도 95년까지 ‘대기업에 대한 외국인 소유 규제법’을 두고 있다가 유럽연합(EU) 가입을 계기로 폐지했다. 스웨덴의 에릭슨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활용, 최고 1천배까지 차이가 나는 주식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최근 10배로 축소했다. 자국 기업에 대한 단단한 보호막을 그대로 두고는 해외자본을 끌어들일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도 이들 나라는 독자적인 발전 모델에 대한 고집은 여전히 꺾지 않고 있다. 스위스는 EU 가입에 대한 반대 정서에서 볼 수 있듯이 스위스 고유의 전략을 선호하고 있다. 핀란드, 스웨덴도 독특한 기업지배 구조의 줄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클러스터(산학연구 단지) 육성, R&D 투자를 통한 힘의 집중을 통해 특정산업을 키우는 전략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이들 나라의 자국 산업·기업 보호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부는 정책 입안 및 기업 인프라를 지원하는 구실에만 충실할 뿐이다. 클러스터의 예를 든다면, 정부는 터를 닦고 기업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만 전념한다는 것이다.

자국기업 보호정책… 미국식 왕도 아니다

핀란드는 노키아라는 세계적인 기업 하나가 부상하면서 나라 전체가 경제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약 일등 국가로 떠올랐다. 노키아의 매출은 핀란드 GDP의 24%에 이른다. 또 이 나라 전체 수출의 20%, 민간 R&D 투자의 3분의 1을 노키아가 맡고 있다. 노키아의 성공은 개별 기업의 혁신과 국가 차원의 산업정책이 절묘하게 결합한 데서 나온 모범 사례로 평가된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닮아가는 개혁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식이면 무조건 옳다는 인식이 퍼지고 정부의 역할은 극도로 줄이는 게 최선이라는 논리가 팽배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내려진 각종 개혁조처는, 설사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우리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럽 강소국들의 예 또한 우리 몸에 그대로 맞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각 나라에 맞는 고유한 발전모델이 있다는 시사점은 엿볼 수 있다. 우리 몸에 맞는 옷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IMF 졸업을 선언한 마당에서 최소한 미국식 일변도로 치달아온 지난 3년에 대한 반성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국가경쟁력 순위
국가경쟁력 순위(1~10위) 비고
1 미국 독일(12)
2 싱가포르 대만(18)
3 핀란드 영국(19)
4 룩셈부르크 프랑스(25)
5 네덜란드 일본(26)
6 홍콩 한국(28)
7 아일랜드 중국(33)
8 스웨덴 인도(41)
9 캐나다 러시아(45)
10 스위스 인도네시아(49)

자료 : IMD, <2001년도 세계경쟁력 연감>, 2001년

취리히·헬싱키·스톡홀름=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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