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구계획수정안 이행 가능성 의문
몽구-몽헌 진영간 싸움은 자동차 계열분리 문제에서 현대생명에 대한 증자분담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현대그룹은 지난 3월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한국생명과 조선생명을 합병시켜 현대생명 설립 인가를 받는 조건으로, 우선 6월 말까지 2230억원의 증자 및 후순위채권 매입을 완료하기로 약속했다. 생보업 진출을 허용해주는 대신 현대생명의 순자산부족액 6600억원 중 일부를 현대계열사가 책임지고 메우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오너일가의 경영권 분쟁과 현대건설 자금난으로 자금조달에 문제가 생긴 탓이다. 이에 따라 금감위가 계속 약속이행을 독촉했지만, 이번에는 증자에 참여하기로 했던 현대 계열사 가운데 자동차그룹(몽구 회장 계열)에 속하는 현대캐피털의 미온적인 태도로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 현대생명쪽에서는 “돈을 대기로 한 5개 회사(현대증권, 현대울산종금, 현대기업금융, 현대캐피털, 현대해상화재보험) 가운데 일부가 현대건설 유동성 지원에 나서야 하는 바람에 다소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한 뒤, “그렇지만 곧 분담비율을 확정해 증자이행계획 수정안을 금감위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캐피털쪽 관계자는 “현대생명 증자와 관련해 그룹 구조조정위원회와 자동차쪽에서 서로 엇갈리는 태도를 보여 난감하다”며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지만 곧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되는 터에 몽헌 회장이 거느린 금융계열사에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은근히 몽헌 회장 계열사들을 위한 사금고 구실을 거부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현대캐피털이 계속 이런 태도를 보이면, 현대생명은 아주 난감한 처지에 놓인다. 현대증권은 현대투신 경영정상화 때문에 다른 데 신경쓸 여력이 없고, 자체 자금수급도 빠듯한 상태에서 현대건설 지원에까지 나선 울산종금이나 현대기업금융 또한 ‘제 코가 석자’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마지막 한곳인 현대해상의 부담을 늘려야 한다. 이미 ‘울며 겨자먹기’로 현대생명의 지분 9.9%를 보유하게 된 현대해상은 사실 현대그룹 계열사가 아니다. 지난해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회장 몫으로 독립한 회사이다. 현대해상은 독립을 선언해놓고서도 현대그룹과 관계가 여전해 공정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잘 팔리지 않는 현대건설의 광화문 사옥을 693억원에 매입해주기도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다급한 사정을 고려해 눈감아주고 있지만 계약자들이 맡긴 돈으로 투자의 적정성도 따지지 않고 현대그룹과 계속 밀착거래를 하면 다시 계열지정을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현대해상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의 계열분리를 둘러싼 몽구-몽헌 회장 진영간 신경전도 여전하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가 애초 8월 말까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자동차 지분 6.1%를 채권단에 매각하기로 한 것을 다시 번복했기 때문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구조조정위가 명예회장의 지분을 3자에게 직접 팔겠다고 했지만 채권단과 협의도 없이 번복발표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고 말했다. 일단 겉으로는 제3자에게 넘기지만 나중에 다시 되사기로 하는 이면계약을 맺는다든지, 현대 금융계열사들이 해외에 거느리고 있는 역외펀드들을 이용해 ‘외자유치’라며 지분을 처분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다. 그동안 현대가 보여준 여러 가지 행태를 고려하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이다. 정몽준 의원 몫임을 강조하고 있는 현대중공업도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진영에 계속 반기를 들고 있다. 현대전자의 외화차입에 대한 지급보증 손실을 회수하려고 현대전자·증권을 상대로 법적 구상권 행사에 나선 데 이어, 지난 8월13일 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발표한 현대건설 자구계획에서 기대했던 조기 계열분리방안이 빠지자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현대중공업 노조원 150여명이 계동 본사사옥 앞에서 계열분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부터 조선경기의 사상최대 호황에 힘입어 영업이익은 많이 내고 있으나, 정몽헌 회장이 거느린 계열사 지원에 따른 손실 때문에 재무구조에 멍이 들고 있다. 따라서 하루빨리 현대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게 유리하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도 이미 지난해 초에 중공업의 계열분리 방침을 확정했다. 그런데 지난 4∼5월에 정몽헌 회장이 대주주인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이 느닷없이 각각 6.9%와 12.5%씩의 지분을 확보해 정몽준 의원의 지분 8.1%를 초과함으로써 사실상의 지배주주가 정몽헌 회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정몽준 의원의 불만에다 정부의 압박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의 지분을 처분해 조기 계열분리가 달성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한푼이라도 급한 현대건설로서는 중공업에 대한 경영권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중공업 지분을 빨리 파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교환사채 발행이라는 카드를 내세워 중공업 지분을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미봉책을 내놔 실망스럽다.” 현대중공업 한 임원의 말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 주식에 대한 현대건설의 교환사채 발행계획을 보면 ‘꿩먹고 알먹자’는 속셈이 엿보인다. 교환사채란 만기가 돌아올 시점에 교환대상 주식의 가격이 발행시 미리 정한 수준을 웃돌면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이다. 만약 주가가 교환가격을 밑돌 경우에는 일반적인 채권형태를 유지해 발행기업이 원리금을 지급하면 된다. 대신 보통 회사채보다 금리는 훨씬 낮다. 현대건설은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주식 6530만주에 대한 교환사채를 발행해 약 2200억원을 조달하기로 했다. 쉽게 말해서 자체 신용으로는 채권발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공업 주식의 가치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환가격이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주가가 2만원선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서 게걸음을 하고 있는데, 현대건설이 정한 교환가격은 4만원이다. 주가가 두배 올라야 채권이 주식으로 바뀔 수 있다. 이는 현대중공업 주식을 내놓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싸게 돈만 빌리겠다는 속셈이다.정부와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8월13일 발표한 자구계획 수정안을 “시장에 신뢰를 줄 만한 조처”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을 비롯해 15개 은행장들이 곧바로 모여 신규 운전자금을 대주고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는 9월 말까지 일괄 연장해주기로 했다. 채권단은 이렇게 유동성을 지원해주고 현대쪽 자구노력이 진행된다면 10월부터는 현대건설이 부채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9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자금, 즉 채권단이 막아주기로 한 현대건설 부채는 금융권 차입금과 회사채 및 기업어음을 모두 합쳐 7천여억원에 이른다.
현대사태는 일시적 유동성위기 아니다










